경계(境界) 2024.10

2024. 10. 31. 09:2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Boundary

 

 

 

사랑의 징검다리, 내외문

 

우리는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이른바 ‘테두리’라는 경계(境界)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곤 한다. 그리고 그 경계는 다름 아닌 ‘선(線)’으로 분별된다. 간단히 스케치하는 과정만 살펴봐도 그렇다. 얼굴을 그릴 때나 건물을 그릴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 윤곽에 해당하는 선(線)을 먼저 긋고 나서, 그걸 다시 작은 선과 명암으로 구체화해 나가다 보면 점차 대상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 추억 하나를 떠올려보자. 맨땅에 네모반듯하게 커다란 영역을 설정한 후에,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위치와 순서를 정하고 나서, 자그마한 돌이나 병뚜껑을 손가락으로 툭툭 튕기며 자기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놀이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땅따먹기’ 게임이다. 그 단순한 놀이에도 일정한 선(線)이 서로 간의 규칙(rule)으로 작동된다. 

우리 건축사들은 설계도서(設計圖書)를 작성하는 일을 주 업무로 하는 몽상가(?)들이다. 실제 설계자가 구상한 아이디어는 그대로 도면에 표현되고, 또 시방서(specification) 등의 글로 마무리되곤 한다. 도면이야 대부분 선(線)으로 가득 차는 게 당연하지만, 글(書)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글(書)이나 그림(圖)이나 모두 다 종이라는 바탕 위에, 일정한 약속에 따라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수많은 선(線)이 빼곡히 채워지다 보면, 이른바 ‘설계도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우리는 도심 가로변에서, 다시 또 선(線)이라고 하는 ‘경계’의 분별을 통해 하나의 건축물로 인식하곤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그 ‘경계(境界)’가 설계도면이나 건축물처럼 정말 그렇게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수학에서 선(線)은, 무수히 많은 점(點)의 집합이라고 정의되곤 한다. 그 선에는 ‘두께가 없고 길이만 있다.’는 게 전제되어 있다. 그게 수학에서 사용되는 공리이긴 하지만, ‘두께가 없고 길이만 있다.’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얘기도 된다. 불완전한 우리 인간이 실제의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단으로 구현된 실체(實體)가 어쩌면 온통 가상(假想)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종종 우리 현실에서는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애매하게 뒤섞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유년기 시절에는 선악(善惡)이나 피아(彼我), 음양(陰陽) 등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뉘어있었지만, 나이를 먹고 사회적 역할이 많아지면서 점차 그 구분이 모호해지던 경험이 적잖았을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주류가 된 양자역학(量子力學)의 세계에서 그건 더욱 분명해졌다. 고정된 실체로만 알았던 미립자(微粒子)의 세계가 사실상 허깨비로 관측되는가 하면, 그 유명한 ‘이중슬릿실험(Double-slit experiment)’에서는 입자(粒子)와 파동(波動)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한다. 빛이 입자와 파동의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닌 채, 관찰에 따라 그 성질이 섞바뀐다는 증명은 쉽사리 동의하기조차 어렵다. 

어디 그뿐이랴. 우주라는 거시세계의 시공간(space time)에서는 우리의 인식 체계에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진다고 믿었던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다. 그동안 절대적인 존재로 믿었던 시간과 공간도 사실 가변적(可變的)인 것은 물론, 우주의 어느 지점에서는 시간이 지체되고, 공간마저 휘어진다는 대목에 가서는 그저 아연실색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걸 동양철학에서는 ‘상입(相入)’이라고 했다. 모든 현상의 작용은 서로 융합하여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경계가 없으니 걸림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따지고 보니, 그렇게 생소한 철학까지 들먹거리며 헤맬 필요가 없었다. 

우리 전통건축에서는 진즉부터 자연스레 ‘상입(相入)’이라는 건축의 개념이 실제 생활공간에서 곧잘 연출되곤 했다. 용어의 표현만 다를 뿐, 공간과 공간 사이의 나눔과 구분보다는 소통과 관입(貫入)의 흔적을 곧잘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장 너머 저 멀리 펼쳐진 안산(安山)의 풍치까지 끌어들이던 ‘차경(借景)’이 그랬고, 앞을 가리던 분합문(分閤門)을 열어서 들어 올리면 얼핏 나누어진 것으로만 알았던 대청과 마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은 물론, 잠시 남녀를 구분하고 시선을 차단하던 ‘내외담(內外牆)’마저, 그 한편에 편문(偏門)이란 소통의 장치를 은근슬쩍 마련해두지 않았던가? 

조선 중기 때 낙향한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소쇄원(瀟灑園)’에서는 자연의 소재 모두를 아무 차별 없이 담장 내부의 공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물리적인 실체로 축조된 담장이 그 경계로 작동되지 않고, 되레 내·외부 공간의 매개체로 활용되기도 했다. 또, 하나의 공간에서도 낮의 공간과 밤의 공간, 그리고 침실이나 주방 등으로 구획된 공간의 용도 구분이 가볍게 허물어지는 것은, 우리 전통건축에서 흔히 경험해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요즈음은 현대건축에서도 전통건축의 소재를 하나둘 끌어다가 설계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꽉꽉 채워놓았을 것 같은 현대건축의 내부 공간에서도 외부공간이 이미 관입(貫入) 되어있기도 하고, 비록 소재는 현대식 재료인 콘크리트와 유리를 사용하긴 했지만, 내부 공간도 아니고 외부공간도 아닌 ‘완충공간’이 다소곳이 등장하기도 한다. 모두 다 상입(相入)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물리학의 연구성과에서 점차 규명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이 자연의 세계에서 사물과 대상을 구분하고 경계 짓는 것은 사실 우리 인간이 지닌 인식체계의 한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굳이 남과 북을 거듭 가르고, 보수와 진보를 굳이 나누며, 또 피아(彼我)를 애써 구분하면서까지 갈라치기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작금(昨今)의 우리 사회에서도, 본디 우리의 전통건축에 내재되어 있던 이 ‘경계의 모호함’에 주목해 보면 좋겠다. 
그것은 ‘못갖춘마디(incomplete bar)’가 아니라, 이미 성숙한 사회에서 저절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barometer)’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전통건축이 우리에게 묵묵히 시사해 주고 있었던 것처럼……. 

 

소쇄원에 자리한 광풍각(光風閣)

 

 

 

 

글·사진.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 ·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전북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대표 건축사로 활동하고 있다.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현상에 주목하고, 산 따라 물 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의 ‘온새미 사상’과 문화재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살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난 사랑』, 『전주한옥마을』 등이 있다.

ybdcs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