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⑰ 공간의 생명력을 품은 문래동 철공소와 창작촌 2024.10

2024. 10. 31. 09:4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⑰ Mullae-dong Ironworks and Mullae Art Village that contain spatial vitality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문래동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던 군부대는 공원으로 변했고, 널따랗던 방적공장 자리엔 숲을 이룬 아파트가 키재기하고 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가 처음 싹 틔워 목화마을이기도 한 문래동 한가운데, 그럼에도 옛날을 기억하듯 변치 않은 공간이 자리한다. 도림천과 철도, 그리고 아파트 숲에 갇혀 섬처럼 둥둥 떠 있는 공간이 백여 년 쌓아 온 시간의 층위를 시퍼런 용접 불꽃으로 단단히 동여매고 있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 이곳 철공소에서 스쳐 가듯 맡아 보았던 용접봉 타는 냄새는 여전했다.
소리가 먼저 반겼다. ‘문래’가 ‘물래’로 동화하는 음운현상처럼, 공간을 그득 채운 쇳소리가 오늘도 쉼 없이 흐르고 있었다. 시퍼런 용접 불꽃이 두꺼운 철판을 자르거나 이어 붙이고, 퉁퉁 탕탕 쇳덩이 부딪는 소리가 골목을 흔들어 댄다. 차 다닐만한 길은 트럭으로 꽉 차 있고, 칸마다 작업장엔 노동자 손길이 분주하다. 소리는 분명 각박한 노동자의 삶들이 부딪치는 파열음일 터다. 척박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이 공간은 어떤 위안으로 다가갔을까.

 

 


영단주택

 

발길이 문래동4가로 향한다. 승용차 교행도 벅차 보이는 좁은 도로가 곧고 길게 뻗어있다. 일제 강점기 토지구획정리사업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6∼8미터 도로로 구획된 장방형 획지는 길이 110미터, 너비 40미터가 표준이다. 이 긴 획지에 3열로 집을 짓고, 집 사이엔 너비 1미터의 보행자 공간을 두었다. 이 특이한 단지가 문래동4가를 이루고 있는 ‘영단주택’이다. 이 단지를 지은 ‘조선주택영단’이 옛 대한주택공사 모체였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침략 전초기지로 삼으려 1920년대부터 섬유, 식품, 피혁 등 경공업 위주로 피식민지 산업구조를 재편시킨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보급품 조달 목적이다. 그중 한 곳이 영등포 일대다. 따라서 영등포엔 이들 산업의 숙련 노동자들이 절대였다.
중일전쟁을 치르며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일제는 숙련 노동자를 관리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전시 강제 동원이 횡행하던 당시, 일본의 기구를 그대로 베껴와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한다. 안정적인 전시 보급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때부터 전쟁용 주택인 영단주택을 짓는다. 한강 이남엔 문래동 651호, 상도동 1067호, 대방동에 464호가 건설된다.
영단주택은 5가지 평형이다. 표준설계에 대지는 건축면적(건평)의 3배 이상, 하루 4시간 이상 햇볕을 받도록 규정했다. 외관과 평면구성은 일본식이다. 다만 조선인 노동자 주택에는 온돌방 한 칸을 두도록 했다. 평면은 북쪽 현관에서 진입하여 복도를 거쳐 각 방에 닿는 일본의 ‘가운데 복도’식이다. 또한 마루 없이 집 안에 화장실을 두고 좁은 마당이 딸렸다.
주택규모를 갑(20평), 을(15평), 병(10평), 정(8평), 무(6평)로 구분하여 민족과 계급으로 차별했다. 갑과 을은 분양으로 일본인 관리 몫. 병, 정, 무는 조선인 직원과 노동자 몫으로 임대다. 갑, 을, 병에는 욕실을 정, 무는 50호 단위로 공동목욕탕을 두었다.
소규모 공장으로 용도가 바뀌었을 뿐, 영단주택의 당시 흔적은 문래동4가에 그대로 남았다. 1960년대까지 가내수공업형 섬유공장이 이들 차지였고, 1970년대 청계천에서 철공소 등이 이주해오면서 현재의 토지이용으로 굳어졌다. 크고 작은 기계·금속 공장과 점포 일색이다. 구로공단으로 불리던 굴뚝산업 대부분이 남동, 반월, 시화공단으로 빠져나갔어도 문래동 철강산업은 특유의 생명력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문래 창작촌

 

문래동3가 큰길가에 이곳을 아우르는 공간 ‘문래 창작촌’ 안내판이 보인다. 옛 방적공장 남쪽의 작은 언덕에 두엇이 걷기에도 벅차 보이는 너비로 일정 간격의 곧은 골목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골목 안 작은 공장이나 점포, 주택이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집들의 용도가 바뀌는 중이다. 음식점과 카페, 주점이 자리하면서 공간기능 전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남아있는 공장과 점포가 대낮을 지배한다면, 젊은이 취향으로 전이한 집들은 분명 저녁에 더 활발할 터이다. 이렇게 바뀌어 간다면 이곳에도 젠트리피케이션 바람이 불어올까? 아니면 공장들이 자리를 지키며 이를 막아낼까? 허름한 벽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예술가의 흔적이다.
문래동3가 서쪽이 소규모 필지에 작은 건물이라면, 경인로에 면한 동쪽엔 비교적 규모 있는 공장이 자리한다. 한눈에도 두꺼워 보이는 철판과 각종 철재가 즐비하고, 이를 옮기는 중장비가 칸마다 매달려있다. 곳곳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고, 쿵쾅거리는 쇳소리가 요란하다. 공장은 단층부터 3∼4층까지 단조로운 입면이고, 한 바퀴 빙 도는 도로에 면하여 일백수십 개의 공장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  
나이 들었으되 공간은 무척 건강해 보인다. 2층∼4층은 사무실이거나 예술가들이 입주한 창작공간이다. 1990년대 후반 밀물처럼 밀려든 중국산 철강재에 문래동도 큰 타격을 입는다. 폐업이 속출하고 빈자리가 늘어난다. 이 자리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홍대 앞 가난한 예술가들이 채우기 시작한다.
철공소와 예술가의 만남,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보인다. 예술가의 진출에 철공소의 첫 반응은 어떠했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20여 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보완적 존재로 공생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간판이며 벽, 셔터에 그려진 그림들이 그 증거다. 철공소건 예술가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본질은 똑같다. 기계적 기능에 충실한 결과물이냐 창작이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큰 길가에 나앉은 짤막한 코의 피노키오 표정이 심오해 보인다. 사람이 되고자 했다던 동화 속 이야기처럼, 진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엄청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데에 생각이 가닿는다. 각박하다.

 



철강 골목

 

창작촌 맞은편 남쪽이 문래동2가 철강 골목이다. 문래동우체국 앞에서 길을 가늠해 본다. 공간은 기계와 금속, 금형을 다루는 곳이다. 오래된 다방과 음식점이 온전하고 최근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는 퓨전 주점과 음식점, 카페가 혼재하여 세대별 문화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모습이다. 물론 긴 시간 후엔 확실한 공간 천이가 이뤄질 것이다. 시간이 녹여내는 건 놀이와 여가뿐만 아니라, 세대와 문화도 아우르기 때문이다.
우체국을 마주 보고 왼편 골목으로 접어든다. 비좁으나 정갈하고 차분하다. 방송을 탔음직한 오래된 식당 옆으로 앙증맞은 아트 갤러리가 보인다. 골목엔 지난 계절에 열린 여러 행사 홍보지가 붙어있다. 옆으로 제법 규모를 갖춘 또 다른 갤러리가 보인다. 문래동 저녁을 밝힌다는 전등이 공중에 매달려 흔들흔들 재잘댄다. 둥근 화분을 차지한 키 작은 나무가 바뀌는 계절을 실감 나게 한다. 
기역(ㄱ)자로 꺾어 도니 오래된 문래동이 연출된다. 어느 카페로 한 무리의 중년 여성이 들어간다. 이곳 주점과 카페는 분명 밤을 환히 밝힐 것이다. 이게 변화하는 문래동의 본 모습이다. 어느 세대나 부담 없이 소비하는 공간. 생산과 소비, 노동과 휴식, 창작이란 예술을 용접 불꽃과 쇳소리에 버무려 내는 공간.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관용이 흐른다. 공존으로 변화를 일궈 나가는, 이 공간이 보여주는 삶의 자세가 문득 부럽기까지 하다.
도시공간은 시간의 퇴적층이다. 매 시공간을 살아낸 여러 층위 삶이 퇴적되어 있다. 문래동은 그런 흔적이 가장 뚜렷이 남은 곳 중 하나다. 퇴적의 표층에는 철강산업과 예술 창작촌이 공존·공생하고 있다. 이 표층을 지워내려는 시도가 없는 바도 아니다. 재개발을 유도하는 플래카드에서 이를 쉬이 유추할 수 있다.
이곳은 준공업지역이다. 안양천 변 우안을 차지한 준공업지역 벨트는 옛 구로공단 흔적이다. 공단은 디지털산업단지와 업무지구로 변했고 지금도 변화하는 중이다. 그런 측면에서 문래동이 고유 생태계를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작은 필지로 분할된 토지의 필지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생명력의 근간이 되는 공간 특성은 그 무엇보다 ‘뭔가를 만들어냄’에 있다. 만들어냄은 그게 부가가치건 예술이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 문래동이 이런 힘을 잃지 않는 한 공간의 생명력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낡았지만 승화하는 문래동에서,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망울을 보듯 기뻤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