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0. 23:05ㆍ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A Study on Historical Development of Western Architectural Beauty Concept (3)
_ aner tetragonos(ανηρ τετραγωνος) and Arkadia
1. 정사각형 인체의 인간
(1) 대우주와 인체비례
‘사각형의 인간’[‘호모 콰드라투스’, (라)homo quadratus]/‘아네르 테트라고노스’, (희)aner tetragonos/ανηρ τετραγωνος] / [1.ανηρ-man 2.τετραγωνος-1.square] 또는 <정사각형 인체의 인간>이라고 하는 고대의 개념은 ‘인체가 사각형 또는 원 속에’(homo ad circulum and homo ad quarratum)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그리스인들로부터 생겼다. 그리스의 고전기 동안 인간의 이상적인 신체는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원과 사각형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예술가들은 대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건축에서의 표준율은 BC 5세기까지 그 형식을 정립했다. 특히 신전 건축에서 적용한 범위는 한 부분만이 아니라 건축물 전체에 걸쳐서 비례를 통한 시메트리아를 창조했다. 그리스인들의 기하학적 도형으로서의 미의 형식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이었다. 특히 완벽한 비례미를 갖춘 이등변 삼각형은 3:4:5라는 세변의 비례를 갖춘 것으로서 ‘피타고라스 삼각형’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을 진정으로 완벽한 아름다운 형식이라고 했다.
‘아네르 테트라고노스’는 기하학적 형태와 일치하는 인체비례의 개념으로서, “대우주(원과 네모꼴)의 유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완결된 형식(Homo imitatur mundum in figura circulari 또는 De harmonia mundi totius)” [임범재, 『인체비례론(고대로부터 르네상스까지)』, 홍익대 출판부, 1980, p.56]이다. ‘사각형의 인간’(정사각형 인체의 인간)은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 1439-1502)의 길다란 교회 설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국립장서관소장의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의 드로잉>에서는 인체와 동일한 비례를 가진 건축은 원과 사각형의 기하학적 도형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이 드로잉은 훌륭한 건축물의 비례는 인체 비례와 일치해야 한다는 르네상스의 신념을 보여준다. 디 조르조는 이것을 트랜셉트(십자형 교회 좌우 날개부분)와 앱스(반원형 부분)가 있는 라틴식 십자가 평면도 위에 길게 늘어진 모양의 교회를 예로 보여준다.” (HA.Ⅲ, p.232)고 했다. 또한 같은 드로잉을 가지고 그는 “르네상스의 두 번째 본질적 이념도 예증한다. 훌륭한 건축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 특히 원과 사각형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가 설계한 교회는 중앙 집중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의 원리를 지키고 있으며 도면 전체가 사각형이라는 규칙적인 형태로 분할되어 있다.” (HA.Ⅲ, p.232.)고 했다. 필라레테가 이야기한 ‘예술을 위한 척도를 인간이 제공한다’는 것과 같이 그는 ‘건축은 인체와 동일한 비례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레오나르도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안 맨>에서 처럼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는 체격이 좋은 사람의 비례는 원이나 사각형,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과 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체 계측적인 개념(HA.Ⅲ, p.229)이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의 위대함과 본질은 무한한 변형을 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했던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는 “내가 너를 세계의 중심에 놓았으니, 그것은 네가 그 자리에서 네 주변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더욱 쉽게 보게 하기 위함이다.” (Toby Lester, 『다빈치, 비트루비우스 인간을 그리다』, 오숙은 역, 뿌리와 이파리, 2014, p.105)라고 했다. 신의 모습과 비슷한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유비적 관점에서 보았을때, 피코는 인간이 ‘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존재로의 위치까지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편에서 신을 닮는(Imago Dei / Imago Christi) 것을, 이데아를 파악하는 방법으로서, “그러므로 되도록 빨리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말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되도록 신을 닮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신을 닮은 사람은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 타인에게는 올바른 행실을 하게 되고 신 앞에서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Plato, Theaitetos, 176b)라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건축미학의 중심 개념으로 본 ‘사각형의 인간’이라고 하는 ‘아네르 테트라고노스’(ανηρ τετραγωνος)는 신의 형상(species)으로 도달하게 되는 정신적 소우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자유로운 신과 같은 피조물로서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의 완결된 인간 형식의 유비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인체와 <원형과 사각형>의 개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러서 기하학적 형태와 인체비례의 일치성으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또는 ‘인체비례도’(Canon of Proportions)라는 드로잉을 그렸다. 그는 비트루비우스의 유명한 『건축십서』 제3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는데, 즉 원의 중심에서 보면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고(배꼽을 기준으로 원을 돌리면), 동일한 인체의 위치에서 정사각형을 그리고 키의 길이와 두 팔의 너비가 같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으로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소묘 작품을 비트루비우스의 [건축10서 제3서 제1장 제3절] (Vitruvius, De archit., Ⅲ 1, 3.) <신전 건축 과 인체에서의 심메트리에 관하여>편에서 ‘인체의 건축에 적용되는 비례의 규칙을 신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그린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원과 사각형에 대한 의미(‘원과 정사각형 안에 꼭 맞게 사람을 놓을 수 있다’)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즉 “사람의 배꼽이 실제로는 정수리와 발 사이의 중간 지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사람의 배꼽을 공통의 중심으로 하는 원과 정사각형을 그리는 대신, 프란체스코, 조르조 마르티니 디가 했던 것처럼 정사각형을 밑으로 내려버렸다. 정사각형을 내리자. 그는 배꼽이 원의 중심에 놓이고 생식기가 정사각형의 중심에 놓이는 인체를 그릴 수 있다” (Toby Lester, ibid., pp.230-231)는 것이다. 즉 비트루비우스가 갖고 있는 이상과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적인 실제, 이러한 두 가지의 조건에 모두 부합하고자 하는 인간을 드로잉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개의 도형이 똑같은 인체 위에 놓여 짐으로써 근본적인 비트루비우스의 메시지, 즉 인간 형상이라는 것은 정사각형과 원으로 제시된 자연과의 조화 구현과, 정신적 소우주인 완결된 인간 형식의 유비적 존재의 메시지를 담아냈던 것이다.
2. 아르카디아로서의 아름다운 건축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사인 팔라디오의 핵심적인 프로젝트인 빌라 로톤다는, 원과 정사각형의 기본개념을 가진다. 빌라 로톤다는 중심공간을 두면서 중앙에 홀을 위치시키고 양쪽으로 작은 방들을 대칭으로 두면서 우측과 좌측의 동일한 방의 배분으로서 사면이 동일한 입면을 구성하는 현관 로지아(주랑/콜로네이드)를 두었다. 당연히 르네상스 건축에서는 설계의 필수조건으로서 심메트리아를 채택했다. 이 대표적인 팔라디오의 빌라 건축을 비롯하여 르네상스의 주거 건축으로서의 빌라는 르네상스가 낳은 시대적인 전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팔라디오는 고대 빌라 건축을 연구하고 전원저택 속에 그의 이상을 담아놓은 업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팔라디오의 빌라건축을 통하여 어떻게 전원이라는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르네상스 시대 빌라의 최고의 친환경적인 조건은 베르길리우스(Publius V- ergilius Maro, B.C. 70-19)의 ‘목가적 이상향’에 나타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내용을 보면, 베르길리우스 『목가집 』(Bucolica seu Eclogae)의 근간을 이루는 주제는 다름 아닌 아르카디아의 이상을 생각한 부분이며, 삶의 목가적 의미를 추구했다. 베르길리우스는 “전원의 삶과 풍경에서 원초적 무구(無垢)를 바라보고, 인간의 온전한 희열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영혼의 안식을 동경하던 시대사조를 반영하고 있다.”(성염, 『베르길리우스 <목가집>의 에피쿠로스적 주제』, 『서양고전학연구』8, 1994, pp.95-96) 이러한 아르카디아의 평화스런 개념은 르네상스의 빌라건축에서 나타난 후 자연과 인간의 친화적인 관계를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베르길리우스에게 있어서 『목가집』은 아름다운 노래를 평온한 목가의 전원생활 속에서 부르며, 에피쿠로스적인 자연 배경 속에서 아타락시아라는 흔들림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또한 “대자연으로 하여금 인간의 사회적 운명에 까지 공감하게 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이 혼연 일치된 경지(sympatheia)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ibid., pp.63-64)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는 다름 아닌 ‘평정의 쾌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쾌락이라는 의미는, “고통이 없는 것, 마음의 동요에서 해방되는 것(άταραξία) 및 마음의 평화와 평정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Hirschberger, Johannes, 『서양철학사(상, 하권)』, 강성위 역, 이문출판사, 1992, p.342)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집』에 나타난 자연의 문제에 대하여는, 에피쿠로스가 탐욕과 욕정으로 어둡게 된 인간들에게 자연이라는 이름이 내리고 있는 타이름이 있었는데, ‘적은 것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tois oligois archometha)는 가르침을 내렸고, 루크레티우스는 구체적으로 ‘신체적 본성은 적은 것만을 필요로 한다’(pauca videmus esse opus omnino)는 진실을 베르길리우스에게 깨우쳐 주었다.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그 삶은 어디에서부터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인가? 베르길리우스는 아르카디아의 모티프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시세계를, 도덕적 고양의 자연주의라는 것에 입각하여 해석함으로써 그 시도를 하며, 자연이라고 하는 범형에 맞추어 본인의 시세계를 구축, 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피쿠로스 사상이 베르길리우스에게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구원의 메시지로 들렸는데, “세계는 우리가 놀라고 두려워할 신성들이나 운명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자와 원소로 이루어진 물질이 가득할 따름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정신적인 인간 존재들은 자기와 동근원(同根源)을 가진 대자연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며 살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성염, 『베르길리우스 <목가집>의 에피쿠로스적 주제』, 『서양고전학연구』8, 1994, p.96)고 하면서 또한 “자연의 법칙에 동화하고 노래를 읊고 소박하게 사랑하는 삶이었다. 인간이 그러한 자세로 임할 때에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연과 땅의 무구함과 건강함을 건실하고 애정어린 자세로 접촉함으로써 건실한 삶의 양식을 가꾸어 나가도록 북돋아 준다.”(성염, ibid., p.96)고 밝혔다.
에피쿠로스적 쾌락으로서 아르카디아 세계의 행복을 그렸던 베르길리우스는 “우주에 대한 지식(깨달음) 대신에 그의 시에서는 우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자리 잡으며, 그의 첫 번 목가에서부터 스승이 찾던 참다운 쾌락을 원초적 자연에서 발견하고, 고통스러운 인간 정염에 대한 치유(therapia)로서 인간이 자연과 통교(通交)함이 하나의 이상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을 표상화한 것이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낙원 같은 세계이다.” (성염, op.cit., p.76)라고 밝히고 있다.
임범재는 <미의 아르카디아>를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다. “미술사 부르크하르트는 라파엘 그림의 출처, 기교, 구도, 색채에 관한 전문적(직업적)인 지식을 찾기 보다는 인간성, 신의 인간성에 더 관심이 갔다. 그러하듯이 그는 ‘폐허의 미’를 통해 지평선 너머 미의 아르카디아에 향수를 느꼈다. 유명 건물보다는 오히려 신전 기둥이 나뒹구는 쓸쓸한 폐허를, 신형 건물보다는 신전이나 망령의 유택을, 완벽한 것보다는 ‘미완성’(non finito)품을, 완벽하게 완성된 조각품 보다는 torso를, 윤기나는 그림보다는 프레스코를, 걸작품이라고 해서 박물관의 상좌 같은 자리를 차지해 만인의 이목을 끄는 명화보다는 그 밑그림들을 좋아했다.”(임범재, 『21세기 건축에 있어서의 기술과 예술: 폐허 사이 저 너머-비트루비우스, 알베르티, 부르크하르트』, 『건축』37(5), 1993. 10, p.23) 건축은 본질적 개념이 더욱 소중하다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르네상스 빌라문화(빌레지아투라, Villeggiatura)는 고대 로마를 통하여 르네상스 건축사들이 형성·발전시켰는데 장원(莊園)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부분과, 목가적 삶으로 회기하려는 황금시대로서의 베르길리우스 전원시의 영향으로 볼 수가 있다. 팔라디오의 빌라는 그 당시 이상향의 목가적 개념으로서 최고의 자연 환경과 전원생활의 문화인 ‘빌레지아투라’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축4서』(제2서, 15장)에서는 입지 조건에 대해서, “이 빌라(빌라 트리시노)가 놓인 부지(도판38참조)는 매우 아름답다. 탁 트인 평원 한복판에 위치한 언덕 위에 있기 때문이다. 언덕 정상부의 중심에 둥근 홀이 만들어 지고 그 주위를 여러 방들이 돌아가며 에워싼다.”고 밝히고 있다. 빌라 로톤다는 로지아를 통해서 바킬리오네(Bacchiglione) 강을 비롯하여 주변의 전망을 놓치지 않고 끌어들이는 자연환경의 완벽함과, 신전형태의 외관과 질서 잡힌 대칭 구도의 엄격함 속에서 평정의 쾌락을 창조하고 인간과 자연의 혼연일치의 경지를 가져다주는 이상적인 빌라 건축으로 ‘건축을 자연화’한 개념으로서의 건축미를 보여주었다.
3. 아름다운 건축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
미적 아르카디아로서, 건축미의 개념은 건축다운 모습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선한 건축의 모습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건축의 본연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내용은 자연 이념이라는 주체가 감성화 되어서 존재하였던 땅(자연)의 순수함을 소유했고, 그리고 자연 순환이라는 질서는 잘 잡혀서 알맞은 균형을 이루었다.
우현 고유섭은 『조선건축미술사 초고』 경관의 제목에서 이중환의 택리지를 언급하고, “무릇 살터를 잡는 데는 첫째, 자리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인심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이기웅, 『조선건축미술사 초고(우현 고유섭 전집 6)』, 열화당, 2010, p.27)면서 배산임수를 꼽는다.
김수근은 네가티비즘 공간에 대해서 그 가변성과 유연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플라톤의 코오라 공간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의 코오라 공간은 어머니, 자리, 장소, 기반 등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김수근은 건축 공간의 확장은 물론이고 축소도 가능한 네가티비즘적 공간을 자궁 공간(Womb Space)이라고 했다.
까를로스 푸엔떼스(Carlos Fuentes Macís, 1928-2012)는 건축이란,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자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응답한 형태, 즉 신에게 봉헌된 인간의 자연관이자 자신들이 이해한 우주를 표현한 방식이라고 했다.” 자연은 어떻게 무슨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인간은 그 아르카디아적 미의 이상향을 향해 가면서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고 건축의 해답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한국 전통 주거공간에서 채와 마당이라는 상호 콘텍스트는 매우 뛰어나다. 채는 보통 주요 3채라고 할 때, 안채, 사랑채, 행랑채라는 의젓하고 당당한 공간을 형성하면서 물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피안의 세계까지도 나타내면서 각각의 요소마다 채와 공간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옥의 <채와 마당의 건축미학>을 통하여 몇 가지 특성을 가진 주제들을 현대적 건축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채와 마당은 하나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외부공간의 중요성 인식 2) 감성화로 이루어진 칸(間)의 건축미학으로 여유로움과 자유로움의 미학 3) 안마당의 열림으로 사이공간의 조절공간미학 이해 4) 合자연성으로 채와 빈 것(마당)과 자연의 합일 5) 뒷마당과 같은 카타르시스적 공간의 소중함 등이 있을 것이다. 즉 외향성, 감성화, 융통성, 자연성, 카타르시스 미학성이라는 것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아네르 테트라고노스는 정사각형 인체의 인간으로서 원과 사각형 속에 들어간다는 개념으로서 도형의 문제 보다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상으로써 완결된 형식을 의미했다. 팔라디오는 천정이 뚫린 아트리움의 중정이라고 하는 안뜰을 설계하면서 마치 한옥의 안마당과 같은 건축 개념을 표현했는데, 이러한 작품은 중심형 공간 미학을 갖는 팔라디오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팔라디오는 빌라 건축 프로젝트인 로톤다를 통하여 ‘빌레지아투라’라는 이상을 구현했는데, 베르길리우스의 목가적 이상향 개념을 토대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 속에서 건축미의 아르카디아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상과 같이 역사적 전개 연구를 통하여 건축미 개념을 해석했고, 그 해석은 ‘아네르 테트라고노스’와 아르카디아라고 하는 아름다운 건축의 중심 개념으로 귀결됐다. 현대적 적용 가능성은 미학사 텍스트에 나타난 것처럼 비례미에서부터 디세뇨의 건축개념들이 (비)물질이 되어서 아름다운 건축의 모습이 되며, 한옥 <채와 마당의 건축미학>에서의 비물질적 이념 또한 건축미의 아타락시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론
본 논문은 지금까지 브와디스와프 타타르키비츠의 주저인 『미학사』 Ⅰ.Ⅱ.Ⅲ.이 담고 있는 건축미 개념의 의미를 가능한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 사상적 핵심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 새로운 해석은 ‘아네르 테트라고노스’와 아르카디아를 아름다운 건축의 참된 사상적 지향점으로서 나타났다.
‘건축미’개념은 고대미학의 고졸기의 두 번째 시기에서부터 시작했다. 본고는 현대건축까지 변하지 않고 요구되는 견고성, 실용성 그리고 미를 비트루비우스 정의인 건축술의 3목표 가운데에서, 특히 미의 부분을 미적 판단의 최고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건축의 아름다움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건축십서』에서는 건축미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즉 “건축미는 건축 작품의 외관이 즐거움을 주고 우아할 때 보장될 것이며 각 구성부분들의 비율은 심메트리아를 위해서 올바르게 측정되어진다.” 심메트리아와 에우리드미아라는 객관적 비례와 눈의 비례를 대립적 개념으로 대비시켰다.
BC 5세기 그리스 건축사들은 예술가들 중에서는 최초로 건축의 표준율의 형식을 정립하고 카논을 신전 건축 설계에 광범위하게 응용하고 논문으로도 기록했다. 즉 고전기 그리스 건축은 카논에 의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은 구성적 예술의 기본이었다. 신전 건축에 있어서 조각과 회화는 건축을 완성시키는 요소들이었다. 비례로 인하여 심메트리아는 힘의 지배 관계가 균형이 잡힌 안정된 모양이 되는데, 조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졸기와 고전기 건축미는 비례미와 심메트리아의 조화미, 데코룸과 적도의 건축미가 파악됐다.
중세미학에서 고딕의 성당건축은 이전에 비해 상당히 높게 될 수 있어서 보다 날씬한 비례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빛의 미학에서 고딕의 빛은 신의 영광의 빛이라는 의미로서 정의 하였고, 빛과 색채를 결합하여 스테인드 글래스라는 고딕성당의 예술형식을 발전시켰다. 로마네스크건축은 단순한 수적·기하학적 규칙이라는 단순성에 의한 형식들을 채택했고, 벽의 육중함과 표면의 거칠음의 미학을 찾아내었다. 중세 건축미는 상징성의 미, 기하미, 빛의 미학에 기초했다.
르네상스의 콰트로첸토는 건축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개념과는 다르게 변화했다. 그리스 시대에는 건축이 공간을 둘러싸는 것이지만 이제는 표면을 꾸미고 벽을 장식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기둥이 공간적인 요소였지만 르네상스의 건축사는 기둥을 벽의 한 요소로 만들었다.
16세기의 고전적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은 웅대함, 조화, 균형 등으로 말할 수 있으며 비례, 규칙성, 대칭성과 같은 원칙을 지키게 되었다. 즉 르네상스 시대는 직선적인 파사드와 직각의 결합이 지배하게 되는 엄격한 설계가 되살아나면서 둔각이나 예각의 설계가 금지되었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균일한 배치’에서는 르네상스 건축의 건물 창문의 모양이 규칙적 배열로 되어야 하는 것은 의무사항이 되었다. 르네상스 건축미는 비례미와 우아미, 콘키니타스, 디세뇨 개념이 중요한 건축미의 요소들이었다.
건축미학의 중심 개념으로서의 ‘아네르 테트라고노스’ 개념은 ‘원과 네모’라는 우주의 기하학적 원상속에서부터 완성된 인간의 모습으로 구현된 도형으로서 유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완결된 형식이다. 마크로비우스는 ‘세계는 크게 나타난 인간이고 인간은 작게 나타난 세계다’라고 쓴바 있고, 소우주와 대우주 간의 관계에 대하여 로마초는 인간의 신체를 소우주라고 불렀다. ‘사각형의 인간’(호모 콰드라투스)은 신의 형상으로 도달하게 되는 정신적 소우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자유로운 신과 같은 피조물로서 모든 것의 원천으로서의 완결된 인간 형식의 유비적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팔라디오가 설계한 빌라 로톤다는 순수 기하학적 미의 이상적인 비례미의 원리를 보여주며 그 대칭적인 구조를 나타내는 르네상스의 최정점의 건축으로서 정사각형이 갖는 우주의 상징성과 원형의 완결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 빌라 건축은 그 당시 이상향의 목가적 개념으로서 최고의 자연 환경을 갖으면서 전원생활의 문화인 ‘빌레지아투라’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빌라 로톤다는 로지아를 통해서 주변의 전망을 놓치지 않고 끌어들이는 친자연환경의 순수함 속에서, 평정의 쾌락을 창조하고 인간과 자연의 혼연일치의 경지를 가져다주는 이상적인 빌라 건축으로 ‘건축을 자연화’한 건축미 개념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이 갖는 친화적인 관계성을 회복하고 적은 것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자연의 가르침인 원초적 무구(無垢)의 아르카디아의 이상적 건축에서 현대 건축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건축미 개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당은 생활 터전이며, 삶의 한 방법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채와 마당은 함께 존재하며 한 쌍을 이룬다. 마당의 특성이 갖고 있는 외향성, 감성화, 융통성, 자연성, 카타르시스 미학성의 개념들은, 아름다운 건축의 현대적 적용에서 <채와 마당과 자연>과의 합일을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글. 최동호 Choi, Dongho · KIRA 건축사사무소 마당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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