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별하지 않는 봄 2023.2

2023. 2. 16. 15:47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Spring, no one says goodbye

 

예쁘고 야무진 조카가 3년이나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남자친구가 먼저 ‘사랑하지만 보내줘야 할 것 같아서’ 헤어지자고 했단다. 이별의 아픔에 우는 딸이 답답해 조카의 엄마인 내 동생은 벌컥 화를 냈다. 여린 마음에 상심이 크겠다 싶어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진짜로 사랑하면 보내지 않아. 사랑하지만 보내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
“당장 내일 출근하면 헤어졌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 그리고 다른 사람 만나.”
“….”
“운동 동아리를 해라, 요새 테니스 많이 친다더라. 몸을 움직여서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을 줄여.”
“네….”
조카는 별말이 없는데 내가 괜히 말이 많아졌다.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남자와 여자 가운데 오직 그 한 사람이어야 하는 사랑의 오묘한 이치를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또 죽도록 사랑했다가 차갑게 돌아서게 만드는 사랑의 변덕스러움도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연인들이 이미 끝난 관계임을 느끼고 알면서도 이별이 힘들어 만남을 지속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아서 광고의 소재로도 쓰인 적이 있다.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 창가에 연인인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밤을 꼬박 새운 듯 남자는 한숨을 내쉬다 깜빡 엎드려 눈을 감는다. 그 남자를 보는 여자의 복잡한 표정 아래 자막이 흐른다.)


자막)   CUBE MOVIE
남)      아후-
여)      지금 몇 시지?
          조금만 더 있으면 첫 차 지나가겠다.
          그 버스 타자.
남)      그래.
자막)  택시비가 아까워서
          같이 만든 통장에 잔고가 남아 있어서
          꽃이 만발할 때 헤어지는 건 
          너무 비참하니까
          네가 감기에 걸려 아프니까
          내가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까
          이별이 힘들어 갖은 핑계를 대는 우리
          오늘은 너에게 이별을 말해야
          할 것 같아
Na)    전화번호 뒤 네 자리를 입력하면
          당신만의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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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의 이별 소식에, 첫사랑과 헤어진 후 힘없는 목소리로 “안 먹었는데도 왜 배가 안 고파요?” 하던 큰 아이의 실연이 생각났다. 꼬리를 물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래요? 이제 다시는 여자 안 만날 거예요.” 하던 둘째의 작별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겪었던 별리의 감정이 소환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던 순간들. 무너지지 않으려고 ‘괜찮아, 괜찮아.’ 계속 중얼거리며 걸었던 거리들. 함께 자주 가던 공간에 혼자 가야 할 때 엄습하던 공포감. 회의나 모임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던 기괴한 체험. 1분에 한 번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고, 방송에서 이별 노래가 나오면 귀를 막아버리고, 밥때가 지났는지 알아채지도 못하던. 놀이공원에 홀로 버려진 아이처럼 막막했던 슬픔. 울음 끝이 남은 아이처럼 훌쩍이며 어지럽던 잠. “너 괜찮지 않아, 울어도 돼.” 하는 친구의 한마디에 엉엉 목놓아 울었던, 사랑을 잃어버렸던 나. 그 시간들은 너무나 혹독했어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가끔 가슴을 찌르는 통증으로 살아나곤 했다. 
하지만 이별을 대하는 자세가 모두 슬픈 것만은 아니다. 비 오는 풍경을 보며 우울한 감상에 젖는 대신 김치전을 먼저 생각하는 ‘초긍정 청춘’도 있다. 종가집이 만든 영상광고는 실연 후에도 씩씩한 청춘의 모습을 발랄하게 보여준다.   

(젊은 여자가 툇마루에 앉아 비가 내리는 마당을 쳐다보고 있다. 쏴아아- 빗소리가 소란하고 젖은 기와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댕그랑 소리를 낸다. 치지직 김치전 부치는 모습이 보인 뒤, 여자가 김치전을 맛있게 먹는다.)

여Na) 실연 7일차.
          비가 오면 생각나는 게
          그 사람이 아니라
          김치전이라서 참, 다행인
          초긍정 청준을 위해
          김치는 제대로 맛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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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뀐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이다.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넘긴 2월의 달력에는 어김없이 봄이 들어선다는 입춘(立春)과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입춘에 잡귀를 쫓고 행운을 부르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같은 입춘축(立春祝)을 써서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곤 했다. 2월의 순우리말 표현은 ‘시샘달’이다.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 달이라는 뜻이란다. 영어로 2월을 뜻하는 단어인 페브루어리(Februay)의 어원은 고대 로마의 정화 축제인 페브루아(Februa)라고 한다. 옛 로마에서는 열병의 신인 페브리스(Febris)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매년 2월에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는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아무도 아프지 않고 사람에게 상처받지 않는 1년을 위해 나도 2월 보름에는 목욕재계하고 달에게 기도라도 할까? 평범한 일상이 건강하게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춘축이라도 써 붙여 볼까? 옛사람들의 절기 풍속을 더듬으며 무엇에게라도 평안함을 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겨울을 견디고 만나고 싶은 봄을 상상한다. 메마른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연둣빛 새순이 살포시 고개를 내미는 보드라운 봄. 두꺼운 외투를 옷장 깊숙이 넣어버리고 얇아진 옷의 두께만큼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봄. 성한 이빨 하나 없는 늙으신 우리 엄마 때때옷 새신 신고 나들이하는 봄. 아깝게 세상 떠난 꽃 같은 목숨들이 분홍 진달래로 환하게 피어나는 봄. 사랑을 잃은 청춘들이 실연의 아픔을 슬기롭게 달래고 더 깊고 넓은 사랑을 만나는 봄.   
가능하면 아무도 이별하지 않는…. 순한 봄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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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