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건축여행 ②개화기 가장 빠른 내포(內浦)의 호서은행 2022.6

2023. 2. 20.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②
Regarding Hoseo Bank in inner port areas, the earliest established in the modern flowering stage

 

1. 호서은행(湖西銀行)의 설립

호서은행이 지형상 내포의 주심인 예산(禮山)이란 작은 고을에 1913년 5월 21일 설립되었다는 것은 구포은행(龜浦銀行, 1912년 6월 23일), 대구은행(大邱銀行, 1913년 5월 29일)과 더불어 민자자본(民資資本)에 의하여 가장 일찍이 세워진 지방은행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은행은 귀족이나 관료계 인사와 대상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나, 호서은행은 예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 지역의 지주들로 유진상(兪鎭相), 유진태(俞鎭泰) 형제와 성낙규(成樂奎), 성낙헌(成樂憲) 형제, 그리고 최규석(崔圭錫), 이기승(李基升, 태안) 등으로 순수한 지방 자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2. 은행제도(銀行制度)의 시초와 민족은행 설립

우리나라 은행은 1876년 2월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다른 열강보다 우위를 점한 일본이 1878년 6월에 부산지점을 개설한 것이 시초다. 이어서 제18은행과 제58은행 등이 일본인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산, 원산 등 개항지에 진출했고, 뒤따라서 영국계의 홍콩상하이은행(香港上海銀行)이, 인천 그리고 노국계(露國系, 러시아)의 한로은행(韓露銀行)이 1898년 경성에 각각 개점되었다.

3. 호서은행 설립의 의지(意志)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면서 지방은행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계나 은행계의 실정에서 전형적인 농촌지대이며 내포지역 가운데서도 작은 고을 군 소재지이기는 하나 면 소재지인 예산에서 중소 지주들에 의하여 순수한 지방의 민족자본으로 호서은행이 1913년 5월 21일에 설립된다.
이 호서은행을 창립함에 있어 민족의 경제자립이란 목적을 두었으며, 은행 운영에도 자주적이었다. 이 사실이 바로 내포 지역을 주 무대로 삼고 그 중심거점에 세워진 호서은행의 취지가 다른 지방도시에 설립되었던 민족은행들과 그 뜻을 달리한 점이다. 


지방의 지주층에 속해있던 거주인 유진상·유진태·성낙규·성낙헌·최규석 그리고 태안(泰安) 이기승 등 설립자 6인은 개화된 민족의식이 강한 인사일 뿐더러 상공업에도 참여의식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1927년 ‘下半期巳淸南道文(하반기사청남도문)’ 제25기 영업보고서에 의하면 호서은행 총 주수 40,000주에 주주는 274명인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소유한 주수는 39,293주임에 비해 일본인이 소유한 주수는 불과 707주이고, 한국인 주주는 255명인 데 일본인 주주는 19명에 불과하다.


4. 호서은행 본점의 입지배경과 그 도시적 의미

안톤 마르틴 펠러(Anton Martim Feller, 1892~1973)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料興資平, 1880~1963)에 의해 설계된 호서은행 본점의 건축형식은 당시 대부분 은행건축물이 고전주의복고풍이었던 것에 반해, 20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세제션풍(Secession/Sezession, ‘제체지온’이라 부르기도 함)이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이었다.
호서은행 본점의 입지배경과 은행설립을 통해 나타난 도시적 의미를 세 가지 측면으로 주목하였다. 먼저, 호서은행 설립이 일제에 의한 타율적인 지배의 산물이 아닌 ‘순수토착지주의 자본’으로 설립된 자율적 선택의 산물이었음을 밝혀내고, 두 번째로는 예산지역 호서은행 본점이 입지하게 된 배경을 정량화된 수치를 통해 이해하고, 세 번째로는 예산이 근대적 도시공간으로 변화하는 단계에서 호서은행본점의 입지가 갖는 도시적 의미와 변화과정을 다루고자 한다.


1913년에 이 지역 민간유지들이 설립한 민족 금융기관인 호서은행 예산 본점은 우리의 근대 자본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건물로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설계하여 1922년 준공되었다.
지상 2층의 연와조 건물로 적절한 비례구성과 세부의 간결한 장식, 그리고 1, 2층을 하나로 연결하는 대담한 창문구성 등을 통해 근대적인 조형 감각을 담아내고 있다. 입구 부분을 돌출시키고 지붕형태를 이채롭게 곡선처리하여 정면을 강조하는 등 지붕을 통해 보이는 계획의 의도가 금융기관이라는 기능에 부합하면서, 조형적 아름다움도 함께 표현되고 있다. 아울러, 저잣거리 중심부의 삼거리 모퉁이 대지가 지니는 강렬한 정면성을 건물의 입면구성 및 동선 등을 통해 그대로 내부로 유입시키고 있다.
당대의 금융시설로서 하나의 모델로 지금까지 남아 본래의 기능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 역시 크다. 1987년 충남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예산군 군내면 강대리 22통 5호(당시 중국인 소유주택을 개조) 1913년 5월 21일 설립 본점모습
설립당시 배치도 (실측 2000년대) © 김득수
1922년 호서은행 본점 준공 모습
1922년 신축당시 배치도 © 김득수
1999년 좌측 이면도로에서 바라본 후면 및 주차장
1999년 내부변경 및 부속건물철거 배치도 © 김득수
우측면 계단부
2층 창문 주출입구
2019년 후면 부분 일부철거 모습 © 김득수
배치도 © 김득수
입면도 © 김득수
종합건축사사무소 S.S.P 삼대 외관참조 작업 © 김득수
호서은행 1922년 신축당시계단모습(현존). © 김득수 /  © 김득수 호서은행 1999년 변경된 내부 객장 모습 © 김득수
1913년 5월 21일 창림당시호서은행본점과 서쪽으로 150m 이동 1922년 신축한 호서은행 본점 현재의 모습(충남기념물 제66호)




5. 호서은행의 변화

당시 은행은 귀족이나 관료계 인사와 대상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나, 호서은행은 예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의 지주들로 예산 거주인 유진상, 유진태 형제와 성낙규, 성낙헌 형제, 그리고 최규석, 이기승(태안) 등으로 순수한 지방의 씨족지주들의 자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호서은행의 경제자립의 의지로 1918년 충남상사(주)를 설립하고, 또한 1927년에는 충남제사공장을 자매회사로 설립하여 종합상사와 생산공장을 지은 것은 호서은행의 설립목적인 민족경제의 자주자립 의지를 수행한 실증이라고 하겠다.

동일은행 예산 지점으로 운영되던 1930년대 주변에 점포건물이 있었으며, 포장되지 않은 거리가 다를 뿐 건물의 외형은 지금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외관은 좁은 정면에 높이가 강조된 건물로 주출입구 부분에 장주를 설치하고 돌출된 형태로 만든 후 곡선의 지붕을 설치하였으며, 외벽 면에서는 상부 2개 하부에 2개의 장식띠를 두어 외형은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호서은행을 설계한 안톤 마르틴 펠러와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1920년에 한성은행 대구지점을 설계하여 건축되었으나 해방 후 영남일보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한 건물이다.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호서은행 본점건물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호서은행 본점 건물을 바라보면 중후하고 비례감각이 매우 조화롭다. 이 건물이 번화한 예산 시가지의 삼각코너에 버티고 있는 모습은 당당하고 의젓하다. 

①공장작업실황 ②제조작업실황 ③동사의 정문 ④생사전령검균 작업실황 ⑤생사정리 작업실황 ⑥충남제사공장전경


6. 경이적 발전과 자매회사 설립

충남상업주식회사(忠南商業株式會士).
이 호서은행이 경이롭게 발전되었다는 것은 여신(餘信), 수신(受信)의 액수가 상상외일뿐만 아니라 최규석, 유진태, 정두화의 발기로 곡류 상업농산물 무역과 도매위탁 판매업을 주로 하는 충남상업주식회사 자매회사로 1918년에 설립하여 사장에 최규석을 호선(互選)하였다.
 
충남제사주식회사(忠南 製絲 株式會社). 
강두영 외 15인의 발기로 작년 1926년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성낙규, 성낙헌 형제와 김진섭의 발기로 잠사업(蠶糸業)으로 근대적 제사공장을 갖춘 충남제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성낙규가 사장에 취임했다. 자본금 오십만 원, 제1회 십이만오천 원을 불입하여 칠만여 원으로 공장을 건축하였고, 사만 원으로 유망함은 물론이요, 我(아) 상업계를 위하여 축복하는 바이다.
 
비농촌(鄙農村)에 설립된 은행으로 경성에 설립된 은행과 어깨를 같이 하였던 호서은행의 그 설립과 운영, 그리고 계열회사를 주도해 온 유진상과 유진태 형제, 그리고 성낙규와 성낙헌 형제, 최규석은 모두 예산에 거주했던 지주들이다.
 
광천(1917년 8월 1일, 군산항 수송거점), 안성(1919년 10월 16일), 천안(1919년 1월 10일, 경부선연변 상업권·영업권역 흡수), 홍성(1921년 3월 22일) 등에 지점을 개설함으로써 경부선일대로 영업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예산 본정통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1913년부터 사용한 본점건물을 매각하고 읍내 출입구로 인식되는 삼각형대지에 본점을 신축했다. 1927년 10월 1일에는 천안경남광업의 흑자로 인해 불입자본금이 1백15만 엔으로 증가하자 천안지점을 본점으로 삼고 이전했다. 이어서 청미(1928년 10월 27일 장호원읍으로 개칭[1941년 10월 1일])와 대천(1929년 12월 2일) 등에 지점을 더 개설했다. 
1930년에는 온양온천지점이 개설될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고승제 박사는 “지방도시가 아닌 농촌 고을에 세워진 호서은행의 경영 의지와 실적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은행사에서도 인구가 1만 명이 될까말까 하는 농촌에 세워진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그의 저서 『한국금융사 연구(韓國金融史 硏究)』에서 지적하고 있다. 
또한, 내포지역 거래자를 확보하게 되어 영업권을 홍성, 서산, 당진, 청양, 아산의 내포지역은 물론이고 공주, 홍산, 천안, 안성, 장호원까지 확대되고 작은 농촌 고을에 설립된 지방은행이라는 지리적인 악조건을 물리치고 충실한 운영을 할 수 있었다.


7. 호서은행 설립과 전개

설립이후에 공주, 홍성, 서산, 아산, 온양 등지에 사는 주민 5천여 명의 거래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동안 한국경제의 전무후무한 호경기와도 관련이 있다.
계속해서 충남상사(忠南商事)와 충남제사공장(忠南製絲工場)을 1918년과 1927년에 각각 자매회사로 설립하면서, 그 사이에 1921년 1월 6일 천안에 있던 경남광업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하여 총자본금 2백만 엔, 불입자본금 72만 5천 엔으로 증가하는 등 실적이 매년 향상되었다. 

호서은행 지점과 영업소(내포지역)


8. 호서은행 지점들


1922년 호서은행 본점 건립 당시 4개 지점을 포함한 50명의 행원들도 모두 순수토착한인들이었다. 호서은행의 설립자구성도 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인토착지주로서, 예산에 거주지를 둔 상공업지주인 유진상(兪鎭相)과 유진태(兪鎭泰)형제와 성낙규(成樂奎, 후에 충남제사공장운영)과 성낙헌(成樂憲) 형제와 최규석(崔圭錫), 태안(泰安)의 이기승(李基升), 미곡거상인 김진섭 등이 참여했다.
호서은행이 신장세(伸長勢)를 거듭한 배경과 내포지역의 농업경제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9. 조선후기 호서은행 설립주체의 형성

제이십오기영업보고서(第貳拾五期營業報告書)에 따르면, 총 주수는 40,000주이고 총 주주는 총 274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한국인 주주는 255명이며 주수는 39,293주였다. 반면에 일본인은 19명에 707주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김성권(710주), 성낙헌(1,304주), 성낙규(2,952주), 정두화(2,134주), 백충기(505주), 장석구(2,140주) 등 예산지역의 토작지주들의 주식점유 비율이 높았다. 이것은 서산, 당진, 공주, 연기 지역 등에 거점을 둔 이기승(100주) 김영조(1,000주) 김갑순(50주,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전답을 소유한 지주) 등의 비 예산권 토착의 주식 수를 압도하고 있다.

1909년『한국각부군 시장 상황 조사서(韓國各府郡 市場 商況 調査書)』


내포지역에는 장항선 철도가 부설(1922년 6월)되기 10년 전 농산물의 집산지요, 도매의 신상(臣商)들이 집거하고 있던 상업의 요충지이기도 한 예산(禮山)이 당시 도청소재지였던 공주(公州)보다 경제와 금융면에 성황을 이뤘다. 충남 서부지역 중심지 역할의 배경을 물동 거래의 액면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에 발행된 『한국각부군 시장 상황 조사서(韓國各府郡 市場 商況 調査書)』를 보면, 도청소재지인 공주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일 뿐더러 기본단위가 되는 면(面)의 21면에 그 당시에 인구가 100,578명이나 되는 반면, 예산은 12면에 19,895명에 불과한 협소한 면적에 소수의 인구밖에 안 되는 예산의 연간취인액(年間取引額)이 공주의 260,000원과 비교해 볼 때 310,000원이란 큰 차로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포지역에 경남철도가 1922년 6월에 부설되기 10년 전에 예산은 이미 농산물의 집산지이자 금융경제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1926년 1월에 간행된 『조선인회사 대상점사전[朝鮮人會社 大商店辭典(全)]』에 의하면 대표적인 상인을 위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10. 경이적 번창을 가져왔던 호서은행
      비농촌(鄙農村) 소도읍에 설립된 사회적 배경
 
1987년 예산문화원보 1월호(통권 9집)의 예산향토사연구회 편에 따르면, 호서은행의 초대은행장이자 창립장인 유준상이 경이적 번창을 가져왔던 호서은행이 향토사를 조명해줄 건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호서은행 본점 건물이 헐릴 것이라고 한다. 국치를 전후해서 민족자본에 의해서 설립된 은행으로서 경제계 금융계를 군림(君臨)하고 민족의 저력을 과시해 주었던 사적건물이 헐릴 위기에 처했다. 충청은행이 조흥은행으로부터 인수받아 예산지점이 영업하고 있는 건물로, 노후가 되어 사용 가치성을 잃어서 현대식으로 신축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우리가 일본의 식민정치를 받으면서도 민족의 경제독립이 곧 나라독립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각성한 선인들에 의해서 순민족자본, 그것도 예산지방에 거주하는 인사들만의 자본으로 호서은행이 설립되어 당시로서는 현대식으로 건축된 것이다.
이 호서은행이 비촌(鄙村) 내포의 소도읍인 예산에 본점을 둔 은행으로서 많은 지점까지 지니면서 경이롭게 번창했던 은행본점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 건물이 지니고 있는 우리 민족사적 특히 예산의 향토사적 유적이요 유형문화재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금융 및 은행사의 일부를 밝혀주기도 했다.
이에 1910년(국치, 國恥) 전후해 우리나라가 처해있던 국청과 내포를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의 금융결제 산업적 농업, 농가소득 등을 짚어 봄으로서 이 건물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이 밝혀질 것이다.

설립면허장 휘장·제정일자 미상


11. 호서은행과 독립자금 사건

호서은행에서 1930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대한독립운동자금 거금 5만 8,000원을 빼돌렸던 일연 신현상 선생은 1905년 1월 20일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에서 유학자인 신학균 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한일 조국운동에 몸바칠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 애국선배들을 찾아 다니며 경세와 창의의 길을 찾던 중 당시에 풍마하던 무정부주의 사상에 도취되었다. 
합덕에서 정미업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최석영 동지와 모의를 거듭하던 끝에 은행을 속여서 대금을 빼내기로 계책을 정하고 예산의 호서은행 위조환증을 이용하여 5만 8,000원이란 거액의 돈을 인출해, 의심을 덜 받는 최석영으로 하여금 5만 5,000원을 갖고 뒤쫓아 오도록 하고 본인이 3,000원을 인출한 사건이다.
이 사간은 비록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으나, 국내외의 독립운동 전선에 한때나마 큰 흥분과 파문을 일으켜 사기를 올렸다. 
그 뒤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며 남긴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8월 김신, 이강훈, 서영훈 등과 예산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출생지인 신례원 고가 터에 일연각과 추모비를 세웠고, 1990년 10월 26일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은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봉순 여사와 2남(재우순, 두순) 2녀가 있다.

호서은행 사건과 일연 신현상 선생 연구에서 발췌(예산문화원 이항복[1927年生])




참고문헌
· 한국금융사. 고승재 저
· 조흥은행 70년사. 조선은행 간 
· 충청남도 농업요람(1932년 10월20일 발행). 충청남도 
· 조선인 회사 대상점사전. 간재치중편집 부엄세계사간 (1926년 1월 28일 간)
· 충청남도 발전사 (1932년 3월 25일 호남일보사 간)
·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연구. 김득수 석사학위논문, 2003년 8월
· 김명재, 김득수 호서은행본점의 입지배경과 그 도시적 의미 v.14 n.5(한국도시설계학회지 통권 제59호)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건축사·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 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 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 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 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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