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1. 09:09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③
Concerning Yedeok Sangmusa, a guild of back peddlers
who were active in Yesan and Deoksan and their roles
1.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의 유래
유래 ①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조직되어 전해 내려온 예산, 덕산 지방의 보부상을 관리하던 정부관서이다. 이성계가 황해도 만호(萬戶)로 있을 때 여진족(女眞族)과 싸우다가 유실에 두부(頭部)를 맞아 추병(追兵)에 쫓기고 있을 때, 행상인 백달원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 이로 인한 인연으로 이성계가 즉위(卽位)한 후에 은혜를 갚는 뜻에서 팔도(八道)의 행상인을 구제하기 위하여 전국 각주군에 임방(任房)을 설치하고 침식, 질병 치료, 장례 등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전매 특권을 부여하였다고 한다.
유래 ②
이성계가 함경도의 행상들을 이용하여 신왕조를 건설하였으며, 즉위한 후 무학대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안변(安邊)에 석왕사(釋王寺)를 증축할 때 백달원(白達元)과 동지 80인이 양미(糧米)와 건자재(建資財)를 운반하여 삼척군에 있는 오백라한(五百羅漢)의 불채를 이안한 공로로 지금의 개성군(發佳寺)에 본거지인 임방을 제공하고 이들에게 어염(魚鹽), 목물(木物), 토기(土器), 수철(水鐵) 등 다섯 가지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주었으며, 옥도장을 하사하였다. 백달원은 태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관의 보호를 받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하여 관변단체로 살아남게 된다.
유래 ③
보부상들이 공헌한 사실로는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의 권율장군에게 수천 명의 양식을 조달했다. 1636년 병자호란의 경우,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하였을 때 상인 하나가 붕대를 감아 주었는데, 이를 본 인조(仁祖)는 전쟁 후에 기지와 충의를 가상히 여겨 보부상의 패랭이 좌우에 면화를 장식하여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홍경래의 난(1811년) 농민전쟁 때 관군을 도왔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때는 강화도에 군량을 운반하였고, 남연군의 무덤도굴사건 때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보부상 말살기도로 보부상단이 소멸된다.
2. 보부상의 역할과 주막, 객주의 상호 영향관계
조선후기 변화 요인의 하나인 보부상의 역할과 주막(酒幕), 객주(客主)의 상호 영향관계를 알아본다. 도시에서 자생하는 5일장이 형성되어가고 있는 장시는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펼치는 지방 장시(場市)문화와 보부상의 역할과 장시(場市), 포구(浦口)를 무대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면서 상업 활동을 하던 보부상 조직과 객주, 주막과의 상호 영향관계를 예산지방의 지리적 특성을 통해서 알아보고 조명하고자 한다.
주거형태로 드러난 이 지역의 건축인 주막의 형태를 알아봄으로써, 조선후기의 주막과 객주라는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발판이 되고 조선후기의 건축형태를 밝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접근으로 예산지방의 지역건축을 이해하는 방법이 되며 넓게는 조선후기에 분포되어 있는 각 지방의 주막과 객주를 통해 지역의 특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3. 예산군 시장현황
3-1. 시장현황
3-2. 개설한 덕산 장옥 공간배 1877년 현황
3-3. 1887년 개설한 전통을 자랑하는 덕산 장옥 모습들
4. 상업 네트워크
전업 상인들의 출현과 지방시장의 발달에 맞춰 나타난 것이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지방도시를 거점으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산 보부상들은 직결지였던 목바리 주막거리를 중심으로 예덕상무사라고 하는 보부상 조직이 설립되어 있었다. 이들이 항만도시와 내포지방을 연결하면서 개척된 상업 네트워크는 식민시기 근대적 상업공간을 성립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5. 기존 물류루트의 유지와 발전요인(보부상의 행적)
5일장 봇짐장수들은 휘장을 걸어 놓았던 물건을 거두어 고리짝에 넣어 닷새 만에 장날을 찾아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으며, 45리의 밤길 고개와 개울을 건너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했던 행상(보부상)들은 주막에서 쉬어 가기도 했다.
객주, 여각도 일반 여행자보다는 상인을 대상으로 한 숙박업소라고 볼 때 주막은 서민대중의 숙박업소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시에서는 객주, 시골에서는 주막이 여숙(旅宿)의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주막이라고 하는 곳은 숙박업소라기보다는 음식점의 성격을 띤 곳도 많았다. 주막에서 숙박료라고 하는 것은 음식료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음식을 시키면 별도의 숙박요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6. 부상의 역할과 목바리 주막의 의미
보부상의 행상지는 1리를 보고 5리를 간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인간에도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그 예로 얼마 전에 작고한 예덕상무사 김진용 영감이 젊은 시절 어물장사를 할 때 서산 사(砂)구시에서 덕산장터까지 5킬로미터 고개길 한티고개를 넘어 덕산 목바리에 있는 주막집 뒤뜰 흐르는 물에 어물을 담가두고 잠을 청한 후, 새벽 일찍 일어나서 물 좋은 어물을 지고 새벽길을 떠나야만 덕산장에 당도하여 남보다 한 시세를 더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보부상 간에도 치열한 경쟁관계와 충실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해 볼 수 있다.
목바리 주막을 지나던 보부상들이 소매하는 물품으로는 삼베, 돗자리, 자리, 삿자리 등과 화로, 솥, 보습, 쇠절구, 낫, 호미, 톱, 도끼, 못, 망치 등 생수철로 이중에 많은 부문은 대장간(덕산읍내리)에서 만든 것이 많다. 건어물로는 명태, 미역, 굴비, 오징어, 대구포 등이 있고, 그밖에도 국자, 대나무로 만든 대바구니, 채반, 토시, 용 수, 패랭이, 방갓, 참빗, 얼레빗의 죽세전이 있다. 또한, 나무뿌리로 만든 솔, 체, 키 등솔 제품이 있고, 짚으로 만든 짚신, 새끼, 멍석, 섬(가마니), 삼태기, 멱서리, 도래방석 등의 와계전이 있었다. 더해서 나무로 만든 물통, 거름통, 지게, 밑판, 실판, 절굿대, 홍두깨, 방망이 등 목물전이 있었다.
이곳에는 해미사구시 포구에서 덕산 재래시장 가는 길목에 이들이 집결한 장소인 목바리 주막거리가 있다. 현재 이 주막거리에는 주막, 주점, 떡집 꽈배기집, 놋쇠퉁정집 등이 주위와 어우러져 옛 모습을 보여주듯이 다소 허물어지고 초가지붕이 함석지붕등이 바뀌긴 했지만,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목바리 주막거리의 실체를 조사했다. 현재 보존상태가 좋은 텅 빈 가옥인 주막(1890년대), 군데군데 벽을 이룬 흙벽이 곳곳에서 떨어져 나가 속살을 드러내는 훼손 등 거의 무방비로 방치된 주점, 꽈배기를 만들고 팔던 주저앉은 함석집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며, 개보수한 떡집과 주점은 아직도 남아있다. 놋쇄퉁정을 제작한 집은 철거되어 그 자리에 2층집 식당이 들어서 있다.
6-1. 1호 가옥
일제강점 직후에 건축된 1호 주막은 지금은 채용석씨가 마지막 거주자로서, 65년 동안 주막거리에 살면서 1호집 주막에 세를 얻어 기름집 떡 방앗간을 인수하여 40년 동안 운영하다가 1969년 폐쇄하였다고 한다.
6-2. 2호 가옥
2호 건물은 주점으로 사용된 곳으로 실내 중앙에 조리대가 위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에 사람들이 서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신 것으로 판단된다. 조리대에 대한 스케치와 사진을 참고하면 된다.
6-3. 3, 4호 가옥
3호 가옥은 주거용 건물은 아니기 때문에 방이나 부엌은 없다. 2개의 건물로 분할되어 있으며, 현재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다. 주인 윤규상씨는 덕산에 있는 양조장에서 술을 배급받아 이곳에서 지점 비슷하게 운영하면서 거주하였다. 수덕사 대동리까지 배달을 하였다고 한다. 바로 뒤편의 4호 가옥은 목조건축물로 지어졌으나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벽은 허물어진 상태이다.
6-4. 5호 가옥
현재까지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신순임씨는 13세에 당시 떡집을 운영하던 김태산 씨(1910년생, 72세 사망)에게 시집와 현재까지 떡집을 운영하고 있다.
6-5. 6호 가옥
방앗간으로 사용된 건물로 지금은 폐쇄되어 있으며, 주택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일(一)자형 주거이며, 동서방향으로 3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당면에 퇴가 놓여있다. 부엌이 가운데에 있지 않고, 북쪽 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앗간은 대로변에 정남향으로 놓여 있다. 지붕은 함석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초가지붕이었던 것이 1970년대 이후 개보수되었다고 생각되며, 벽면도 원래는 목조였으나 콘크리트 블록으로 보강된 상태이다.
이 가옥은 접객과 거주자를 위한 문이 대로변에 둘 다 위치하고 있으며, 거주 가옥은 도로면에 접해 있고, 방앗간은 도로변에서 후퇴된 상태에서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정면에 작업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6-6. 7호 가옥
7. 덕산목바리 주막거리 사람들(1920년대)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내포 땅에 가면 덕산목바리 있는 보부상이 쉬었다는 밤나무 울타리의 주막에도 들러 보았다. 이런곳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고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모두 마음뿐이다”는 글귀가 있다.
참고문헌
채용석, 채정숙 목바리 산증인 인터뷰
윤규상 월진회 회장. 예덕상무사두목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내포땅의 사랑과 미움 (하) 창작과 비평사 1993
김득수 일제 강점기 소읍도시 현성과정에 관한연구 연세대 석사 학위논문/ 2003년 8월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건축사·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 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 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 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 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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