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1. 09:11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④
The Youth – Jeolm-eun geudeul
Film 1955 directed by Shin Sang-ok (1926~2006)/ screen play by Lee Hyung Pyo (1922~2010)/
a 1930~31 Novel “the Young Ones” by Kim Dong-in (1900~1951)/ running time: 89 minutes
신상옥의 초기작에 속하는 영화 <젊은 그들(the Youth, 1955년/90분/흑백)>은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 10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김동인(1900~1951)의 동명 장편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제목에서 상상되는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조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정치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 1820~1898), 민겸호(閔謙鎬, 1838~1882) 등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가공인물이어서 저자 스스로 역사소설이 아닌 통속소설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분류를 하자면 지나간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時代劇, period drama)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적인 배경은 19세기 말 조선의 약 1년간이다. 1881년경 시작해서,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군란 이후 대원군의 재집권과 청국(淸國)으로 납치되어 간 직후 정도다. 상당수의 영화 서술에 구한말, 대한제국 말 등으로 구분하는데 소설의 원작은 그보다는 조금 전이고 영화에서는 그보다 좀 뒤로 설정이 되어 있다. 공간적인 배경은 조선의 궁궐, 당시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대원군의 복귀를 도모하는 활민숙, 민겸호의 처소 등이다.
영화가 시작되며 “풍운의 이조 말엽 광무(光武) 19년,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국은 극도로 어지러워갈 무렵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민겸호(閔謙鎬) 등에게 살해당한 중신(重臣)의 자손들로서 대원군과 내통이 있는 이활민이란 선비의 지도 아래 암약(暗躍)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인 곳은 활민숙(活民塾)이란 서재(書齋)였다”라고 서술하면서 ‘젊은 그들’의 의미를 암시한다.<사진 1>
활민숙에서 남장을 하고 지내는 이인화(본명 이인숙/최은희 분)는 민겸호의 집에 복돌이라는 가명의 상노로 잠입하였다가 민겸호(최남현 분) 집에 객으로 머물던 양주 최 진사의 눈에 띄게 된다. 위험하다는 민겸호의 조언으로 이인화는 활민숙으로 되돌아간다.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고, 대원군을 배척하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나라는 어지럽게 된다. 대원군(강계식 분)의 막역한 지기인 이활민(장일 분)이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민겸호에 의해 살해된 중신의 자제들)을 모아 활민숙을 개설하여 학문과 무예를 닦게 한다. 사찰인 안재영(본명 명진섭, 명 참판 아들·활민숙의 리더/최무룡 분)은 남장한 이인화가 그의 부모가 정해준 자기의 정혼녀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멸문의 복수를 위하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인화는 자신의 정혼자가 명 참판의 아들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안재영이 가문이 정한 정혼자라는 것을 모르고 사형 사제로 가까이 지낸다. 그러다 대원군을 시해하러 잠입했다가 붙잡힌 자객의 이름이 명인호(곽건 분)라는 것을 듣고 자기와 정혼한 사이로 오인하고 그를 풀어준다. 일월산인(日月山人)<사진 1>으로 활동하는, 활민숙의 리더 안재영이 도망가는 명인호를 따라가 죽였다고 활민 선생님께 고하는 말을 뒤에서 듣고 놀란다. 정혼자로 오인한 명인호가 죽은 줄 알고 소복에 해당하는 베를 옷 속에 입고 스스로 상을 치르며 안재영을 원수로 생각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사형사제 관계라 그런지 별로 밉지가 않다. 대원군과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던 명인호는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안재영과 의형제를 맺고, 안재영은 민겸호의 계획을 파헤치던 중 저격을 당했으나 우연히 구해져 생명을 부지한다. 활민숙은 초토화되고 안재영은 끝까지 민겸호를 쫓는다. 마침내 이인숙은 안재영이 정혼자 명진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민겸호는 도망치면서 결국 못 속으로 빠져 죽게 되고 민겸호의 총에 맞은 안재영은 마지막에 이인화(이인숙)와 만나지만 그가 죽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작부분에 설명된 ‘이조 말 광무 19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연도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건양(建陽) 2년이자 광무 1년은 1897년이고, 고종 광무 11년이자 순종 융희 1년이 1907년이며, 1910년 순종 융희 4년으로 대한제국은 14년간의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앞에 언급했듯이 1881년부터로 아직 대한제국 연호를 사용하기 전이다. 주요 역사적 흔적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1896년) 및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 1897~1910) 등이 있다. 아마도 광무 19년은 고종 19년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특히 현장촬영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1950~1960년대 한국 영화는 스튜디오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거의 현장에서 촬영한 영화이므로 지금으로부터 60~70년 전의 궁궐이나 도시를 그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이나 120년 전이라면 상당히 오래 전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60년 전과 또 그보다도 60년 전이란 시간은 한 사람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그 기억들만 바르게 떠 올려도 오늘날 도시나 건물의 수리 복원의 쟁점인 원형에 대해, 아니면 좀 더 가까운 과거의 모습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영화 <젊은 그들>의 대부분은 1997년 이래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 창덕궁과 그 후원의 이곳저곳, 후원의 연경당, 궁궐 전각 부분의 왕과 왕비의 침전, 그리고 경복궁 향원정 및 경회루에서 촬영되었다. 창덕궁 연경당은 극중 활민숙으로, 때로는 민겸호의 처소로 스케치된다. 특히 연경당에서 촬영된 부분을 보다 보면 지금에 와서 달라진 것들도 눈에 띄고, 때로는 그대로는 있지만 무심코 보던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영화에는 그대로 있지만 없어진 것들 중 하나는 연경당 일원의 굴뚝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도 꽤 최근까지 굴뚝 두 기(基)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서 창덕궁에 문의했더니 동궐도에 없어서 없앴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없앤 지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도저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의 결정인데 마구 반발할 수만도 없다. 동궐도는 제작연도를 1830년대 초로 보고 있다. 동궐도 및 동궐도형에 연경당은 묘사되어 있지만 낙선재 일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은 연경당의 건립시기인 1827~1828년부터 낙선재 일원 조성시기인 1847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건립시기도 『궁궐지』에는 1828년(순조 28년)이라 되어 있으나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1827년(순조 27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궐도에 묘사된 연경당은 지금의 연경당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므로 이 또한 1860년대 후반인 고종 연간에 재축을 하면서 지금처럼 안채, 사랑채, 반빗간 및 서재와 정자로 구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영화에서는 지금은 굳게 닫힌 반빗간(飯備間) 문이 열려 있다. 당시는 드나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행각 또는 별채라고 하는 반빗간은 안채 뒤에 담으로 구획된 부분으로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를 하던 부엌과 광을 말한다. 영화에서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을 좋은 각도로 보여주면서 극 중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드나든다. 특히 이 장락문 편액을 건 소슬대문 부분은 안과 밖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경당이 있는 곳은 궁궐의 후원으로 일반인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곳이다. 즉 궁궐에서 연경당으로 간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로 가는 일종의 암묵적인 공간이동의 처리가 필요한 곳이다. 즉, 궁궐의 원유공간인 후원은 왕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에 진입하는 데는 다양한 과정이 필요하다. 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다양한 공간을 거쳐서 나름 성스러운 공간인 궁궐 후원으로 진입한다. 그 후원에서 반대로 사대부집을 표방한 곳으로 들어가야/나가야 한다. 즉, 집을 에워싸면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일종의 명당수)을 건넘으로써 궁궐의 후원이라는 귀한 공간에서 다시 민(民)의 공간으로 들어간다/나간다. 좁은 실개천을 넓은 돌다리(사실은 몇 쪽을 연결했다)로 건너 소슬대문을 지나고 행랑마당을 지나고 장양문/수인문을 지나서 마당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드나듦의 끊임없는 교차 반복은 안이 밖이 되고, 밖이 다시 안이 되는 그런 공간구성을 조성한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네 귀퉁이는 네 마리의 두꺼비가 사방을 지키는 사각형 돌 수반이 월궁을 상징하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세 마리는 밖을 향하고 한 마리는 안쪽을 향하는 것을 정과 동의 균형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사진 2, 3>
창덕궁 연경당은 지난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창덕궁 낙선재 일원은 석복헌 수강재는 제외하고 낙선재만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와는 달리 창덕궁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 모두 하나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연경당에 관한 글 중 다음의 글이 보충설명이 될 것이다. “건축사 조인숙, 조선 사대부 공간 ‘연경당’ 엿보다”. - 2015년 1월 (http://kor.theasian.asia/archives/130839)
영화 속에서 연경당이 활민숙으로 촬영된 경우와 민겸호 집으로 촬영된 경우를 볼 수 있다.<사진 4> 사람을 심하게 고문하고 죽이려 데리고 나갈 때 여성가마에 구겨 넣는 모습의 마당 스케치, 일각문으로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 마당으로 들어온 장면 및 이인화가 남장을 하고 민겸호 집으로 늠름하게 들어가는 장면이다. 장락문 안에 들어서서 소위 사대부집의 남성 공간으로 진입하는 장양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장애인 램프를 놓아서 문의 위용이 간 곳 없다. <사진 5>
대원군·이활민·명진섭의 만남, 명진섭·기생 연연·명인호의 만남, 이활민· 최진사의 만남으로 묘사된 실내 공간 스케치로는 병풍을 배경으로 하거나, 다락의 장지문을 배경으로 하거나 발을 드리워 내·외부 공간의 소통, 또는 한지를 바른 창호나 가구 등을 표현한 것도 볼 수 있다.<사진 6> 특히 창호지를 바른 문의 마감의 경우 요즈음 도배 기법과는 달리 문의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 보이는 것도 그대로 남아있다.<사진 7> 요즈음 와서는 창호지를 바를 때 지저분해 보이니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문틀에 여백을 주고 반듯하게 잘라버리는데, 적어도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해마다 창호지를 바르면 끝이 너덜너덜하도록 했던 것이 기억난다. 건축을 전공으로 하고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기에는 다소 지저분해 보이지만 기능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일종의 웨더스트리핑(weather stripping) 역할을 하도록 끝을 외기부분으로 더 나가게 남겨놓아 겨울이면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쌍창의 경우 두 짝의 문짝이 만나는 부분을 직절해서 반듯하게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엇비슷이 잘라서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바람도 덜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래서 두 짝을 한번에 닫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닫아야 반듯하게 닫아진다.
민겸호가 활민숙을 치라는 명령을 하던 비밀회의는 지금의 경복궁 향원정과 향원지(香遠池) 못에서 스케치했다. 명진섭(안재영)은 취향교 밑을 헤엄쳐 향원정에 다다라서 그들의 음모를 듣는다. 결국 침입이 발각 나 혼신을 다해 도망하나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날이 밝으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사진 8>
경복궁의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엔 최근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육모정자인 향원정은 초석이 침하되어 2017년 이래 4년여 간의 대대적인 해체수리 복원을 하고 모습을 정비했다. 이와 아울러 전쟁 후 연못의 남쪽으로 복원되었던 돌로 된 다릿발에 목재 난간을 갖춘 평교인 목교 취향교를 없애고 북쪽인 건청궁과의 사이에 아치형 나무다리를 세운 것이다. 향원정에 사용된 목재연륜연대 측정 등으로 1885년 건립추정의 근거도 확보하는 등 상당한 역사고증을 통해 이루어진 것엔 찬사를 보내나 항상 의문으로 남는 것은 ‘원형 보존’이다. 전쟁 후 남쪽으로 복원된 목교로 고증되었던 내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간 곳이 없다. 이제는 그 목교는 영화로 남은 다리가 되어버렸다. <사진 9, 10>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현재 창덕궁 희정당(왕의 침전 영역) 앞을 민중이 빠른 움직임으로 스케치 했고, 민겸호가 이를 피해 도망가는 구성은 민중에 밀려서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으로 들어가 연결 복도를 통해 희정당내부 쪽으로 도망을 하는 것으로 스케치했다.<사진 11> 마지막 부분은 시간 공간을 넘어 경복궁 경회루로 도망을 하는 민겸호와 명진섭의 육혈포 대결로 경회루 아래층에서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며 결국 가문끼리 정혼했던 두 남녀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난다.<사진 12>
민겸호가 도망을 하던 대조전에서 희정당까지의 복도는 최근 개방 전까지 이 영화를 통해서 내부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금 건물은 1917년 불에 타서 1922년 경복궁의 강녕전 및 교태전을 해제해서 이건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왕의 침전이지만 집무기능을 함께 했던 건물로 1985년 둘 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으로 스케치된 경복궁 경회루 부분을 자세히 보면 당시는 연못 전체가 연(蓮)으로 덮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회루는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앞의 향원정이 19세기말 고종과 명성왕후의 원유공간이라면, 경회루 및 경회루 못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 서쪽에 15세기 초 조성된 국가공식 원유공간으로 1985년 국보로 지정된 건물로 수리복원을 수차례 거듭했다.<사진 13>
영화 속에 실수로 삽입된 슬레이트보드(혹은 클래퍼보드, slateboard/clapperboard) 일명 딱따기를 볼 수 있다. 이는 영화나 텔레비전 방송 촬영에 사용하는 도구로 사운드 마커(sound marker)라고도 한다. 프로덕션 넘버, 영화감독, 촬영 감독, 날짜, 테이크 넘버 등 정보를 촬영할 때마다 기록한다. 클랩스틱이 서로 마주치며 소리가 난다.
다음 호는 자끄 따띠(Jacques Tati 1907~1982)의 <나의 아저씨(Mon Oncle 1958)>를 ‘영화로 보는 한 도시 속 두 도시 이야기’라는 주제로 다룬다.
<나의 아저씨>는 1958년 프랑스 코미디 영화 제작자 자끄 따띠가 만든 첫 번째 컬러 영화이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영화는 현대성과 미국식 소비주의에 대한 전후 프랑스의 여과 없는 집착에 대한 윌로씨(M. Hulot, 자끄 따띠 분)의 희극적이고 기발하며 순수한 투쟁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같은 해 바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오스카), 칸 특별상, 권위 있는 뉴욕 영화 비평가상을 수상 하면서 빠른 속도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 영화는 이 연재물의 다른 내용들 과는 달리 소설을 바탕으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건축적 배경과 서로 다른 공 존하는 도시풍경을 중점으로 다룬다.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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