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환경을 만들고 미래를 창조하다 ④ 재미와 흥미의 공간에서 시작되는 우연이 만들어낸 ‘창의성’ 2023.8

2023. 8. 18. 14:2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reating architecture, environment, and the future ④ ‘Creativity’, which was created by coincidence that starts from a space of fun and interest

 

 

 

재미와 흥미라는 요소는 기능적이지도 않고, 일차원적 관점에서 생산적이지도 않다. 특히 과거의 고루한 사람들에겐 무시할 내용이지 주목할 요소가 아니었다.
21세기는 어떤 사회인가? 일차적 기능과 공급, 생산이 어느 정도 해결된 사회다.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잉여시간이 늘어나고, 새로운 관점의 창조적 생산이 요구된 사회다. 초고도 생산성 사회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흔들었다. 사회가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자극하고 변화를 야기할 환경이 전근대적이라면?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니즈가 끝없이 발생하고 이에 대응하는 아이디어가 찰나의 순간마다 교체되고 있는 시대다. 사람들의 가시권에 조금씩 들어오던 이런 변화가 지난 몇 년간 지속된 팬데믹으로 극대화되었다. 

 

<사진 1> 단지 창고였던 곳에서, 성수동을 트렌디한 지역으로 탈바꿈하는데 일조한 성수동 대림창고


새삼 눈에 들어온 우리나라 신도시들의 구성과 건축은 자극도 재미도 없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 구조다. 지난 십수 년간 서울의 삼청동, 북촌, 익선동, 가로수길 등이 화제로 떠올랐지만, 일상의 재미를 느낄만한 도시공간 구조가 없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이런 공간들은 신도시가 아니다. 기존 도시들의 구성 역시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나마 신도시보다 나은 점은 계획되지 않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담긴 공간들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오래된 도시에서 골목길 사이에 들어서는 재미난 건축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국민소득 3만 불이 넘어서서 그런지 몰라도, 창의적 발상과 매력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작은 건축들이 골목길 사이를 채우기 시작했다. 정통 건축사들이 디자인한 건축이 아닐지라도,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동네의 건축과 외부 공간들은 흥미진진하고 다양한 것들을 만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오버하면서 만들어낸 거리의 사인이나 카페 같은 상업공간들의 쇼윈도는 엄청난 볼거리다. 
건축은 이런 상황에서 상당한 중간숙주 역할을 한다. 특히 창의적 생산, 창발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건축 환경적 측면에서 더더욱 그렇다. 학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의계급의 도시 환경은 구도심의 수공예화된 낡은 건축에서 만들어진다”고 언급했다. 건축적 디테일이 섬세하게 세공화된 장인의 성과물들이 가득한 건축이 창의력을 자극하고 도전감을 이끌어 낸다고 추론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전적 장인의 공예적 건축 요소만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저 오래되고 낡은 폐공장이나 폐시설물에서도 자극을 받고 창의적 발상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사진 1> 미완성이 제공하는 도전 욕구? 우연이 만들어낸 예상하지 못한 시각적 현상에 대한 자극? 명확히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창의적 발상을 하게 되는지는 아직 선명한 이론이나 논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런 사례들이다. 1960년대 영국 런던 ‘소호(SOHO)’가 보여주었고, 1970년대 캐나다 밴쿠버의 ‘그랜드빌(Grand Vill)’이 증명하고 있다. 

 

<사진 2> 기존 공장을 화장품 브랜드에서 플래그십 스토어로 개조한 아모레퍼시픽 성수
<사진 3> 공장의 과거와 패션의 과감한 미래 이미지를 혼합한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수도 없는 이런 도시와 건축환경이 등장하고 있다. 뉴욕의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상하이의 창의산업단지들, 당장 우리나라 서울의 성수동이 그런 환경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곳에 채워진 낡은, 최소의 건축으로 만들어진 공간들에 창의적이며 첨단을 걷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성과를 키우고 있다.<사진 2, 3> 이런 사례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흥미와 재미’인데, 이를 자극하는 대상들은 예측하지 않았던 건축들이며, 잘 짜인 도시에서 오랜 시간 속에 탄생한 틈의 건축, 우연의 건축들이다. 엘리트 건축사(가)나 도시계획가, 정치가와 행정가들이 놓쳐버린 것들이다. 
도시와 건축에서 체험하는 흥미와 재미는 ‘의외의 발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의외의 발견은 ‘공간에 대한 인간적 경험 – 보행’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꽉 막힌 모범도시의 지루한 틈 건축으로 벌리기


도시는 변한다. 사회현상에 반응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변화한다. 이런 변화에 미처 대처하지 못해서 기능이나 효율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기존 도시에 안성맞춤으로 지어진 건축도 덩달아 뒤처지게 되고, 한때 잘나가던 위치는 손써볼 수 없는 슬럼화의 현장이 되어 버린다. 도시에서 건축은 이런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하면서 나타난다. 현장에선 이런 변화를 즉시 체감하지만, 변화의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지속될 변화인지도 모른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내서 반응한다. 반응하는 과정에서 일부 해법이나 대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예측보다 현상을 분석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은 사례를 통해서 대안을 만들고, 제도화를 시도한다.

더구나 아무리 잘 계획하고 진행해도 문제가 생긴다. 도시의 변화는 단지 물리적인 것에 의하지 않는다. 변수는 너무나 많다. 시장의 변화, 사회현상의 변화, 인구의 변화 등…. 변화에 대응하는 제도로 연결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사람들은 이 시간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온갖 아이디어를 내어 선제적으로 만들어버린다. 불법 건축도 사회적 변화에 먼저 반응하며 나타나는 결과이다. 산업 혁명 이후 나타난 현상으로 알고 있지만,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불법 건축(?)이다. 변화는 빠르고, 제도는 느리다 보니 이 틈을 이용한 사람들의 시도들이 불법 건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대 로마나 중국의 계획도시들 성곽 주변으로는 보호받지 못한, 허락받지 못한 계급들의 마을이 난립해 있었다. 중세로 넘어와 유럽의 계획도시들 사이로 스며든 주택들은 기존의 틀을 흔들어 버렸다. 마치 계획된 정원을 방치할 때 벌어지는, 계획하지 않은 식물들의 침투와 같다. 근대 이후 오늘날의 도시와 건축도 마찬가지다. 당장 우리나라의 달동네라 칭하는 곳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계획되지 않은 정원의 야생식물들처럼, 계획되지 않은 도시의 건축은 뽑아버려야 할 것들이고 정리해야 할 대상이었다. 비단 대한민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철저한 계획도시 브라질리아의 계획되지 않은 이주민 마을들도 그 예다. 철저한 기하학적 계획도시와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으로 형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도시들에 이런 불법 건축은 존재하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도시 경관은 의외성으로 흥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만 하더라도 5만 채의 불법 건축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유럽도 마찬가지고, 아시아는 더 심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건축으로 형성된 도시의 일부가 21세기에 와서 관광의 대상이 되고, 창의산업의 바탕이 되고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역시 계획되지 않는 의외의 효과도 있다.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고지대 거주자들의 편의성을 위해서 만든 도시 시설이었다. 그런 시설은 이동을 손쉽게 해주고, 관광 도시인 홍콩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겐 흥미로운 도시의 오락거리로 느껴졌다. 마치 어릴 적 지하철 두 정거장을 재미 삼아 왔다 갔다 했던 것과 같다. 덕분에 주거지였던 동네는 외부 방문객들이 늘면서 상업화되고, 사무실 같은 공간들이 자리하게 되었다.<사진 4>

 

<사진 4> 식민지 시대 도시공간을 새로운 어트랙션 가로로 재구성한 싱가포르 클라키 지역

 


개인적 경험과 도시의 삶,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흥미로운 점은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돌아갈 곳으로 한적한 시골을 말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자세히 보니 성장환경에 따라 달랐다. 
나는 도시가 좋다. 나는 도대체 왜 도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었을까? 비단 서울의 특정 지역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도시를 좋아한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릴 적 서울 시내의 여러 곳, 특히 골목길을 경험했기 때문인 듯하다. 걸어 다니면서 경험과 기억이 쌓인 셈이다. 골목길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의외의 공간을 만난 무의식의 경험들, 특히 걷는 행위를 통해 상당한 기력을 소모하면서 시간을 경험한 기억들. 그 과정에서 오감이 총동원된다.

기억은 다양한 공간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서울 시내에서 자란 덕분에 1974년부터 지하철을 타봤다. 당시에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은 탑승료가 무료였고, 막 일본 차관으로 지어진 지하철은 역과 역 사이가 정말 짧았다. 학교가 있던 종로5가에서 동대문까지 한 정거장을 수시로 타고 내렸다. 일종의 놀이동산인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학교 자체도 백 년 가까이 된(실제는 1970~80년 정도에 지어진 게 아니었을까?) 목조 건물이었고, 주변엔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된 주택들로 가득했다. 산꼭대기 판잣집부터, 벽난로가 있고 국산 대리석이 깔린 저택도 있었고, 수영장도 있던 친구 집도 있었다. 창경궁에서 원남동, 그리고 동숭동 일대는 일본식 동네와 주택들이 즐비했다. 길가에서 바로 미서기 문을 열면 신발을 벗는 현관이 있는 전형적 일본 근대 주택들이 가득했다. 한편으로는 AID차관으로 지어져서 옆집과 벽이 붙어 있고, 마당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타운하우스도 있었다. 이 작은 영역에서 경험한 주택 건축들은 정말 다양했다. 종로구 중에서도 원남동부터 이화동 일대는 그야말로 온갖 모양의 주택 건축 형식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지금도 이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 건축 형식이 있는 동네를 본 적이 없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몰래 친구 집을 이용해 담을 넘어갈 수 있었고, 가끔 만화 영화를 상영하던 피카디리와 단성사를 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공간들이 초등학생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에 있었다. 학교 옆 운동장 보다 작은 곳은 우리나라 최대의 중고차 매매시장이어서, 방과 후에 친구들과 자동차를 구경하러 다녔다. 그야말로 초등생의 도보 이동 거리로도 충분히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도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기억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반경 안에 있을 것이 다 있는 셈이었다. 동대문 앞에 있던 시장에는 우마차가 다녔고, 창경궁에서 운현궁 사이에는 말 탄 경찰의 순찰을 볼 수 있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무성한 서울대 문리대 앞 개천은 어린 내 팔에도 닿을 정도였다. 철망 너머 항상 전차와 군인이 상주했던 서울대 문리대를 구경하면서, 대학에는 학생들을 지켜주느라 군인이 상주하는 줄 오해도 하고는 했었다.

초등생의 도시 경험은 성장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로로 명명된 새로운 도시 공간에는 당시 유명 건축사들의 작품 주택이 즐비했고, 문신규, 김수근, 김석철, 조건영 등의 멋진 건물들이 가득했다. 당시를 풍미했던 여러 건축 대가들의 주택들은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문예회관이나 미술관 등은 등하교 시간에 한번 들릴 수 있는 문화 향유 공간이었다. 이동하는 동선 내내 다양한 공간의 콘텐츠들이 즐비했다. 대부분의 도시가 이렇지는 못하지만, 보행의 즐거움을 갈구하는 DNA가 내 가슴 깊이 새겨진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20대 중반 이후 신 개발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그때까지 거주하던 시내에서의 경험과 전혀 다른 도시 공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성장 이후 도시 공간의 범위는 넓어져서 외곽의 아파트 단지로 이주했고, 출퇴근 시간은 왕복 3시간이 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아파트 단지는 각종 생활 인프라가 부족했다. 때문에 한번 집 밖을 나오면 여간해서 모든 볼일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셈이라 퇴근 이후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하거나 해야 했다. 그러니 계획을 짜야 했고, 이왕 나온 시내에서 밤늦게까지 머물러야 했다. 비단 이런 공간 체류 스타일의 생활은 미혼자에게만 해당하지 않았다. 기혼자들 역시 야근 또는 회식을 핑계로, 만남을 핑계로 집밖에서의 시간을 늘려나갔다. 그렇게 집 밖의 시간이 절대적이었던 셈이다. 시내에서 걸어도 30분 정도면 이용할 수 있는 생활 기능들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공간 이동에 소비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친구라도 만나려고 하면 다시 한 시간 정도 이동해서 모두의 합의에 의한 공통 장소에서 만나고, 다시 한 시간 이상을 더 이동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날은 자그마치 5~6시간을 이동에 소비한 셈이다. 대중교통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적어도 6~7시간이 이동시간인 셈이다. 

 

<사진 5> 다양한 도시구조를 매장 인테리어의 경험 공간으로 재디자인한 밀라노의 스타벅스 매장
<사진 6> 공공 가로에 노출된 상업공간은 공공성을 실천하면서도 상업적 기능을 구성했다.


산업화된 도시에서 온라인 경제로 바뀌고, 4차산업 혁명의 재택근무가 활성화 돼도 이러한 도시생활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각종 조직에서 업무를 하는 현대인들의 도시에서의 삶은 세계 각국이 비슷하다. 크게 개인 시간과 사회생활의 시간으로 구성되는데, 이 둘 사이의 간극이 공간에 따라 벌어지고 축소된다. 시간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다. 시간을 어떻게 공간에서 활용할 수 있느냐는 도시 공간, 그리고 도시의 구성요소인 건축이 어떤 콘텐츠와 구성이냐에 따라 만족도와 관계되는 것이다.<사진 5, 6>

개인적 경험을 통해 도시와 건축을 바라보면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또 필요함을 느낀다. 때문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존재가 모두 필요하고, 활용되며 이용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극들이 개인에서 전체로 확대 재생산되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낸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건축사사무소 NCS lab

 

 

홍성용  건축사·건축사사무소 NCS lab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영화속 건축이야기(1999)』, 건축사가 쓴 최초의 경영서적 『스페이스마케팅(2007)』, 『하트마크(2016)』 등의 저서가 있다. 1998년 부터 다수의 건축 및 인테리어 설계작업 활동 중이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