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④ 독립운동가이자 선구자적 도시개발자, 정세권이 지켜낸 공간 2023.9

2023. 9. 14. 16:33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④ _ An independence fighter and a pioneering urban developer, A space preserved by Se-Kwon Jung

 

 

 

익선 한옥 현황 © 서울연구원_한옥멸실연구(2006)

 

종로 한복판에서 기묘한 풍경이 연출 중이다. 짧은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두 공간이 외따로 떨어져 공존하고 있다. 완충지대는 물론 점이지대도 없다. 마치 다가와 있는 것과 다가오고 있는 것의 차이처럼, 두 곳은 전혀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 서로 알 필요 없다는 듯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무척 생경한 공존 방식이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을 중심으로, 불과 2∼300미터 거리를 두고 연출되는 풍경이다. 탑골공원 주변이 노년 전유 공간이라면, 익선동은 청년 전유 공간이다. 지하철역 4번 출구를 나와 길 건너 골목 하나를 꺾어 돌면, 바깥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형형색색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으며 빠르게 질주하는 젊음의 공간이다. 구십 살 나이의 그만그만한 크기의 한옥이 죄다 개성 넘치는 얼굴로 성형하고, 이색적인 공간을 연출해 내고 있다. 일명 ‘익선동 골목’이다. 한여름 뙤약볕이 무색하리만치 활기 넘치는 연분홍 청춘으로, 사시사철 채색되고 있는 공간 조직이다.
이곳은 도시 활동에서도 주변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좁다란 골목은 활력으로 넘쳐나고, 무더운 한낮에도 점포들은 문전성시다. 오래된 기와지붕을 이고 선 집들은 세련된 얼굴에 한껏 웃음을 머금었고,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은 늦은 밤까지 왁자지껄 불을 밝힌다.

 

익선 항공 사진 © 서울연구원_한옥멸실연구(2006)


골목의 변화는 소소한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선의로 시작된 시도가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공간 기능의 급격한 천이(遷移)를 불러온, 최근 6∼7년 사이 생겨난 변화다. 낡고 오래된 한옥에서 재현된, 실험적인 물리적 재생이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생물과 같이 도시도 살아있다는 ‘유기체적’ 가설을 마치 현실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넘치는 활기에도 불구하고, 이곳 역시 무자비한 젠트리피케이션의 공격에 노출되어 이면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이에 여럿이 상처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낼 수는 없었다.

 


정세권의 실험

 

익선동 골목 © 이영천


일본을 통해 유입되어 1920년대 초 유행한 ‘문화주택’이 1929년 조선박람회를 거치면서 친일파와 지주 계급에까지 확산한다. 서구화한 기능적 평면구성에 화장실과 부엌 등 위생시설을 개량한 주택이다. 일제는 이를 ‘근대화 척도’로 호도하면서, 한옥을 비위생적이고 저열한 주거공간으로 비하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드러낸다. 이와 함께 일제는 부동산 신탁회사를 통해 한양을 중심으로 막대한 투기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투기자본이 조선인 거주지인 북촌이라고 가만둘 이유는 없었다. 세도가와 왕족, 친일파 및 옛 고관대작들 차지이던 너른 주택지가 이들 신탁자본의 표적이 된 것이다.
3.1운동 이후 설립되어 주택청부업을 하는 ‘건양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부동산 매입과 설계, 시공 및 분양, 금융알선 일체를 수행했다. 건양사 대표는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에도 깊이 관여한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정세권’이다. 건양사는 1940년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데 이는 앞 두 단체를 지원한 재정적 압박은 물론, 이로 인한 일제의 탄압이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정세권은 일제의 부동산 신탁으로부터 어떻게든 북촌을 지켜내고 싶었다. 한옥의 특성을 지켜내면서, 문화주택처럼 부엌과 화장실 등 위생시설 개선을 추구한다. 아울러 돈 없는 서민들도 쉬이 집을 구매할 수 있도록 소규모 한옥 보급을 동시 추구한다. 약 33제곱미터에서 165제곱미터, 즉 10∼50평형에 이르는 규모별 기본 모듈을 구성한다. 부지 면적에 맞춰 ‘기역(ㄱ)자와 디귿(ㄷ)자, 트인 미음(ㅁ)자’가 주를 이룬다. 모듈에 맞춰 표준화된 석재와 목재의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고, 구획된 장방형 획지에 지형에 따라 모듈을 응용해 시공한다. 이렇게 탄생한 집이 소위 ‘도시형 한옥’이다. 
할부 등 구매자 예산과 수입 수준에 맞게 상환 방식을 능동적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금융도 알선하는데, 건양사 신용으로 은행 대출을 도운 것이다. 오늘날 북촌 한옥마을 대부분이 정세권의 손을 거쳤다.
정세권의 생각을 실현할 부지가 매물로 나온다.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 일원 약 9,091제곱미터(2,750평), 철종이 형에게 지어준 ‘누동궁(樓洞宮)’ 자리다. 1930년 이 땅을 정세권이 사들인다. 이곳에 최초 도시형 한옥의 실험이 이뤄진다. 폭 2.5∼3미터 골목으로 획지를 분할하고, 인프라를 깔아 도시형 한옥단지를 시공한 것이다. 익선동 골목은 10∼30평형대 한옥 구성을 보인다. 당시 입주자 구성에서도 다양성을 추구한 세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분화하는 공간 조직
당시 지식인과 중산층이 초기 익선동의 주된 입주 구성원이었으리란 추정이 가능하다. 원리금 상환능력이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익선동 골목은 주거 기능은 물론 국악 관련 단체와 국악기 판매점, 한복집과 점집이 혼용된 공간으로 변모한다.
1930년대 중반부터 종로3가 일원이 급격한 변화에 맞닥뜨린다. 큰 음식점과 유곽, 홍등가는 물론 대규모 사창가가 골목을 차지했고, 이런 경향성이 196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돈의동 ‘명월관’과 인사동 ‘태화관’이 이러한 공간 변화의 시초이자 영향력을 발휘한 주역이다. 두 곳은 당시 일패(一牌) 기생의 일터였다. 이들이 일제 강점기 후반 익선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는다. 명창 ‘박녹주’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예의범절에 밝고, 대개 가정을 꾸렸으며, 노리개로 몸을 내맡기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우리 전통 가무 보존자이자 전승자로서 일패 기생은 뛰어난 예술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해방 후 이를 계승하려는 국악인과 소리꾼들이 익선동 주변으로 모여드는 경향성을 보였다. 익선동에 국악기 판매점이 자리하게 된 주요한 이유이다.
한국전쟁 후 밤 문화를 지배하는 요정이 익선동 주변에 번성한다. ‘오진암’이 대표적이다. 약 2,315제곱미터(700평) 규모 단층 한옥이던 이 집이 1972년 남북교류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박성철 제2 부수상이 이곳에서 만나 ‘7·4 남북 공동 성명을 논의’한 것이다.
이런 입지 여건으로 요정에서 일하던 여종업원들 한복 공급처가 바로 익선동 골목이었다. 이들을 단골 삼아 한복집과 점집이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 매매춘에 노출되어 있는 각박한 삶을, 그녀들이 무속신앙에 의지한 까닭이다.

 


젠트리피케이션

 

익선동 골목 © 이영천


골목은 그저 수수했다. 차량 통행이 불가한 좁다란 골목이 이곳의 수호신이었다. 급격한 지가 상승이나 개발 압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낮은 기회비용이 작동하는 물리적 여건 때문이다.
이런 순박한 공간에 폭탄 하나가 떨어진다. 2004년 철거재개발이 주 내용인 ‘익선 도시환경 정비구역’ 지정 계획이다. 가까이에 종묘와 창덕궁이 자리한 까닭에 문화재청과 재개발위원회 간 대립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2010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지역 특성상 한옥 보존이 바람직’하다며 지정 계획을 부결시킨다. 2015년 ‘지구단위계획’에 들어가 2018년 한옥 보존지구인 ‘익선 지구단위계획구역 및 계획 결정’이 이뤄진다. 이로써 철거재개발이 불가능해지고, 돈화문로 등 큰길가는 20미터 이하 건축물만 가능하고, 프랜차이즈 업체는 입주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지역 보존이 가능하게 된 최소 장치 마련인 셈이다.
익선동 젠트리피케이션의 시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어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좋은 뜻으로 입주한 한 카페가 계기였다. 이 카페에서 영화가 촬영되고 오래된 익선동 골목이 다큐멘터리로 공중파를 타게 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기존 악기점과 한복집, 점집이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다. 더불어 원주민과 세입자가 내쫓겼다. 2015년 이후 벌어진 일이다.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맞아 물리적 실험에 직면하게 된다. 한옥 철거가 불가능한 규제 상황에서 평면 해체와 변형이 이뤄진 것이다. 정세권의 혁신적 실험으로 지어진 도시형 한옥 평면구성이 이때 전면적인 해체를 맞는다.
현재 익선동 지대(地代)는 임계점에 다다랐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업종 구성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임대료와 구매 능력이 임계점을 넘어서면 공간 조직의 붕괴는 필연이다. 한때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경리단길’이 대표적이다. 임대인과 임차인 간 상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살아남는 골목을 만들려는 약속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지혜가 필요한 부분이다.

 

 

 

 

글.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