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4. 15:37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A uniquely satisfying video for those who've seen it all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폰을 먼저 잡는다. 시간을 확인하고 날씨를 보고 유튜브로 뉴스를 듣는다. 벌떡 일어나는 대신 페이스북에 들어가 남의 담벼락에 올라온 글을 보거나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이메일을 확인한다. 업무 관련 메일 계정엔 주로 우리 회사에서 집행한 광고 효과를 보고하는 리포트와 광고·마케팅 동향을 알려주는 기사가 도착해 있다. 개인 메일함은 잡지나 신문, 도서관, 문화 단체 등에서 온라인 구독 서비스 형식으로 보내주는 인터넷 잡지와 뉴스 스크랩들이 차지하고 있다. 가끔 청구서나 결제 확인 메일이 있지만, 안부를 묻는 사적인 편지는 거의 없다. 메일을 대충 확인한 뒤에는 헤드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듣는다. 시사나 경제는 물론 철학, 음악, 미술, 고전문학에서 역사에 이르기까지 팟캐스트가 제공하는 깊이 있는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가끔 넋 놓고 듣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기도 한다. 역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가면서도 팟캐스트에 귀 기울인다. 내가 내는 발자국 소리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헤드폰 밖에만 머물다 사라진다.
퇴근 후 집에 오면 OTT를 탐닉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볼거리를 안겨주는 넷플릭스, 티빙, 쿠팡플레이와 유튜브를 오가며 무엇을 볼까 고르다 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팟캐스트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한다.
나의 하루를 돌아보니 외부의 인공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거의 없다. 자극적인 화면을 보지 않고 눈을 쉬는 시간도 별로 없다. 나는 종일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듣는다. 잠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보고 듣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마음이 마른 흙처럼 부석부석 부서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도 돕는”다는 ‘네덜란드왕립안내견재단(KNGF:The Royal Dutch Guide Dog Foundation)’의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도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닐까, 자문한다.
네덜란드왕립안내견재단 광고에 등장하는 인물은 참혹한 전쟁을 겪은 참전 군인이다. 전투가 끝나고 바닥에 쓰러져 땅을 바라보는 한 병사의 눈에, 내동댕이쳐진 인형과 그 인형의 주인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의 시체가 보인다. 감당하기 힘든 참상에 그는 울음을 터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으로 신음하는 병사에게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뺨을 핥는다. 나쁜 꿈으로부터 그를 깨우기 위해서다. 주인이 깨지 않자 영리한 개는 방의 불을 켜고 마침내 병사는 깨어난다. 외상 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주인을 보호하도록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안내견이 한 일이다.
Na) 우리는 악몽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도록
개들을 훈련시킵니다.
우리는 볼 수 없는 사람만 돕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도 돕습니다.
자막) KNGF GUIDE DOG
네덜란드왕립안내견재단은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자폐증이 있는 어린아이, 휠체어를 타는 사람,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발생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있는 사람을 위해 안내견을 훈련시키는 조직이다. 1935년 설립 이래 네덜란드의 안내견 사용자를 위해 수천 마리의 개를 훈련시켰다. 그중에 ‘버디독PTSD’는 재향 군인, 전직 경찰 및 소방관을 지원하도록 훈련된 개다. 고도로 훈련된 안내견은 주인이 군대에서 민간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는 불면증, 불안 발작이나 타인이 가까이 오는 것으로 인한 고통을 완화하고 항상 존재하는 친구 역할을 하도록 훈련된다. 덴버에 기반을 둔 비영리단체인 프리덤서비스독(Freedom Service Dogs)에 따르면 전문 서비스견은 군인과 재향군인이 “전투 후 삶에서 새로운 수준의 독립성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각을 잃어버려서 볼 수 없는 것만 장애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많이 본 것도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니! 전혀 알지 못했던,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이다. 정보의 과잉이 내 정신과 신체를 황폐하게 만들기 전에 눈과 귀를 쉬게 하리라 다짐한다. 하지만 1분을 못 견디고 내 손은 어느새 시몬스 침대가 2022년에 제작한 브랜드 캠페인을 검색하고 있다.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영상(OSV:Oddly Satisfying Video)이라는 제목으로 8편이 제작된 시몬스 침대의 캠페인은 침대 광고이면서도 침대에 대한 정보는 단 한마디도 없다. 심지어 광고에 침대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수영장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앉아서 물장구치는 여자들, 계단에 나란히 서서 펌프질을 하는 발들과 나무에서 순서대로 반복해서 떨어지는 오렌지, 지루하게 왕복운동하는 크로켓 막대기와 계속 굴러가는 공, 그리고 멈춘 세상에서 유일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가 바람·새·물 소리 등 잔잔한 백색소음(화이트노이즈)을 배경으로 보인다. 가만히 바라보며 ‘멍 때리기’에 딱 알맞은 영상과 소리다.
시몬스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힐링’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멘탈 헬스(Mental Health)’에서 영감을 받아 이 캠페인을 제작했다고 밝혔는데 공개된 지 열흘 만에 천만 뷰를 달성하며 화제가 되었다. 시몬스의 설명에 의하면 멘탈 헬스는 196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탈사회적 행동 양식인 ‘히피 무브먼트(Hippie Movement)'에서 기인했단다. 베트남 전쟁, 존 F. 케네디 암살 등의 암울한 시대를 겪었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평화를 외치고 인간성의 회복을 주창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기성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휴식과 명상, 자연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웰니스 라이프(Wellness Life)’를 추구한 이들 사이에서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는 멘탈 헬스가 자연스레 발전했다는 것이다.
시몬스 침대의 캠페인을 본 김에 OSV 형식의 다른 광고를 찾아본다. 광고에 그치지 않고 OSV 형식의 영상을 검색한다……. 전쟁 정도의 참혹한 장면을 보지는 않았으니 안내견까지는 필요 없고,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OSV 영상을 보며 뇌의 휴식을 가져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다 화들짝 ‘제발 눈과 귀를 쉬게 하란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노트북의 화면을 닫는다.
9월이다. 구월이라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더위나 태풍이 말끔하게 가시는 기분이 든다. 9월에는 모니터 대신, 휴대폰 액정이나 TV 화면 대신 하늘, 구름, 바람이나 나무를 더 많이 바라봐야지 하고 다짐한다. 나를 쉬게 하는 ‘이상하게 만족스러운 영상’은 모니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IlPFRsseQ8
네덜란드왕립안내견재단_TVCM_2014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n_QIhyfa8s&t=1s
시몬스 침대_영상 광고:Oddly Satisfying Video(OSV)_2022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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