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회상하며 2023.10

2023. 10. 31. 09:2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Reminiscing of the past

 

 

 

ⓒ Freepik - 작가 mindani

 

건축을 하면서 겪었던 소소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오늘날 건축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 본다.

 


마감, 또 마감, 계속 마감


한 남자가 숨이 목까지 차도록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있다. 5분 전, 4분 전, 10초 전, 9초 전……. 
‘이 건물은 왜 이렇게 계단이 많은 걸까? 누가 설계를 이따위로 한 것일까?’ 
머릿속이 어지럽다. 설계는 마라톤과 같다는 여러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몸소 배우기라도 하듯, 고지를 바로 앞에 둔 마라톤 선수와 같은 모습이다. 고통스럽다. 차에서 내린 후 계속 달렸지만, 아직도 달릴 길이 남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안도의 숨을 크게 들이쉰다.
“헉헉, 공… 공모 제출하러 왔는데요.” 
그리고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길에 소주를 마신다. 설계 마감 후 마시는 소주는 맛이 달다. 이는 지금부터 약 15년 전, 회사 생활을 하며 설계공모를 제출할 때 나의 모습이다. 

요즘 들어 예전의 일들을 많이 회상하게 된다. 문득 떠오른 설계 오류에 밤잠을 못 이루다가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기려는 마음으로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해 전전긍긍하다 결국 시간이 다 되었어도 해결하지 못해 호되게 야단을 맞거나, 애초에 중심선부터 잘못 그려진 것을 뒤늦게 알고 밤새도록 복구해야만 했던 일들, 괜한 말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던 그때의 고단했던 이야기들이, 앞으로 있게 될 좋은 일들을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한 달달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시절을 동경해서 일까, 아니면 동정해서일까? 
그리고 옆에서 열심히 고군분투하는 젊은 친구의 얼굴을 흘깃 보며 생각한다. ‘어린놈의 쉐끼.’



수정, 또 수정, 계속 수정


선배들은 항상 마감 날이 되면 마지막 남은 힘까지 남김없이 모두 소진하길 원했다. 선배라는 호칭보단 교관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최종 인쇄를 보내기 1분 전까지도 수정은 계속된다. 30초 전. 공자왈, 맹자왈… 내 손끝에서 태어난 선들이 허공을 맴돌다, 공자와 맹자의 말에 다시 제자리를 적당히 찾아간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열심히 작동되어 뭔가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더욱 속상한 것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설계권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이다. 만약 설계권을 득하고 진행되는 일이라면, 도면 한 장을 작품처럼 그리려 한다. 누가 그린 도면의 비례가 더 잘 되었는지를 논하면서 폰트의 크기에서부터, 하다못해 채워지지 않는 여백의 적합성을 가지고 논의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누구는 마지막까지 온 맘을 다해서 은수저를 닦고 또 닦아 혼수를 챙기는 부모같이,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마무리를 해야 설계수주를 할 수 있다고 했던가? 또 누구는 도면을 이쁘게 그려야 시공하는 사람이 건물을 예쁘게 짓는다고 했던가? 회사의 젊은 직원이 들어올 때마다 고민되는 부분이다. 지금의 설계자는 어떤 자세로 설계에 임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도 건축이 좋다


예전에 한 건축주의 의뢰로 두 개의 대지를 다른 건축사사무소와 한 개씩 나눠 동시에 설계 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당연히 설계계약은 각각 따로 이뤄졌다.). 계획설계 단계에서 같은 날 두 지역의 설계안 브리핑이 이뤄졌고, 건축주가 말했다. “A건축사사무소는 B건축사사무소가 한 이 부분을 참고해서 다시 작업해 주시죠.”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누군가의 노력을 평가하듯 서로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언제나 불쾌하다. 마치 등급을 매기는 자에게 착취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비슷한 땅을 가지고 고민한 두 건축사의 생각을 서로가 배울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가 경쟁이다. 무인도에 갇혀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경쟁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필연적인 과제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경쟁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한테 소중한 것일수록 더.

 

 

 

 

글. 유기연 Yu, Kiyeon 심간 종합건축사사무소

 

유기연 건축사 · 심간 종합건축사사무소

 

심간종합건축사사무소의 대표로서, 고객의 바람을 담아 좋은 공간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고민하고, 그 공간을 현실화 할 수 있도록 공사 중에도 시공사 등 여러 관계자와 소통하며 작업한다. 최근프로젝트로는 미아동 단독주택, 창동 오피스텔, 은평고 체육관, 인덕고 체육관 등이 있다.

simgan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