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1. 09:20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If we scrub off the dirt, then will we turn over a new leaf?
‘쉿! 주인 몰래 영업합니다 몰래탕’
부산 영도구에 있는 오래된 목욕탕인 봉래탕 건물에 알쏭달쏭한 문장을 쓴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목욕탕 정기 휴일에 열리는 팝업스토어 이벤트를 광고하는 현수막이었다. 2023년 6월 두 차례 진행된 ‘몰래탕’ 팝업 스토어는 매끈목욕연구소와 봉래탕의 협업 행사였다. 1986년 문을 연 봉래탕은 창업자의 아들이 이어받아 2대째 운영하고 있는 38년이나 된 동네 목욕탕이다. 매끈목욕연구소는 도시를 디자인하고 브랜드화해 가치를 부여하는 부산의 도시 브랜딩 회사 ‘싸이트브랜딩’의 사내 프로젝트 그룹이다. 이 연구소는 부산의 동네 목욕탕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래된 목욕탕 건물을 3D 스캔해서 내부 구조를 데이터로 남기는 일을 했고 목욕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또 매달 목욕탕 전문 잡지인 <집앞목욕탕>을 발행하고 있다.
‘몰래탕’ 팝업 스토어에서는 때밀이 수건을 응용해서 만든 캐릭터, 목욕탕 그림이 새겨진 엽서, 휴대전화 액세서리 등의 상품이 판매되었다. 또 빈 욕조에 플라스틱 공을 가득 채운 볼풀과 샴푸통을 활용한 미니 볼링장이 어린 손님들을 맞이했다. 목욕탕이 이색 공간으로 변신한 것에 큰 관심이 집중되어서 하루에 3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다녀갔고 첫날 하루 매출만 100만 원 수준을 기록했다고 한다. 몰래탕을 방문해서 금녀의 공간인 남탕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볼풀에서 놀거나 퀴즈를 풀고 혹은 기념품을 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후기가 온라인 곳곳에 올라와 있었다. 마지못해 씻으러 가는 낡고 축축한 목욕탕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몰래탕’ 프로젝트는 2023년 한국공공브랜드진흥원이 주최하고 산업자원부가 후원하는 제1회 공공브랜드 대상에서 중소기업 콘텐츠 크리에이티브 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인허가를 받은 대중목욕탕은 1954년 1월에 허가를 받은 뒤 2013년 문을 닫은 부산 동래구의 금정탕이었다. 현재도 운영 중인 목욕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1954년 9월에 문을 연 대전시 유성구의 유성호텔 대온천탕이다. 목욕탕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이고 성장세는 20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목욕탕 숫자가 최정점을 찍은 해는 2003년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9,970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목욕탕의 개업보다 폐업 수가 많아지면서 목욕탕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2023년 1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목욕탕은 5,991 곳에 불과하다.
봉래탕의 인스타그램에는 게시물마다 ‘#목욕탕을한국에서사라지게하지않겠다’는 해시태그가 달려있다. 매끈목욕연구소는 ‘사라져 가는 부산의 동네목욕탕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부산만의 동네목욕탕 문화를 다시 열어가는 곳’이라고 자신의 유튜브에서 밝히고 있다. 씻는 곳에서 나를 돌보는 곳으로 목욕탕의 진화를 꿈꾼다고도 말한다. 최초의 목욕탕이 생겨난 부산에서 목욕탕을 ‘소중히 지켜야 할 자랑스러운 문화자산’으로 여기고 동네 목욕탕을 지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목욕 대야를 옆에 끼고 주말마다 목욕탕에 가던 시절이 있었다. 목욕탕에서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남자아이를 만나 못 본 척했던 기억도 있다. 여탕에 들어온 그 아이가 부끄러워야 했는데 왜 내가 얼굴이 붉어졌나 모르겠다. 겨울 내복을 잔뜩 들고 와 빨래를 하던 아줌마, 초면인데 등을 들이밀며 때를 밀어달라던 할머니도 있었다. 처녀들은 수건으로 몸을 가렸고 꼬마들은 물을 뿌리며 까르르 웃었다. 목욕을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나와 탈의실 평상에 앉아서 마시는 우유는 차고 고소했다. 몰래탕 이벤트 덕에 떠들썩하고 유쾌해서 잔칫집 같았던 내 어린 날의 목욕탕이 떠올랐다.
환골탈때
다 때가 있다
몰래탕 입구에는 ‘환골탈때’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역시 부산 동래구에 있는 금샘탕이라는 목욕탕에는 ‘다 때가 있다’는 나무로 된 문패가 걸려 있다. 목욕탕에 어울리는 재치 있는 말장난이다. 동네 사람들이 때를 밀던 목욕탕이 팝업스토어도 되고 강연이나 음악회가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해도 어색하지 않은 때가 되었기에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오랜만에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몸을 푹 담그고 때를 활활 벗기면 환골탈태해 완전히 새로워진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느긋한 목욕이 주는 나른한 즐거움을 아는 때가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다 때가 있지만, 내 몸에 붙은 때를 모르고 사는 것처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버린 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대로 괜찮다고 안달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 때가 된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동네에도 어딘가 목욕탕이 남아 있을까?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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