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⑳ 젊은이의 공간으로 거듭나길 2025.1

2025. 1. 31. 09:4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⑳ To be reborn as a space for young people

 

 

 

아득해 무엇 하나 가늠할 수 없다. 퇴화해가는 신체와는 달리, 휘황하게 변해버린 공간이 그저 어리둥절하다. 그 아득함은 MZ세대에게서 느끼는 격세지감보다 더 깊다. 마치 신촌 로터리에 있었던 나이트클럽 ‘우산 속’을 찾아 더듬거리는 기분이다. 사라져버린 곳을 기억으로 소환해야 하는 당혹감이, 공간이 주는 충격에 버금간다.
도시 공간끼리도 경쟁이 있을까. 그렇다면 신촌은 분명 패배자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반화하기도 전에 먼저 그 철퇴를 맞았다. 인근 홍대와 연남동에 모든 매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앗긴 명성을 좀처럼 되찾아오지 못한 시간이 벌써 수십 년이다.
신촌은 기득권으로 노회해진 86세대를 닮았다. 1980년대 저항으로 만들어낸 ‘민중문화’ 공간이었다. 주점마다 민중가요가 떼창으로 울려 퍼졌고, 카페에선 격한 토론이 불붙었다. 대중문화와 공존했다. 하지만 그 산실은 이제 흔적마저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공간은 잃어버린 매력을 되찾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화려한 명성을 앗기고 저리 힘겨워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존치와 해제를 두고 몇 년째 갈등 중인 ‘대중교통전용지구’가 그런 몸부림의 일환일까?

 

 


공간 형성
미국 북장로회가 설립한 연희전문이 일제강점기인 1918년 지금 자리에 들어서고, 1920년 경의선 신촌역이 생긴다. 뒤따라 역시 미국 감리회가 설립한 이화여자전문이 1935년 이전해 온다. 조선시가지계획령(1934)에 따라 1936년 고양군 연희면 등 기존 도심의 3.5배에 달하는 면적이 경성부에 편입된다. 연희면에 시행된 ‘대현지구 토지정리구획사업’으로 신촌이 형성된다.
기존 도심과 용산을 제외하고, 편입지역의 권역별 용도지역을 철도와 전차선을 따라 배정한다. 이 중 대현지구는 주거와 공업 혼용으로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대현지구는 1937년 결정 고시를 거쳐 2년 후 착공, 1942년 완공한다.
신촌이 대학촌으로 변모한 건 해방 이후다. 홍익대가 1955년 상수동에 캠퍼스를 짓고 이전해 온다. 가톨릭 예수회가 1960년 캠퍼스를 마련해 설립한 대학이 서강대다. 1957년 연희전문이 승격한 연희대와 세브란스병원이 통합하여 연세대가 되고, 이듬해 병원 건립에 착공하여 1962년 의학부가 신촌으로 이전해 온다. 이로써 신촌 대학가가 본모습을 갖추게 된다.

 

 


문화와 공간
1970년대 ‘청년문화’가 탄생한다. 일제 잔재에 짓눌린 당시 기성세대에 반발한 대중문화의 갈래이자 하나의 하위문화였다. 통기타와 청바지, 장발과 생맥주로 표출된 대학생 전유물로 대안문화로는 성장하지 못한다. 낭만적 엘리트인 대학생의 서구 지향과 동경이라는 한계가 여실했다. 그 중심에 신촌이 있었다.
그러함에도 1960년대 미국 로큰롤 혁명에 비견하는, 우리나라 최초 세대 혁명으로 평가받곤 한다. 식민지 잔재가 전후 서구문화와 격렬한 갈등을 일으킨 시기로, 이는 곧 시대의 산물이었다. 물론 살벌한 군사독재에 격렬하게 저항한 학생운동도 있었다. 70년대 말 대학가에서 ‘탈춤 부흥 운동’으로 민중문화 맹아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마저 낭만적 학생운동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독재자 죽음으로 낭만적 1970년대가 저물고, 잠깐의 희망마저 다시 총칼에 짓밟힌다. 5.18은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이 역사와 변혁의 주체라는 이념으로 무장하고 조직화한다. 이에 탄생한 민중문화가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대항문화로 자리매김한다. 영역은 다양했다. 판화와 만화, 걸개그림과 민중가요, 굿거리와 마당극, 탈춤과 사물놀이까지 계승한 형태였다. 그 중심에 역시 신촌이 있었다.
1980년대 신촌은 부풀 만큼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획일화한 1970년대와는 확연히 달랐다. 드나드는 곳만으로 그 사람의 성향이 드러날 정도였다. 민중문화를 주류에 두고, 소집단으로 나뉘었을망정 다양한 대중문화를 품고 있었다.
아울러 대중가요 싹도 같이 자라난다. 연극과 언더그라운드가 움트기 시작한다. 공연장이 곳곳에 자리한다. 1970년대 말 명동과 종로의 라이브 공간이 쇠퇴하자 인프라가 갖춰진 신촌으로 이전해 온다. 소극장과 카페, 클럽 등에서 라이브 공연이 열린다. 이때 신촌 블루스나 들국화 같은 밴드들이 크리스탈 소극장과 레드제플린에서 공연한다. 훼드라도 빠질 수 없는 곳 중 하나였다.
민중문화가 저항문화였다면 신촌에서 싹 틔운 ‘대중문화’는 1990년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산울림, 연우, 시민극장 등 소극장이 잇달아 생겨나며 다양한 예술인들의 교류로 연극 메카를 이뤄나간다.
민속주점이 시대를 풍미한다. 크고 작은 서점이 곳곳에 포진하고, 신촌시장에서 태어났음 직한 오래된 대폿집들도 성시를 이룬다. 나이트클럽에 몸을 맡기던 청년들이 로터리 주변 대형 백화점에서 눈요기하기 바빴다.

 



변천과 쇠락
1990년대 초 이른바 X세대가 등장한다. 이들의 출현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맛집과 패션, 음악, 스포츠를 공유하고 힙합 바지에 햄버거와 피자를 즐기며 PC와 매우 친근했다. 인종과 국가, 종교와 이념에도 그리 얽매이지 않았다.
미국 힙합이 기저에 깔려있다.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내기보다 받아들여 즐기기에 여념 없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기 바쁘다. 비판과 대안 제시가 사라졌다. 이런 경향성이 아직도 우리 대중문화 저변을 지배하고 있다.
X세대 충격파가 가시기도 전에, N세대가 인터넷과 함께 혜성처럼 등장한다. 디지털로 맺어진 네트워크 세상이 열린다. 컴퓨터로 온갖 정보를 섭렵하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두와 공유한다. 생성된 정보가 가공되어 인터넷을 떠돈다. 세계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이원화한다.
이런 변화가 극명하게 표출된 곳이 신촌이다. 재미와 놀이, 만남을 추구하는 자유로움과 다양성으로 무장한 이들 세대가 공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이들의 영역이 다양화할수록 공간은 획일화로 치닫는다. 카페가 들여다볼 수 있는 1층으로 내려온 게 대표적 현상이다. 인디 문화를 주도하는 밴드가 소규모 주점에서 태동한다. 곳곳에서 게임과 PC방이 성황을 이룬다.
유흥 공간 록카페가 탄생하지만, 기성세대 시선엔 퇴폐 공간으로 지목된다. 1991년부터 구청과 경찰서가 식품위생법을 근거로 규제를 시작하고 연세대는 추방 운동을 벌인다. 1992년 신촌 5개 대학 총장 모임에서 신촌 문화의 퇴폐성이 논의되고, 대대적인 단속에 상당수 록카페가 문 닫는다. 설상가상 1996년 사회적 이슈로 부각한 ‘롤링스톤즈’ 화재로 상권마저 큰 타격을 입는다.
1990년대까지 문화·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던 신촌이 2000년 이후 활기를 잃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높은 임대료에 소규모 가게가 이탈한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점령한 유흥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열악한 보행환경과 차량 정체, 상권 획일화 등으로 공실률이 늘어난다. 신촌 쇠락의 시작이다.
신촌의 침체가 일순간에 다가온 건 아니었다. 결정타는 신촌에 있던 이색적인 가게, 예술가와 인디밴드가 홍대로 옮겨가면서부터다. 여기에 신촌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가 사라져 획일화하고, 견디기 힘든 높은 임대료가 악순환 기저에 작용한 탓이다.

 



공간 재창출은
신촌의 주인공은 결국 젊은이다. 이들은 지금 극심한 경쟁에 내몰려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공간은 이들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술집 일색에서 다양성을 품은 공간으로 변신해야 한다.
공간 매력은 ‘가보고 싶은’심정의 충족이다. 가서 보고 느끼며 배우고 즐기는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 차량에 지배당하기보다 보행이 자유로워야 하고 문화와 친밀해야 한다. 그 첩경은 공원 등 휴게 기능에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예술 활동이 활발해야 한다.
공간에서 예술 활동이 자유로워지려면 임대료 부담이 낮아야 한다. 적정 임대료가 있을까만, 임대료는 결국 공간 매력과 반비례 관계다. 따라서 예술 활동을 담보하는 몫은 공공부문이 떠맡아야 한다. 무엇보다 기득권이 되어버린 86세대가 쌓아놓은 꼰대 이미지를 벗어던져야 한다. 젊은이가 이 공간을 소비하기에 거리낌 없어야 한다.
청년이 도전정신을 펼칠 공간으로의 재탄생도 한 방향이다. 스타트업과 벤처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꿈꾸는 젊은이들 발길이 잦아져야 한다. 그래야 젊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산학 협력 기반은 훌륭하다. 구로와 가산디지털단지가 타산지석이다.
시간 흐름에 세대가 변하듯, 꿈꾸는 젊은이의 대안문화가 창출되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아득해진 신촌에서 응원해 본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