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31. 10:50ㆍ아티클 | Article/포토에세이 | Photo Essay
Boseonsa Temple, Seokmo-do, Ganghwa
서해 바닷길의 끝자락, 석모도에 이르면 섬의 절경보다도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사찰 하나가 있다. 바로 보문사(普門寺). 단지 오래된 절이라서가 아니다. 이곳은 자연과의 공존, 신앙과 건축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곳이다. 바다와 산, 바위와 나무, 그리고 사람이 천천히 섞여드는 공간. 보문사는 한국 전통 사찰 건축의 한 축을 이루는 ‘자연순응형’ 건축의 절정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장소이다.
보문사의 역사는 관세음보살 신앙과 깊게 맞닿아 있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회정 대사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감동을 안고 이곳에 절을 세웠으며, 절 이름 ‘보문(普門)’이라는 이름은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유래한 것으로, “세상의 모든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문을 통해 구제받는다”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중생 구제의 뜻을 품고 있다. 산 이름 ‘낙가산(洛伽山)’도 인도 관음성지인 보타락가산에서 유래해, 창건 당시부터 관음 신앙의 도량임을 명확히 보여준다.1)
창건 14년 뒤인 649년, 어부들이 바다에서 건져 올린 석불상과 미륵보살 등 22구의 석상을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의 전설은 보문사의 영험함을 상징한다. 이 석굴은 ‘신통굴’로도 불리며, 기도하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문사는 오랜 시간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도처’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러나 이 사찰의 진면목은 단순한 신앙적 기능을 넘어, 건축 그 자체가 보여주는 상징성과 아름다움에 있다.
보문사의 공간 구성은 불교 건축의 전형적인 축선 구성을 따르면서도, 지형적 특성에 맞춰 유기적으로 설계된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평지 사찰과는 달리, 보문사는 암반과 산비탈 위에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마치 산을 오르는 순례자의 걸음을 따라 하나하나 펼쳐지는 구조다. 경사진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품은 설계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한국 건축의 지혜와 미학을 잘 보여준다. 사찰 주변에는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있어, 방문객들은 자연 속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경내와 주변에는 700년 수령의 향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 오래된 나무들이 사찰의 역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보문사 석실, 마애석불좌상, 민속문화재인 맷돌 등은 사찰의 문화재적 가치를 높인다. 특히, 낙가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일출과 낙조는 보문사만의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사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신앙적 상징성과 더불어, 건축적 배치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보문사의 가람 배치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했다. 경내에는 극락보전, 삼성각, 선방, 범종각, 석실(와불전) 등 다양한 전각이 들어서 있으며, 각 전각은 신앙적 상징성과 건축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사찰 입구에서 시작되는 언덕길을(예전에는 돌계단) 따라 오르다 보면, 낮은 처마를 이고 있는 대웅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으나 지금은 증축공사로 인해 다른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극락보전)은 다른 유명사찰의 대웅전보다 비교적 아담한 규모지만, 단정한 비례와 절제된 공포장식에서 오히려 경건함이 느껴진다. 기단은 자연석 위에 바로 얹혀 있어 인위적 느낌이 없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내부에는 3,000여 옥부처가 모셔져 있어 장엄함을 더한다.
석실(와불전)은 1980년대 조성되어 2009년 완공됐다. 석실에는 열반에 든 부처님의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석실 앞에는 수령 700년을 넘는 향나무가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은 평화롭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한전(석굴 법당)은 천연 석굴로, 바다에서 건져 올린 석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이곳은 보문사의 기도 영험함을 상징하는 핵심 공간이다.
마애관음좌상(눈썹바위)은 낙가산 중턱, 해발 92m의 기암 아래에 너비 3.3m, 높이 9.2m에 이르는 거대한 관음보살 마애상이 새겨져 있다.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인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석불좌상으로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네모진 모습이다. 얼굴에 비해 코는 넓고 높으며, 귀는 투박하고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다. 옷은 각이 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 무늬가 새겨져 있다. 손에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을 들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신 뒤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있다. 이 불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성지(聖地)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석불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2) 40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이곳은 서해를 굽어보며 중생을 살피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상징한다.
건축적으로 보문사는 전통적인 목조 구조물 외에도 석축, 암반, 자연 동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극락보전에서 마애관음좌상까지 이어지는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심리적 전이의 공간이다. 산길을 오르는 동안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바람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그 길을 올라 가는 자신의 숨소리만이 남는다. 마지막에 다다라 마주하게 되는 마애관음좌상은, 그 긴 호흡의 끝에서 마주한 ‘침묵의 응답’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보문사는 단지 역사적 유산을 넘어, 현대인의 마음을 치유하는 명상처, 소원성취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매년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정성을 다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준다”는 믿음 아래, 연중 내내 기도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템플스테이 등 현대인의 심신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강화 석모도 보문사는 천년을 이어온 관음 신앙의 도량이자, 자연과 건축, 신앙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한국 불교 건축의 대표적 사례다. 보문사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걸어 들어가며 체험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단순한 관람이 아닌, 고요한 대화에 가깝다. 지금, 우리가 잊고 살았던 건축의 본질을 마주하고 싶다면, 그 답은 강화 석모도의 이 오래된 사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경사진 산길을 오르며 만나는 전각과 석굴, 그리고 서해를 굽어보는 마애상의 자애로운 미소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경건함과 평온, 그리고 소망의 힘을 전한다. 보문사는 과거와 현재, 신앙과 건축,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앞으로도 그 가치를 이어갈 것이다.
글·사진. 원찬식 Won, Chansik 플랜지 건축사사무소
'아티클 | Article > 포토에세이 | Photo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암스테르담의 NEMO 과학박물관 2025.8 (0) | 2025.08.31 |
---|---|
[건축 코믹북] 결핍이 창조를 만든다 2025.8 (0) | 2025.08.31 |
“에너지 고속도로, 도시를 잇다” 한정훈 2025.7 (0) | 2025.07.31 |
아름다운 석양을 품은 ‘정서진(正西津)’ 2025.7 (0) | 2025.07.31 |
[건축 코믹북] 더 다양한 건축과 사람 2025.7 (0) | 2025.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