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2. 10:37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Gothic cathedral inspiring modern design
지난 4월 13일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의 지붕이 불에 탔다. 노트르담 성당은 12세기에 지어진 중세의 고딕 성당이다. 중세는 교회가 세상의 모든 진리를 독점하고 그것을 우매한 민중들에게 강제한 시대 다. 오죽하면 암흑의 시대였다고 했을까? 하지만 고딕성당으로 대변되는 고딕 정신은 19세기와 20세 기 모더니즘 디자인의 탄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윌리엄 모리스를 비롯한 근대 디자인 개념 을 낳는 데 큰 역할을 한 19세기의 건축사와 디자이너들, 그리고 발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이념 정립에 그 암흑기의 고딕성당과 그 안에 담긴 시대정신은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왜 고딕은 아방가르도한 모더니스트들에게 희망이 되었을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19세기 산업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혁명으로 물건은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하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전반적인 품질의 하락이다. 공예가들이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공예 품과 달리 공장의 물건은 비록 생산비가 낮아졌으나 디자인이 형편 없었다. 왜냐하면 공장 시스템에서 는 공학자들이 물건을 만들므로 미학적인 배려를 잘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공예가들의 심미안을 따라 올 수 없으니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물건을 압형이나 주물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다 보니 손으 로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쉽게 장식 같은 것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심미안이 부족한 공장의 주인은 이러한 장식적인 물건을 일반인들이 좋아할 것이라 여겨 어떠한 미학적 원칙도 없이 마구잡이 로 구겨 넣었다.
그 결과 제품들은 귀족들의 화려한 사치품을 어설프게 흉내 낸 천박스러운 모조품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 다. 결국 모든 물건에 예술적 기운을 불어넣었던 과거에서 오히려 퇴보했다. 공장에는 예술 교육을 받은 사 람이 없고,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와 적당히 형태를 부여해 값싸게 생산하는 것만을 우선으로 여 긴 기술자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의 공장 생산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바로 ‘노동의 소외’라는 문제다. 공 장주들은, 즉 자본가들의 목적은 이윤의 추구다. 공장의 토지와 기계라는 생산수단을 확보하는 데 많 은 돈을 투자한 자본가들은 빨리 투자금을 회수하려 한다. 그들에게 노동의 조건이나 노동자들의 처우 는 관심 밖의 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숙련된 기술을 가졌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남자 노동자보다 기 술이 부족해도 더 낮은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여자나 아이들을 고용하려고 했다. 숙련된 기술이 없는 그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더욱 자동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 그렇게 기술도 없이 기계의 보조적인 수단이 된 노동자들은 자신이 뭘 만드는지도 모른 채 기계 옆에서 단순한 노동을 할 뿐이다. 가내 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들던 과거의 생산자와 비교하면 이들의 노 동은 어떠한 즐거움도 보람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시대부터 노동자 들은 비인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단이 된 노동자들은 자신이 뭘 만드는지도 모른 채 기계 옆에서 단순한 노동을 할 뿐이다. 가내 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들던 과거의 생산자와 비교하면 이들의 노 동은 어떠한 즐거움도 보람도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산업혁명 시대부터 노동자 들은 비인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거스터스 퓨진 같은 건축사, 존 러스킨 같은 19세기의 예술비평가는 산업혁명 이 몰고 온 이러한 변화에 절망했다. 절망적인 현실로부터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한 이들에게 희망의 미래는 오히려 과거에 있었다. 바로 중세의 고딕성당이다. 중세의 고딕성당을 짓는 데 동원된 노동자들은 모두 각자의 독보적인 기술을 가 진 장인들이었다. 집을 짓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 채석공, 석공, 벽돌공, 회 반죽공, 지붕공, 조각공, 목수, 대장장이, 유리공 등이다. 이들은 저마다 자기 기 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신에 대한 간절한 믿음을 갖 고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는 소명 의식도 충만했다. 성당의 모든 것이 벽돌 한 장, 스테인드 글라스의 장식 하나, 장미창의 아름다운 조각 하나가 장인들의 정성 어 린 손을 거치지 않고 태어난 것이 없었다.
939년에 개봉된 영화 <노틀담의 꼽추>에서 콰 지모도는 괴물 같은 외모를 지니고 태어나 평생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로 살아간 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에스메랄다 의 목숨을 살리고자 몸 바치지만 그녀와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녀를 떠나보낸 뒤 콰지모도는 처량하게 성 당의 높은 망루에 올라 와 있다. 그의 옆에는 추하게 생긴 괴물 조각 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왜 나도 이런 돌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토록 추 한 모습이라면 차라리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 없는 돌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그의 마지막 대사는 그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느끼게 해준다. 바로 이 추악한 괴물 조각에서 존 러시킨은 오히려 희망을 보았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는 <베니스의 돌>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도구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인간으로 만들 것인지 결 정해야 한다. 둘 다로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은 도구처럼 정확하게 기능하도록, 모 든 행동에서 정밀하고 완벽하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당신이 사람으로부터 그와 같은 정밀성을 얻으려고 한다면, (중략) 당신은 사람을 틀림없이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중략) 반면 당신이 일하는 존재를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를 도구 로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이 상상하고, 생각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려고 단지 시작만 해도 기계로서의 정밀성은 당장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거 칢, 모든 투박함, 모든 무능함이 터져 나오고, 수치에 수치가, 실패에 실패가, 중단 에 중단이 연거푸 터져 나온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존엄성도 터져 나온다.”
존 러시킨은 산업 생산품의 정밀함이 공장 노동자의 노예 상태를 대변하는 것이 라면, 못생기고 그 투박한 고딕성당의 괴물은 “돌을 쪼아대던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생명과 자유의 징표”라고 역설했다. 존 러스킨이 고딕 성당에서 현 대 산업 문명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찾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산업혁 명에 따라 공업 생산품이 나오던 시절, 영국에서는 엉뚱하게도 중세의 고딕 리바 이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고딕에서 자유로운 인간 노동의 구현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일어나게 될 예술공예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예술공예운동은 다시 20세기 전반기에 전개될 모더니즘 운동에 그 정신의 일부 를 전하게 된다. 이는 산업 생산에 예술가, 즉 디자이너의 참여를 낳는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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