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Ⅱ 2019.7

2022. 12. 23. 13:04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Space built on spirit, Korean Seowon Ⅱ

 

그림 1) 소수서원의 명륜당은 사방으로 나 있는 쪽마루로 세상과 교감했던, 성리학의 보급을 알리는 사상의 횃불이었다.

 

서원 건축을 주도한 성리학자들은 우주론적 인식과 인성론을 근간으로 하는 천 인합일天人合一 사상에 심취했다. 과거 시험을 통해 성장한 사대부들은 경전 자 구를 해석하는 데 치중했던 종래의 유학(훈고학)에서 벗어나 우주와 인간의 근본 적인 문제를 탐구하고자 했다. 불교의 선정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수용한 성리 학은 인간의 도리를 밝히고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이었다. 이들은 하늘을 단순히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지 않고 하늘의 조화와 질서를 지상의 만물에 적용하여 그 존재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천인합일은 인간이 만든 건축을 자연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동시에 인간과 사회가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밝혀주는 사상이다.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동일한 체계로 파악하여 자연을 인간 행위의 모범으로 삼는 천인합일 사상은 서원의 환경 과 공간 구성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실제로 서원의 배치와 공간 구성은 주변 산 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원은 건축과 자연을 하나의 문맥으로 연계하며 그 장소만의 성격을 강화했다. 자연 경관과 건축을 하나의 유기체로 엮어낸 것이다.

 

그림 2) 중앙의 지숙료가 서쪽과 동쪽의 관란헌과 시습재를 연결한다.

 

자연으로 퍼져나가는 사상의 등불 _ 소수서원 명륜당 (그림1)

 

신재 주세붕이 조선에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 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명륜당明倫堂은 다른 서원의 강당과 그 모습이 다르다. 3×3칸의 정사각형 대청마루가 북측의 온돌방을 제외한 동쪽, 서 쪽, 남쪽 방향으로 한지 창문을 두르고 있다. 정사각형 강당 마루에 한지 문짝을 두른 곳은 소수서원이 유일하다. 동쪽의 창문으로 햇살이 내려앉으면 문살에 강 한 음양이 새겨지고 흐릿한 창문이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실내 공간이 밝아진다. 명륜당의 대청마루는 하루의 시간을 알려주는 해시계와도 같다.

여닫이문을 열자 죽계의 자연이 강당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낮에는 죽계의 물소리 와 솔향기가 담장으로 기웃거리고 밤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강당의 불빛이 죽계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명륜당은 죽계의 자연을 받아들이고 뿜어내며 숨 쉬는 생명 이었다. 명륜당은 안향 선생의 학덕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사상의 등불과도 같다.

 

외관이 아닌 풍경을 설계하다 _ 도산서원 농운정사 (그림2)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이 직접 설계도면을 그려 지은 도산서당이 확장 된 형태로, 제향자의 정신이 어떠한 서원보다 강하게 배어 있다. 도산서당 서쪽에 제자들이 거처하며 공부했던 농운정사隴雲精舍가 앉아 있다. 여덟 칸 규모의 공 工 자형 평면은 보기에도 단단하다. 이황 선생은 작은 공간을 잘게 나누어 헌軒을 관란觀瀾, 재齋는 시습時習, 요寮는 지숙止宿으로 이름 지었다.

이는 농운정사에서 개별 건물의 기능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중 앙에 일日 자로 뻗은 4칸짜리 지숙료가 농운정사의 중심을 잡아준다. 지숙료는 유생들이 잠을 자고 독서하던 곳으로 창호가 많이 달려 실내 채광이 좋다. 아침엔 동창이 불타고, 낮에는 처마를 타고 내려온 햇살이 갖가지 위치로 난 남창을 기웃 거리고, 오후에는 노을이 서창에 걸린다. 이는 유생들이 햇살의 움직임으로 하루 의 흐름을 인식하고 하루 종일 맑은 공기가 실내에 흐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숙료의 서쪽과 동쪽으로 돌출된 마루방은 각각 관란헌과 시습재로, 좁은 공간에 도 틈을 찾아내어 자연을 초대한 사색 공간이다. 관란헌과 시습재가 마주보는 방 향은 벽을 틔워 그 사이로 쪽마루를 깔았다. 그 외의 벽에는 여닫을 수 있는 나무 문을 달아 공간의 기밀성을 높이고 날씨에 따라 판문으로 조절하도록 했다. 각각 의 공간은 독립적이면서도 쪽마루로 열리기도 하며 하나로 통합된다. 좁은 공간이 마당을 끌어안는 순간 관란헌과 시습재는 하나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림3)

지숙료의 서쪽과 동쪽으로 돌출된 마루방은 각각 관란헌과 시습재로, 좁은 공간에 도 틈을 찾아내어 자연을 초대한 사색 공간이다. 관란헌과 시습재가 마주보는 방 향은 벽을 틔워 그 사이로 쪽마루를 깔았다. 그 외의 벽에는 여닫을 수 있는 나무 문을 달아 공간의 기밀성을 높이고 날씨에 따라 판문으로 조절하도록 했다. 각각 의 공간은 독립적이면서도 쪽마루로 열리기도 하며 하나로 통합된다. 좁은 공간이 마당을 끌어안는 순간 관란헌과 시습재는 하나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림3)

 

그림 3) 시습재에서 본 관란헌. 농운정사에서 각각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림 4) 농운정사에서 창문은 그 위치와 크기가 제각각이다. 햇살이 저마다 다른 기울기로 들어와 각자의 시간을 새긴다.
그림 5) 농운정사에서 창문은 그 위치와 크기가 제각각이다. 햇살이 저마다 다른 기울기로 들어와 각자의 시간을 새긴다.

 

유식과 강학의 들숨 날숨_남계서원 강학 공간 (그림6)

 

남계서원灆溪書院의 동·서재인 양정재養正齋와 보인재輔仁齋는 연못 방향으 로 작은 누각인 애런헌愛蓮軒과 영매헌咏梅軒을 냈다. 하나의 공간에서 수평과 수직의 공간 분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양정재와 보인재는 강당 앞에 마주 서 있 지만 애런헌과 영매헌은 연당으로 슬쩍 고개를 내민다.

이는 초기 유식 공간이 강학 공간에서 분화되기 이전의 구조를 드러낸다. 남계서 원은 강학 공간과 유식 공간이 한 몸처럼 끌어안고 있는 최초의 실험작으로, 양 정재와 보인재가 명성당 앞에 마주 서지만 작은 누각을 달아 연당으로 시선을 트 여 놓았다.

손바닥만 한 애련헌의 서쪽은 판벽으로 막고 가운데에 여닫을 수 있는 나무 창문 을 달았다. 보인재와 양정재는 서로 마주보는 강학 공간이지만 애련헌과 영매헌 은 연지 쪽으로 마음이 향하는 유식 공간이다. 애련헌에 올라 누마루의 판벽에 걸린 여닫이 판문을 여니 액자 속에 걸린 연당이 눈길을 당긴다. 남계서원의 유생 들은 평소에는 창문을 닫아 학문의 공간으로 편입했다가 화창한 날씨에는 창문 을 열어 연, 죽, 매를 품었을 것이다. 선비에게 연꽃과 매화는 포획의 대상이 아니 라 사유의 대상이었다. 애련헌과 영매헌은 눈으로 꽃을 품고 가슴으로 향을 삭여 마음으로 음미하는 공간이었다.

한국의 서원은 중국의 서원에 우리만의 독특한 구조와 경관을 덧댄 조선시대의 엘리트 사립 교육 기관이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중국의 서원을 모델로 했지만 우리의 문화와 사상으로 발효되어 고유한 교육 기관으로 발전했다.

성리학의 자연관, 지리관, 세계관에 따라 각각의 공간을 다양하게 배치했다. 그 결과 주변 산수와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공간과 전망 경관이 탄생할 수 있었다.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남계서원을 비롯하여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9곳의 서원은 하나같이 다른 배치와 공간으로 그 멋을 자랑한다. 16, 17세기 사화의 지뢰밭 속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학자로서 지조를 잃지 않은 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상을 고유한 자연조건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제향자의 정신을 자 연으로 구현해 배치와 공간을 설계하며 각각의 서원은 독창적인 사상 공간으로 거듭났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 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하며 성 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 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 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 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 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paco994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