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그 유용한 공간 2019.7

2022. 12. 23. 13:05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Warehouse, useful space

 

장정의 해군시절은 고단했다.

고속전투정 출항 15분 전을 알리는 명령이 정내 스피커를 통해 울리면 스크루를 돌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불완전 연소된 매연이 정내 홋줄 요원들 코끝뿐만 아니 라 눈도 시리게 했다.

 

출항 5분 전 방송이 추가로 나와서 이제 바다로 나간다는 기대가 그 매운 고통을 그나마 풀어주었다. 이윽고 '홋줄 풀어'의 구령이 떨어져야 비로소 가슴이 후련 해지는 쾌감의 항해는 시작되는 것인데, 배 뒤에 배치된 장정은 물보라를 세차게 차고 나가는 그 때가 바로 고단함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시각이었다.

 

배가 바다로 나아가면 새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흰 구름, 아울러 배꼬리 에서 부서지는 흰 포말은 출항 전 매연의 고통을 날려 보내고 군생활의 시름을 함께 날려 보내 주었다. 배 대원들은 당직이 없는 상황이면 갑판 층 격실 벽에 몸 을 기대고 큰 엔진 소리와 롤링, 피칭과 상관없이 고향의 부모님 생각도 할 수도 있고, 잠깐 졸 수도 있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좀이 쑤시 면 침대에 가서 누울 수도 있는 항해 중 비번의 즐거움은 천금 같은 휴식시간이었 다. 그리고 장정에게는 당직이 없는 시간대 항해 중 행복했던 순간은 창고에 들어 가 책을 읽는 일이었다.

 

애초 그 창고는 장포 부품과 연장 및 병기를 보관하는 곳이어서 발 디딜 틈이 없 었는데, 장정은 나름 정리에 한 가닥 하는 소질을 발휘하여 창고 내부를 야무지게 정리하고 청소하였다. 그러고 나서 포탄상자 나무를 분해해서 목재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포탄을 보관했던 철제상자를 해체, 조립하여 의자로 만들었다. 동절 기에는 의자가 따뜻하도록 백열전구를 그 상자에 넣고 위에는 헤진 군용담요를 깔아 엉덩이를 따뜻하게 했다. 밖이 아무리 춥고 바람이 세차도 창고 안은 그 열 기로 훈훈했다. 상자의자에 앉아서 허리를 곧추 세우면 천장이 닿을 정도이고 양 팔을 펴면 적재물들이 손에 와 닿을 정도였지만 휴일이나 휴식시간에 밀린 독서 를 할 수 있었고 고향으로 편지를 쓸 수 있어서 장정은 그 장소에서 행해지는 것 들로 인해 참 행복해 했다. 고된 항해와 귀가 먹먹해 질 정도의 포사격 훈련을 마 치고 난 뒤 밀려오는 피로감도 이곳에 앉아 있는 것으로도 족히 해소됐다. 주말 저녁에는 해군 동료와 같이 들어와서 조용히 기울이며 마시던 소주 한 잔과 안주 용 김치라면은 그 시절 별미 중 별미였다. 큰 소리로 말하면 아래 층 침실에 들리 는 격실구조이고 창고는 비좁았지만 조용히 얘기하면 그래도 나름 괜찮은 대화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그 창고도 등분해서 한 쪽은 기관부 창고로도 쓰였는데, 장정이 창고에서 문서정리와 독서를 한다는 소문이 배 안에 나자 기관부 동료도 내부 정리를 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창고를 사용했다.

 

고속전투정은 본디 모든 격실이 최소한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더군다나 빨 리 공격하고 신속히 이동하는 것이 생명인 고속전투정에서는 필요 없는 물건을 적재하는 것이 금해져 있으며, 낭비적인 공간 크기는 허락되지 않았기에 사병 내 무반에는 편지를 쓸 수 있는 테이블이나 의자가 비치되지 못한 형편이었다. 사정 이 이랬기에 갑판부나 의무부 등에서도 나름대로 각기 배속된 창고를 활용하고자 애들을 썼다. 갑판부는 페인트와 신나 등이 함께 적재되어서 냄새로 인한 고 충으로 그리고 그 위치가 뱃머리에 위치한 관계로 그저 창고로 밖에 쓰지 못했 다. 의무부는 약과 의료장비 자재를 위한 선반이 자기네 공간의 전부였기 때문에 갑판부 동료와 의무부 동료는 자주 장포 창고에 놀러왔던 것이다. 기관부는 기관 실이라는 배안 최대공간이 있고 통신부 역시 통신실이 있었으며 조타부는 배 상 부 마스트에 조타실이 별도로 있었다. 장포창고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료는 따로 공간 조성이 아니 된 부서의 대원들이었다. 대원들은 이곳에 와서 늘 같은 맥락으 로 한 마디씩 말했다. 창고도 정리하면 이렇게 잘 쓸 수 있구나라고...

 

나무로 만든 고속전투정, 현재는 퇴역한 배. 군사보안에 해당 안 됨. 한강둔치공원에도 전시되어 있음

 

장정은 그 말을 듣고 고향집 창고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겨울이 오기 전 창고 한 켠에 연탄을 배달시켜 쌓아 놓았다. 나머지 반은 아버지가 목재소에서 손수 벗겨 온 나무껍질과 잔목재를 한 리어카 실어오면 모두 함께 나무를 쟁여 놓았다. 이 일을 마치고 청소를 말끔히 하고 나면 어머니는 이제 올 겨울을 날 준비는 마쳤 다 하시며 흡족한 표정으로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창고에서 떠올리는 어머니의 훈훈한 미소는 장정의 해군생활 고단함을 해소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군 전역 후 삼십여 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 집 창고는 어떠한가. 창고 문을 열어보 니 여행용 캐리어가 선반 최상단에 위치하고 있고 등산용 배낭, 생활용품, 족구, 축구, 테니스, 골프 등 각종 운동가방과 도구 등이 중간선반에 그리고 보기만 해 도 가슴 설레는 낚싯대와 낚시 준비물 등이 선반 하단과 벽에 지지대어 있다. 이 제 책은 창고가 아닌, 집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축구, 테니스, 골프 등 각종 운동가방과 도구 등이 중간선반에 그리고 보기만 해 도 가슴 설레는 낚싯대와 낚시 준비물 등이 선반 하단과 벽에 지지대어 있다. 이 제 책은 창고가 아닌, 집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워라밸 : Work and Life Balance의 준말, 일과 삶의 균형

 

 

 

 

 

 

 

글·사진. 조정만 Cho, Jeongman (주)무영씨엠 건축사사무소

조정만 (주)무영씨엠 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건축사·작가

 

건축사이자 문학작가인 조정만은 남원 성원고, 건국대학교 건 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건설경영과정 금호MCA를 이수했다. 천일건축, 금호그룹 종합설계실, 아키플랜에서 설 계, 감리 실무 경험을 쌓았다. 건축사 자격을 취득한 후 강원청 암재, 동교주상헌, 고양농경문화박물관 등 다수의 작품을 하고 있고, 2016년 한국수필에 '방패연 사랑'과 '아버지와 자전거'로 등단했다. 선함재건축을 7년 운영하였으며, 현재는 무영씨엠 건축 대표이사이고, 활발한 에세이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imatect@mooyoungc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