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의 기호학 2020.8

2023. 1. 18. 09:04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Semiology of Black

조지 플로이드의 살인사건이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운동에 공감하며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블랙black’이라는 단어와 ‘검은색’이라는 색채에 덧입혀진 기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Black Lives Matter”의 로고.

사람들은 흰색에 대해서 어떤 연상을 하는가? 흰색 하면 대개 깨끗함과 순결, 그리고 지향해야 할 피부색 같은 걸 떠올린다.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찬양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백옥 같은 흰 피부를 우월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흰색의 반대색을 검정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을 단순하게 밝음과 어두움으로 이분화(二分化)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말이다. 밝음과 어두움, 흰색과 검정색과 같은 자연 현상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밝음은 빛이 있는 자연 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의미화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의적(恣意的)’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해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멋대로 지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로부터 서양 유화의 세계에서 흰색은 순결을 의미했다. 유화 500년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이 그려진 주제인 <수태고지annunciation>는 순결한 몸으로 임신한 성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다가와 그녀가 성령으로 임신했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빈치, 얀 반 아이크 등 수많은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그렸는데, 모든 그림에 똑같이 들어가는 소품이 있다. 마리아 근처에 있는 흰색 백합과 흰색 비둘기가 그것이다. 흰색 백합은 마리아가 순결한 처녀임을 증명한다. 흰색 비둘기는 성령을 뜻한다. 여기에서 흰색은 순결의 알레고리(allegory)다. 알레고리는 서양 문학과 미술에서 특정한 뜻을 특정한 사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구체적인 사물에서 나아가 이야기 전체가 알레고리가 되기도 한다. 

 

<수태고지>, 얀 반 아이크, 1436년. 오른 쪽 아래 보이는 백합은 성처녀의 순결을, 성처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흰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한다.

이렇게 회화를 통해 사람들은 흰색이 순결한 의미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회화뿐이겠는가. 문학에서도, 또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학습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자의적 비유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가 돼버린다. 현실에서 흰색은 더러워지기 쉬운, 더 정확히 표현하면 변색이 눈에 잘 띄는 색일 뿐이지 깨끗한 색도 더러운 색도 아니다. 깨끗한 색과 더러운 색이라는 구분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다. 따라서 흰색이 깨끗하고 순결하다는 뜻은 인간에 의해서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회화와 문학과 같은 문화적인 장치의 학습 효과로 ‘필연적인 것’, 나아가 신이 결정한 절대적인 진리가 돼버리는 것이다. ‘흰색은 깨끗하고 순결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이상이야.’ 이런 의식이 무의식 중에 자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신화’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신화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자연스럽고 타고난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흰색, 또는 흰색 백합이 순결’이라는 등식은 특정 시대, 특정 지역에서 자기 멋대로 만들어낸 문화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본질적인 양 떠들어대는 것이다. 이것이 신화의 허구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누구인가? 물론 지배계급이다. 그들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미디어인 예술을 통해 그런 허구를 신화화했다. 오늘날에는 저널리즘을 비롯해 영화, 광고, 디자인 같은 대중문화가 열심히 신화 창조에 봉사하고 있다. 

디자인 사례로는 핑크색 장난감과 부드러운 곡선의 핑크색 면도기를 여성의 것으로, 파란색 장난감과 딱딱한 형태의 파란색 또는 무채색 면도기를 남성의 것에 대응시키는 것이 있다. 핑크색과 부드러운 형태는 여자와 아무런 필연적 관련이 없다. 마찬가지로 파란색과 딱딱한 형태는 남자와 아무런 필연적 관련이 없다. 최근 광고 사례로는 니베아와 도브가 악명을 떨친 바 있다. 니베아는 “White is Purity”라는 광고를 만들어내 인종차별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도브는 세제의 효과를 유색인종(before)과 백인(after)의 차이로 설명했다. 

 

여성 면도기와 남성 면도기에 붙어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기호학



백인은 이런 신화를 만들어냈다. 일단 흰색에 긍정적인 뜻과 우월함의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흰색(white), 즉 백인이라고 불렀다. 결국 백인은 긍정적이고 우월한 지위에 오른다. 흑인에게 대응시킨 검정색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어둠의 세계, 즉 악당, 불길한 운(검은 고양이), 협박 편지(블랙 메일), 죽음(검정색 상복) 등 부정적인 게 많다. 물론 고급스러움이나 신비로움 같은 긍정적인 뜻도 없지 않다. 하지만 검정색에 대한 일차적인 연상은 역시 부정적이다. (물론 그런 연상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란 모두 언어와 문화에 의해서 의식이 형성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런 뜻을 가진 색으로 흑인종을 지칭했다. 

인종차별적인 도브의 광고


그런데 왜 백인을 ‘white’라고 불러야 하나? 왜 몽골리안은 ‘yellow’가 되고, 왜 흑인, 더 정확하게  아프리카인은 ‘black’이 되었나? 몽골리안 중에서 피부가 흰 사람은 백인보다 희고, 백인 중에서 어두운 사람은 흑인보다 어둡기도 하다. 이는 이미 좋은 뜻을 가진 흰색(밝음)에 자신의 인종을 의도적으로 대응시킨 결과다. 인종을 색으로 표현한 그 최초의 의도 자체가 악의적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백인은 흑인의 신체적 특징을 끊임없이 모욕해왔다. 피부색은 물론, 곱슬곱슬한 머리, 넙적한 코, 두툼한 입술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열등의 낙인을 찍었다. 

그 결과 흑인들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지우려고 부단히 애를 써왔다. 황인종인 한국인들조차 백인의 피부와 백인의 얼굴을 기꺼이 모방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미디어를 장악한 백인이 만들어낸 신화, 백색의 우월함을 내면화한 결과다. 언어학자인 최봉영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은 ‘자기다움에 이른 상태’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한국적 미학에서는 보편성이 아니라 고유성으로 아름다움을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미디어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키가 얼마가 되어야 하고, 허리와 엉덩이의 비례는 얼마가 되어야 하고, 피부는 밝고 희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 보편성은 백인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예술과 영화, 광고, 디자인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신화다. 이 신화를 따르는 순간 나의 타고난 바탕을 버리고 타인을 맹목적으로 좇는 삶에 들어서게 된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백인에 의해 왜곡된 아름다움과 선, 나아가 정의의 주체성을 찾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 검정색은 불운과 죽음, 악당이라는 뜻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검정색은, 또 흑인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