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도시, 삶의 이야기 ‘물랑루즈’ 2020.8

2023. 1. 18. 09:06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Stage and city, a story of life 
‘Moulin Rouge’

드가의 그림 ‘무희들’은 매력적이다. 조명에 비친 발레리나들을 몽환적으로 부드럽게 묘사했다. 그러나 당시 발레리나의 삶은 그림 속 아름다움과 전혀 달랐다. 현재와 달리 19세기에 발레리나는 그다지 엘리트적인 직업이 아니었다. 파리의 발레리나는 어려운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매춘적 성격의 직업이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상당수가 그러했다. 비비안 리가 발레리나로 분한 영화 ‘애수 1940년’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대사들이 나온다.
파리의 쇼 공연장 물랑루즈는 과도기 시기에 한 무대를 차지한 장소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환경이 나타나면서 기대와 희망, 불안과 낙관적인 분위기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서구문화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의 새로운 문화와 만나 충돌하고, 사회적 도덕과 기준 역시 새로운 환경과 충돌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19세기와 20세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러한 전환기에 파리의 물랑루즈는 문화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대중공간이었다. 모든 설치기구들은 신기하고 낯설었으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물랑루즈는 일탈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소 선정적인 일탈의 공간이면서 게토 역할을 하는 장소로,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무대로 채워졌다.  
물랑루즈는 고급스럽지도 않고, 우아한 장소도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자본, 생존이 버무려진 진창의 장소다. 철저히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졌다. 거대한 풍차를 건물 전면에 배치한 것부터 이곳이 쉬운 장소라는 것을 상징한다. 우아한 권위주의의 위선을 가릴 필요 없이 정직한 욕망을 전면에 배치했다. 모든 디자인이 환상적인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제작됐다.

자료=(주)프레인글로벌

물랑루즈는 노골적인 성적 자극을 마다하지 않는 새로운 쇼들로 대중들을 현혹시켰고, 은밀하게 숨겨왔던 인간의 욕망을 조금씩 해소시켜줬다. 파리는 유럽 문화와 엘리트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한편으로는 B급 문화가 자유롭게 전개되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아무튼 성적 일탈을 허용함으로써 서로 다를 것 같은 극단의 문화들을 자극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다양한 문화들은 오랜 시간 여러 전통과 역사를 다듬어온 파리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직접 발레를 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던 태양왕 루이14세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고, 고급 정부들이 정치와 권력 한복판에서 활동하던 파리의 살롱문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건축으로 볼 때 다양하고 개방적인 문화적 배경을 간직한 파리는 좋게 말해서 낭만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퇴폐적이다.
물론 파리라는 도시에서 로맨틱한 감성적 이미지를 빼놓을 순 없다. 파리에서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좋은 의미에서의 여성적인 이미지를 느끼는 것은 서구인들 역시 비슷한 것 같다.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이미지가 그러하다. 물랑루즈는 이런 파리의 B급 감성이 오랫동안 펼쳐질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곳으로, 다양한 영화나 문학작품, 그림 등에서도 활용됐다. 영화 ‘물랑루즈’에 드러난 파리의 이미지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자료=(주)프레인글로벌

19세기 말엽 세기말 징후가 충분한 파리의 극장 안. 화려한 의상과 농염한 자태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끄는 무희이자 고급 매춘부인 샤틴이 무대에 등장한다. 그녀의 마법 같은 매력에 수많은 남성 팬들은 열광한다. 시골뜨기 젊은 시인인 크리스티앙 역시 그녀를 보고 넋이 나갔다. 영화는 신분과 상황 설정을 통해 아슬아슬한 남녀 간의 통상적인 사랑이야기로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욕망이 교차되는 설정은 뻔한 사랑이야기다. 새로울 것 없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비극이다.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랑과 상대방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여러 장르에서 교과서처럼 다루는 설정 아니던가. 그런 영화의 뻔함을 영화 ‘물랑루즈’는 다양하고 풍부한 화면 구성과 리드미컬한 진행을 통해 새롭게 보여줬다. 더불어 19세기 시대 파리에 깃든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도시를 재현해냈다. 등장인물의 직업과 19세기의 세기말적 풍경은 퇴폐적인 환경을 제공한 갑작스런 경제적 풍요와 모순, 당시의 문란했던 성적 환경을 드러낸다. 
이 시대엔 새롭게 등장한 자본가라는 기득권 계층과 아직 정립되지 않는 기업윤리의 폐해가 가득했다.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몸이 전부인 여자와 심성이 전부인 남자의 만남은 이미 비극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쉬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감정만큼은 충분히 열정적이었다. 영화는 이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다. 뮤지컬 영화이기에 남녀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들은 익숙한 팝송들의 연속이다. 다양한 팝송들의 연속적인 구성은 영화 내용과 기막히게 이어지고, 두 사람의 재회와 헤어짐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된다.
영화를 만든 바즈 루어만 감독은 이미 전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현란하고 화려한 팝송이 어우러진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의 전력은 ‘물랑루즈’에서도 나타나는데, 화려한 화면 구성이 마치 회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살바도르 달리의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화면과 화려한 색채는 바로크적 장식들과 더불어 영화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 영화와 관련된 글들을 보면 실제 물랑루즈에 살았던 불운한 화가 로트렉이 거론되곤 하는데, 영화의 분위기와 흐름은 그의 이미지와 왠지 자연스럽게 이어지진 않는다. 그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은 것은 그의 실제 삶이 무척 암울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의 진행과 구성에서 지독히 키치적인 접근성과 팝아트적인 분위기를 물씬 느낀다. 앤디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 또는 앞서 언급한 달리의 이미지가 더 강한 영화다.

물랑루즈가 있는 몽마르뜨 지역은 파리에서 비교적(?) 가난한 빈민 계층 거주지와 인접한 탓에 그다지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다. 관광가이드만 보더라도 이 지역에 대한 경고(소매치기 같은)가 있을 정도다. 이러한 배경은 영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시각적 키치적 구성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굳이 우아하거나 지적으로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마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에 바탕을 둔 아름다움. 싸구려 반짝이로 만든 화려한 의상들은 과장됐고, 오히려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을 강조하고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샤틴 같은 무희들을 향한 대중들의 열광은 인간에 대한 진정한 감동이 아니라 단지 성적 대상에 대한 흥분인 것이다. 당연하게 무희의 기쁨과 웃음 이면에는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슬픈 생존의 현실이 숨어 있다. 비록 영화가 비토리오 데시카 감독 같이 사실주의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현실을 인식하고 드러내기는 한다. 다만 현실의 냉정함을 잊을 수 있는 마치 마약 같은 환상적 이미지들로 영화를 구성했다. 영화의 공간 역시 싸구려 반짝이와 가짜 보석들로 즐비하게 장식한 무희들처럼 온갖 장식들로 치장돼 있다. 기능을 중심으로 한 단순하고 절제된 공간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치장된 공간,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장식들의 공간이다. 자극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것 중 하나가 키치라고 한다면, 영화를 가득 메운 화려한 이미지들은 ‘단지 아름다움을 체험했다’ 정도의 막연한 느낌으로 대중에게 만족감을 준다. 

 

자료=(주)프레인글로벌


서울에서 한 시간 미만 반경에 있는 소위 수도권으로 지칭되는 영역으로 나가면, 우리는 다양하고 직설적인 풍경의 ‘카페(?)’ 상업공간을 볼 수 있다. 지난 90년대에나 볼 법한 디테일과 규모면에서 과감하게 생략된 피라미드, 버섯, 유럽 성 등의 모양이 마치 초등학생의 작품처럼 들어서 있다. 가치와 의미, 본질은 사라지고 막연한 형상들만 남은 그것들은 단지 기호로서 하나의 사인으로서만 존재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볍고 독특한 경험을, 말초적 자극에 관한 추억을 제공하는 입체적인 기억물일 뿐이다. 그 형태적 가치와 수준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대중들에게 편하고 쉽게 다가간다. 영화 ‘물랑루즈’의 한계가 바로 이 지점과 비슷하기도 하다. 물론 ‘물랑루즈’의 디자인적 배경이 보다 세련됐지만 두 가지 모두 내용에 있어서 너무 가볍게 대상을 다룬다. 그것은 우리 도시에서 쉽게 버려지고 잊혀진 도시와 유사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이유와 목적으로 서울 변두리에 지어진 건축들이 90년대를 거쳐 2000년, 2010년을 지나 수십 년 사이에 직설적인 모습들을 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나 범선 카페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 더 세련되고 우아한 건축적 미학을 드러낸 새로운 상업건축들이 들어섰다. 이런 변화는 해외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은 과거엔 수준 낮은 포장술에 가까운 디자인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의 경험치가 쌓이면서 조악한 흉내내기 디자인에 싫증을 냈다. 결국 이 디자인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세계 각국의 건축적 판타지를 재현하는 테마파크로 재구성됐다. 더 화려하고 직접적인 구성은 사람들을 자극하고 끌어 모았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적 원작을 흉내내는 아류에 대한 식상함에 질린 사람들이 발길을 끊자, 이곳은 스스로가 본격적으로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적 외형뿐 아니라 공간에 이어 이벤트까지 이어졌다. 다니엘 리베스킨트나 프랭크 게리가 참여한 건축들이 들어섰고, ‘태양의 서커스’ 같은 팀들이 그곳에서 새로운 쇼를 선보였다.
이런 상업적 흐름을 보면, 문화라는 것도 결국 대상의 인식에 따라 반응하면서 선택되는 것이다. 그 결과 상업적 공간이 나타나고 도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도시의 수준은 결국 그 장소,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준이리라. 따로 노는 따로 국밥이 아니라 하나 되는 비빔밥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우리 도시의 건축적 수준 역시 결국 그 도시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시민들과 의사 결정권자들의 수준인 셈이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