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8. 09:07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ello, Inca 03
Trekking in Machu Picchu, a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잉카 제국의 날개, 피삭
성스러운 계곡 투어의 시작점인 피삭은 쿠스코에서 동북쪽으로 32km정도 떨어진 우루밤바강에 자리한 마을이다. 잉카 제국의 식량 창고 영역인 성스러운 계곡은 우루밤바강을 품고서 북으로는 베로니카산(5,680m)과 사우라시라이산(5,818m)을 등지고 남으로는 모라이, 마라스, 친체로 곡창 지대를 두르고 있다.
오늘날 피삭 마을은 에스파냐 정복 군대가 통제하기 쉽게 들판 한가운데 새로 조성한 곳이다. 잉카 제국의 심장이 쿠스코라면 날개는 우루밤바강을 따라 펼쳐진 거대한 농경지다. 잉카인은 마추픽추를 휘감고 돌아가는 우루밤바강을 은하계의 거울이라 믿으며 하늘의 강이라고 불렀다. 이 강을 따라서 잉카인이 다양한 종교적 시설을 세운 이유는 이곳 일대가 제국을 먹여 살리는 곡창 지대였기 때문이다. 해발 3,000m에 이르는 고산 지대에서 성스러운 계곡만큼 기름진 평야는 없었다.
성스러운 계곡은 강변의 평평한 옥토뿐 아니라 강 연안의 산비탈까지 석축을 쌓아올려 계단식 경작지를 개척했다. 테라스 가장 아래쪽에 큰 돌을 놓고 그 위로 작은 돌을 쌓아올린 후 그 속에 자갈, 모래, 마지막으로 흙을 채워 농경지를 만들었다. 빗물이 계단식 테라스 토양 속으로 잘 스며들어 농사짓기에 편리했다.
토양을 비옥하게 하려고 쿠스코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에서 새의 배설물인 구아노를 가져다 흙과 혼합해 퇴비로 사용했다. 청정 지역을 유지하기 위해 가축이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고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경작했다. 철이 아닌 나무를 깎아 만든 쟁기의 일종인 농기구를 사용해 땅을 파고 씨앗을 뿌렸다. 오늘날에도 산간 마을의 인디오는 발판부터 손잡이 모양까지 수천 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은 기구로 농사를 짓는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사람의 손으로 친환경 작물을 재배하기에는 계단식 경작지가 안성맞춤이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 윗부분 산등성이에 기대있는 형태의 피삭 유적지는 크게 상부와 하부로 나뉜다. 테라스가 거대한 소쿠리처럼 박혀 있는 상부 유적지다. 계곡을 따라 오목한 계단식 테라스 위쪽으로 난 길을 10분 정도 걸어가면 가파른 언덕 위로 망루처럼 솟은 유적지가 나온다. 상대적으로 조악한 마름돌쌓기로 쌓아올린, 그 자체로 신전의 모습이다. 가파른 계단을 20분 정도 올라가자 계단식 테라스가 한눈에 굽어 보이는 전망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피삭 유적지의 장관은 하부 계단식 유적지의 정상에 있다. 상부 계단식 테라스 위로 난 서남쪽 절벽 길을 따라 작은 동굴을 지나치자 한눈에 들어온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 슬아슬한 길을 따라 20분 정도 내려가자 인티우아타나(태양을 잇는 기둥)로 불리는 태양 신전이 나타난다. 쿠스코 코리칸차의 정교한 돌쌓기 만큼이나 정밀한 잉카 신전 유적지가 산등성이에 누워 있다.
붉은 화강석이 기하학적 배치로 놓인 신전은 남북 방향으로 축을 유지하고 있다. 기하학적 평면의 중앙에 자연석을 둘러싼 인티우아타나의 돌기둥은 허물어져 본래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나머지 벽체는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각각의 공간을 장방형으로 나누었다. 마추픽추 피라미드 상부에 있는 인티우아타나처럼 이곳의 인티우아타나도 태양의 절기를 측정하는 천문관측소로 추 정된다.
잉카인이 중요한 농경지마다 천문관측소를 하나씩 설치해 절기와 때를 정확하게 확인했다는 증거다. 정교하게 마름질한 돌로 빈틈없이 쌓아올린 인티우아타나. 정교한 돌 블록이 마치 공장에서 마감한 듯 보인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각각의 공간을 에워싼 벽체는 모두 사다리 꼴로 반듯하고, 출입구 너머로 벽면의 사다리꼴 벽감은 자로 잰 듯 정교하다. 높은 언덕 위에다 치밀하고 정교한 돌쌓기를 했다는 것은 이곳이 잉카 시대에 신성한 도시였다고 말해주는 증거다.
쿠스코는 지상의 신 퓨마의 형상으로, 피삭은 콘도르의 형상으로, 오얀타이탐보는 야마의 형상으로, 그리고 마추픽추도 콘도르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한다. 피삭 유적지를 작은 마추픽추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인티우아타나 유적 때문이다.
마추픽추의 인티우아타나처럼 피아노 크기 만한 지주석 위의 돌기둥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위용만은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상부 테라스 정상에 있는 망루 유적지를 콘도르의 머리라고 볼 때 하부 테라스 경작지 상부에 있는 인티우아타나는 콘도르의 가슴에 해당한다.
애틋한 전설이 숨어 있는 오얀타이탐보
피삭 유적지를 벗어난 버스는 성스러운 계곡을 따라 덜컹거리는데 창 밖은 절경이다. 잉카 시대에 신성한 강으로 불리던 우루밤바강이 오랜 세월에 걸쳐 거대한 협곡에 옥토를 실어 날라 넓은 평야를 선물했다. 신성한 계곡이 구불구불 넓은 평야 지대를 길게 안고 나타난다.
또 한참을 덜컹거리고 나서야 마주보고 있는 가파른 두 산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오얀타이탐보가 나타났다. 오얀타이탐보는 1536년 망코 잉카(1515~1545)가 이끄는 잉카 저항군이 쿠스코를 공격한 후 이곳으로 이동해온 피사로의 에스파냐 정복 군대를 크게 무찌른 곳으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이곳은 잉카의 곡창 지대인 성스러운 계곡을 지키는 요충지로서 쿠스코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쿠스코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 도시인 오얀타이탐보까지는 곧장 도로가 연결됐기 때문에 지배층이 많이 살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쿠스코에서 오얀타이탐보로 버스나 자동차로 이동해 유적지를 돌아본 다음 기차를 타고 마추픽추로 향한다. 3박 4일의 정통 잉카 트레킹도 여기서 장비를 마련하고 출발한다.
오얀타이탐보는 잉카 시대부터 쿠스코와 마추픽추와 피삭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였다. 탐보는 잉카 시대의 역찰을 가리킨다. 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와 칠레 북부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지배한 잉카 제국의 주요 길목을 지키던 곳에는 어김없이 탐보가 있었다. 그곳에서 낮에는 소라로 만든 푸투투와 거울로, 밤에는 봉화를 이용해 통신했다.
이곳에 얽힌 애틋한 전설이 하나 있다. 오얀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 오얀타이는 역찰을 지키던 성주였다. 인티라이미 기간에 오얀타이는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두 사람은 왕족끼리만 결혼해야 하는 잉카 법에 따라 결혼할 수 없었다. 공주는 쿠스코의 감옥으로 보내지고 귀족 신분이던 오얀타이는 지금의 오얀타이탐보로 피신했으나 쿠스코에서 달려온 군사에게 곧바로 체포됐다. 하지만 이들의 애틋한 사연을 들은 잉카 왕은 두 사람을 사면해 신방을 차려주었다고 한다.
오얀타이탐보는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열린 작은 계곡을 마주 보며 동서로 솟아오른 산줄기 사이에 잉카의 유적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 돌출한 산줄기에 층층이 걸린 테라스 사이로 신전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날아오를 듯 놓여 있다. 절벽 위 성벽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군데군데 있는데, 그것을 ‘니초’라고 한다. 에스파냐 정복 군대가 이 성벽을 허물고 그 기초 위에 중세식 건물을 지은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자리한 오얀타이탐보는 잉카 시대의 성곽 도시로, 거대한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안덴’이라는 계단식 밭이 층층이 건설돼 있다. 가파른 산비탈에 건설한 열일곱 개의 계단식 경작지를 따라 오르면 그 정상에 거대한 돌로 만든 태양 신전이 신성한 계곡을 굽어보고 있다. 잉카 시대 마을을 관통하는 석조 관개 시설과 뉴스타(태양의 처녀라는 뜻)의 목욕탕에는 여전히 맑은 물줄기가 흐른다. 방어용 요새와 계단식 경작지 그리고 비상식량을 저장했던 창고가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으뜸은 테라스 상부에 자리한 태양 신전이다.
테라스 상부에는 여섯 개의 태양 신전 벽이 기념비처럼 꼿꼿하게 서 있다. 거석 여섯 개가 15도 경사로 기울어져 있고 돌과 돌 사이를 요철 모양으로 가는 돌을 깎아 붙여 거대한 수직 돌과 돌 사이를 띠처럼 기워 놓은 흔적이 있다. 돌 하나의 무게만 40톤에 이르는데 모두 6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이곳 정상까지 옮겨온 것이다.
어떻게 그 큰 돌을 이곳까지 끌어왔을까. 말과 소도 없고 바퀴도 없던 시절에 통나무 사다리를 이중으로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육중한 바위를 얹은 뒤 수많은 사람이 줄을 당기고 지렛대로 밀어서 운반했을 것이다.
최근 쿠스코의 한 축제 때 이러한 방법을 재현해보았는데, 하루에 옮길 수 있는 거리가 겨우 몇 m에 불과했다. 거석에는 큰 돌을 옮길 때 끈을 매던 돌출 부분이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에스파냐 군대가 이곳에 쳐들어왔을 때조차 오얀타이탐보에서는 신전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유적지 정상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돌더미는 공사가 갑자기 멈추어진 사연을 숨기고 있다.
과학적 실험 정신이 새겨진 모라이
모라이, 마라스, 친체로는 성스러운 계곡의 우루밤바강을 북쪽에 모자처럼 눌러 쓰고 남서쪽 황무지 벌판에 줄지어 서 있다. 쿠스코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모라이 유적지는 마라스 에서 서쪽으로 9km 정도 떨어진 넓은 언덕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다.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 아래 동심원 테라스가 층층이 박혀 있다.
붉은 들판을 가로지르자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처럼 절벽 아래 작물 시험 경작지가 기하학적 모양의 분화구처럼 누워 있다. 잉카 제국을 유지하는 첫 번째 요소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것 이며, 그 다음이 종교적으로 통합하고 군사적으로 무장하는 것이었다.
모라이 유적지는 잉카 시대의 종묘개량연구소라고 할 수 있다. 동심원 모양의 계단식 테라스가 마치 우주선 기지처럼 기하학적 모습으로 있다. 해발 3,000m 고원 지대의 척박한 땅에서 잉카의 신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던 비밀의 열쇠가 숨어 있는 곳이다. 제국의 건설은 물리적 영토 확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민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제국의 생존 조건이었다. 황량한 고원 지대에서 최대한 많은 작물을 수확해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로마의 원형극장을 닮은 계단식 경작지는 크게 네 영역으로 나뉘지만,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쪽 입구에 있다. 거대한 표주박 모양의 12층의 계단식 경작지 안에 마치 분화구가 놓여 있는 것 같다. 우주인이 칼로 태양을 담을 그릇을 정밀하게 조각해놓은 모습이랄까.
태양의 눈을 닮은 모라이 유적지에는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다. 원래부터 분지인 곳에 계단식 테라스를 만들었다고 치더라도 우기에 빗물이 모이면 남은 물은 흘려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배수로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인위적인 배수 시스템은 없었다. 그 대신 원형 구조물의 지하에 천연 동굴이 있다.
잉카인은 모라이 종묘개량연구소에서 대지의 고도와 방향에 따라 태양 빛이 상호 작용하는 모든 원리를 실험했다. 태양을 닮은 둥근 형태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햇빛을 받는 조건을 수용하기 위해서다. 안데스의 모든 장소와 대지의 조건을 원형 테라스 안에 옮겨놓은 것이다. 거대한 동심원의 분화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잉카의 정신 세계와 닿아 있다. 동심원 테라스의 높 은 곳과 낮은 곳의 온도 차이는 15도 정도라고 한다. 대지나 해수의 온도가 1도만 높아도 생태계는 엄청나게 변한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동심원 테라스 속에 하늘의 이치에 따라 땅의 조건에 맞는 농경법을 개발한 잉카인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잉카인은 씨앗을 적당한 테라스에 맞추어 심고, 차차 위쪽으로 옮겨가며 추위와 같은 다양한 조건에 적응시켜 품종을 개량했다. 지금도 페루의 감자가 3,000종이 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적으로 설계된 테라스는 빗물을 흡수하고 내뿜으며 전체 대지를 고루 적시고 남은 물은 지하의 천연 동굴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됐다. 각 층은 대략 사람 키 정도의 높이인데, 5도 정도 기울어지게 석벽을 쌓아 마감했다.
각 테라스를 이동할 때는 석벽에 사선으로 설치된 돌출 계단을 이용한다. 사람이 내려가고 올라오는 모습이 거대한 장치 속에서 유영하듯 몽환적이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동심원이 반복돼 심리적인 안정감과 동시에 태양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동심원 속으로 들어갈수록 신성한 공간으로 진입하는 긴장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러한 긴장과 부드러움은 신전에서 느끼는 일종의 경외감과 닿아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은 대부분 가장 아래쪽 원의 중심 공간으로 시선이 모아지며 그곳에서 직감적으로 태양의 기운을 느낀다. 실제로 잉카인은 거대한 동심원의 중심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믿었다. 해마다 8월 1일이면 이곳에서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에게 감사를 드리는 농경 의식인 와타칼랴 축제가 열린다. 잉카의 전통에 따라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8월에 파차마마에게 각종 제물을 바치며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층과 층 사이를 연결하는 4단의 돌출 계단은 현대 건축사가 즐겨 쓰는 노출 콘크리트 캔틸레버(한쪽 끝이 고정되고 다른 끝은 받쳐지지 않은 상태로 되어 있는 보) 계단보다 천 배는 더 운치있고 아름답다.
잉카 문명과 그리스도가 만난 친체로
친체로는 마라스의 동남쪽 우루밤바강 남쪽 언덕에 위치한다. 쿠스코에서는 28km 정도 떨어져 있다. 잉카 시대의 식량 창고이자 거점 도시로서 신전이 있었던 친체로는 동서 방향으로 길게 펼쳐진 거대한 농경 테라스 남쪽 언덕에 우뚝 자리한다.
잘 정비된 잉카의 옛길을 따라 언덕에 올라서자 세 개의 하얀 아치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위로 붉은 오지기와지붕을 쓴 친체로 성당이 앉아 있다. 직사각형 광장의 입구를 따라 원주민이 형형색색의 잉카 전통 수제 품을 팔고 있다. 일요일에는 성당에서 케추아어로 미사가 진행되고 미사가 끝난 뒤에는 광장에서 원주민 시장이 크게 열린다.
이곳 성당은 쿠스코의 주요 건물과 마찬가지로 잉카의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세운 것이다. 성당 내부는 잉카 원주민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검푸른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박공 아래 아치 속에 자리한 재단과 그 벽에 그려진 이미지는 모두 지진의 신이라 불리는 검은 피부를 가진 예수나 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미지 속 인물은 모두 잉카 원주민의 형상이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성당 밖에 세워진 돌 십자가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세워진 장식 없는 십자가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잉카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십자가 상 아래 네 겹의 돌 기단은 잉카인이 대지의 어머니 신으로 섬기는 파차마마의 상징이며, 십자가 한가운데는 잉카의 상징인 태양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조각과 그림은 그리스도교와 태양신이 융합된 싱크리티즘의 흔적이다. 잉카인은 그들의 문화 위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마치 잉카의 석벽 위에 그리스도교의 성소를 지었듯이.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 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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