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실업,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20.9

2023. 1. 19. 09:06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I, Daniel Blake’, Urban unemployment

 

지난 200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언급하듯이 거의 총알 속도 수준으로 시대가 변화해왔다. 기술의 발달은 문화와 사회를 바꾸었다. 이런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건축과 도시는 변화에 대응하면서 진화가 아닌 창조에 가깝게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19세기 말에 발명된 영화의 세계들을 보면 매우 다양한 시각과 내용을 보여준다. 판타지부터 공포까지,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한다. 영화를 찾아보는 많은 사람은 현실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대리체험을 원한다. 영화가 현실의 고난과 어려움을 잊기에 딱 좋은 몰입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맨틱한 영화 속 주인공이 ‘나’일 확률은 거의 없다. 어느 날 왕자를 만나거나 로마의 휴일처럼 일상을 체험하려 변장한 ‘공주’를 만날 일은 더더욱 없다. 당연히 기계 인간의 추격을 받을 일도 없고, 수백 년 전 사라진 김유신이 눈앞에 나타날 리 만무다. 그렇지만 영화는 상상하는 그 모든 것을 눈앞에 보여주고 2시간을 몰입하게 만든다.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꿈처럼 일상을 기억하지 않아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없다고 해서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우리가 만나야 하는 곳이고, 극복하거나 함께 해야 하는 배경이다. 종종 어떤 영화들은 지독히도 냉정할 만큼의 차가운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애써 외면하거나,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오늘의 세상을 만나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곳에도 나와 같은 인간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문제는 나와 같은 인간은 누구냐 하는 점이다.
과거에는 어려운 사람, 또는 서민이나 노동 계층적 입장에서 바라보던 온건한 시각들이 어느새 정치적 주제가 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진영 논리의 중심을 차지한 것도 오늘이다. 이른바 좌파라는 시각이다. 물론 사람들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려고 하는 시각도 인정하지만, 적어도 어려운 사람에 대한 손 내밂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의 건강함을 만들어내는 저력이기도 하다.

 

© 영화사 진진


일찍이 서구에서는 이런 건강함을 유지하기 위한 시선이 존재했다. 왜냐면 산업화는 반드시 소외된 계층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봉건 사회는 더 심했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이런 손 내밂이 무척 약한 나라다. 정책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취약계층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도 약하고, 이에 대한 인식도 약하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6, 70년 이전에는 모두 경제적 취약계층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에서 뒤쳐진 이들에 대한 시선은 아쉽게도 달리는 열차에 올라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학력이 되었건, 인맥이 되었건, 그들의 노력이 되었건 말이다.
우리보다 조금 먼저 산업화를 이룬 유럽, 특히 산업혁명의 시작점인 초 시장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시장자본주의 이론이 태동하고 성장한 국가에서 엉뚱하게도 사회복지 개념이 가장 크게 성장했다. 그래서 일찍이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될 때 가장 기득권이었던 영국 왕족들이 나섰다. 혹자는 치열하지 않음을 비판하고, 우아한 위선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야말로 가장 손실이 적고, 점진적이지만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덕분에 서민주거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공공 개념의 주택들이 공급될 수 있었다. 영국이 비록 공공 임대 주택 비율이 북유럽에 비해서 낮다고 하지만, 절대치로 보면 절대 낮지 않고 역사 또한 길다. (2017년 자료를 보면 덴마크 같은 북유럽 국가들의 공공 임대 주택 비율은 36% 안팎이고, 영국은 16~17%대를 이룬다. 하지만 기네스 맥주 같은 민간 기업들의 복지 재단들을 합치면 실질적 공공임대 비율은 더 높다.)
이런 시도와 노력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나타난다.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를 위한 주택부터 세계 1, 2차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위한 주거지 등이 공급됐다. 왜냐면 주거 복지야 말로 사회 안전망 구축에 가장 중요한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변화와 배려에서 소외되는 계층들이 생겨났다. 편하게 말해서, 재수 없으면 그 배려나 혜택의 틈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항상 차상위 계층의 소외가 문제가 된다.

© 영화사 진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바로 이런 소외된 노동자의 이야기이며, 중요한 공간이 나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배경은 뉴캐슬이라는 영국 산업혁명의 중심 도시다. 일찍 산업 혁명이 시작된 만큼 도시 곳곳엔 이런 과거의 흔적들이 스며들 듯 남아 있다. 본래 이름은 뉴캐슬 어폰 타인(Newcatsle upon Tyne)이며 석탄 시대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다. 석탄은 산업 혁명의 중심재료로 석탄 산업은 영국에서 거의 백 년간 핵심 산업의 하나이자 수많은 근로자들의 생계를 이어준 산업이었다. 또 다른 영화 ‘빌리 엘리어트’ 역시 구조 조정을 겪는 탄광 지역 내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런 영화들은 이념적 시각을 갖지 말고 그대로 봐야 한다. 켄 로치는 어떤 동정도, 감상도, 또는 계몽도 아닌 다큐처럼 영화를 촬영했다.
을씨년스러운 영국 중소 도시 풍경이 고스란히 배경으로 나온다. 로맨틱한 영화 노팅힐처럼 그 곳은 따뜻하지도, 예쁘지도 않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엉뚱하지도 않다. 제도적으로 소외된 작은 인간의 황망함에 도시마저 황량해지는 느낌이 든다. 실제 비구름이 가득한 영국 북부 도시들 풍경은 이 영화와 같다. 한여름 구름이 낀 날에 경험한 뉴캐슬 어폰 타인이라는 도시가 딱 그랬다. 물론 어느 도시던 구름 낀 날에 아름답게 보이기는 힘들겠지만…….
영화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늙은 목수 다니엘은 결코 부드럽고 따뜻한 매력 있는 인물이 아니다. 삶의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 평범한 소시민이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가끔 복지를 비판하는 매체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 쉽지 않다. 온갖 절차가 하나 둘 가로막고 있어 늙고 소외된 다니엘은 분노한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해서 제대로 서류 접수 하나 하기 어려운 다니엘. 너무 빨리 바뀌는 사회 시스템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완벽한 IT 열외자다.
그가 살아온 삶은 화려하거나 똑똑한 엘리트의 삶은 아니었지만, 손으로 직접 일을 하면서 땀을 흘리며 가정을 꾸리고 성실히 살아가는 자존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는 그런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 시대는 아날로그의 낮은 속도감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에는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가가치 높은 일을 하는 이웃들이 있다. 다니엘은 밀반입해서 비싼 가격에 스포츠화를 파는 행위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컴퓨터로만 접수하는 시스템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동병상련을 느끼며 만난 젊은 미혼모 케이티 덕에 다니엘은 그들이 꽉 막힌 사회 시스템에서 소외된 힘없는 사회적 약자임을 절실히 느낀다. 그렇지만 그들은 끝없는 희망과 소망의 길을 선택했다.
물론 그들이 만나고 분노하는 대상들 역시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 사회 부조리를 논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그것도 낮은 수준의 감상평이라 하는 것 같다. 영화 속 미혼모 케이티의 어린 딸 데이지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이 영화는 냉정한 현실과 소외된 계층의 내면 깊숙한 분노와 화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누구도 소외될 수 있고, 우월감을 갖지 말라는 경고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영화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의 사망 후, 그가 타인에게 가졌던 관심과 애정을 발견하면서 진정한 이야기를 한다. 데이지가 한 말,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겠다는 말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선린과 이해다. 받았기 때문에 준다는 당연한 명제. 그것은 우리 인간의 욕망이면서 동시에 긍정성의 결과가 한마디로 압축된 다의적 표현이다.

© 영화사 진진


다이엘와 케이티가 만나는 절벽 같은 상황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그런 시스템들이 본연의 태도인 약자를 도와야 하는 핵심을 빼버리고, 처리해야 할 업무라는 기계적 궤도로 되어 있다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실업급여는 필요한 실업자에게 주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 아닌가? 컴퓨터로만 하고, 정해진 날에만 가능한 시스템은 핵심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문득 우리 건축은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복지의 중심 한 가운데에 건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오랜 갈등의 시간을 겪은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이제 출발한지 얼마 안 된 복지로서의 건축 개념을 가지고 있다. 더 정확히는 주택인데, 복지 목적의 주택은 바로 공공주택이다. 공공 임대 주택이 건축의 사회적 목적물이다. 그리고 공공임대 주택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공공 임대 또는 공공주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냥 공급되어선 안 되고, 누가 거주할 건지, 어떻게 거주할 건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매력적인 공간으로, 진지한 고민의 성과물로서 공공주택이 만들어져야 한다.
단지 숫자 얼마를 채우기 위해, 만드는 영혼 없는 콘크리트 더미가 아닌 진짜 삶을 영위하는 공간으로서 공공임대 주택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했다’가 중요한 사회가 아니다. ‘어떻게 했다’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웃과 소통의 공간이 되기 위한, 소외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곳에 거주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36%의 공공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덴마크와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보여주는 건축 정책의 성과들을 보면, 하나같이 새롭게 시도된 모험 가득한 건축 작품들이다. 한발 더 나아가 프랑스는 이런 공공주택들을 중요한 문화 상품화와 국가 경쟁력 도구로 활용한다. 장누벨이나 포잠박 같은 프랑스 건축대가들을 위시해서 최근에는 젊은 도전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단순히 무탈한 임대주택을 짓는 것이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건축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 사회적 공공주택을 완성하는 정책에 주목한다. 단지 수량 맞추기 위해 생산해내는 국내 공공 주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영화 ‘나, 다니엘 플레이크’는 비록 건축이나 공간이 중심이 된 영화는 아니지만 사람에 대해 어떤 시선을 둬야 하는지 새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영화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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