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건축 08화성 장안문(長安門) 2020.9

2023. 1. 19.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Immortal architecture 08
Janganmun, Hwaseong Fortress

 

 

화성성역의궤 : 화성전도(1801)=고려대학교

 

건축법에서 재축(再築)이란 ‘건축물이 천재지변이나 그 밖의 재해(災害)로 멸실된 경우 그 대지에 다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신축, 재개발, 재건축 등 새로 짓는 것이 건축의 주류인 상황에서 재축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건축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18세기 말 조선. 정조(1756∼1800)는 영조(1694∼1776)에 이어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고 있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며, 왕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신도시를 만들도록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경제 기반형 자족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일인 셈이다. 왕이 비전을 제시했으니, 실행할 적임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조는 이 일을 정약용(1762∼1836)에게 시킨다. 어명이니 전공 불문 이유 막론하고 정약용은 도시계획과 건축계획에 착수한다. 이때가 1790년이니 당시 정조는 34세였고, 정약용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어명을 받은 정약용은 신도시 계획을 2년 만에 수립하고 1792년 정조에게 계획안을 제출한다. 여기에는 도시계획, 성곽 계획 그리고 개별 건축물의 계획까지 정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지금으로 치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이거나 대학원 연구생 정도의 나이였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한다. 정조의 승인을 받은 정약용의 마스터플랜과 건축계획 그리고 시공계획을 바탕으로 1794년 1월 수원화성 건설이 착공된다. 그리고 2년 7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796년 9월 완공된다. 28세의 정약용이 계획한 것도 놀랍지만, 그 계획을 바탕으로 33개월 만에 축조된 것이 더 놀랍다.

 

화성성역의궤 : 장안문 외도(1801) 수원화성박물관



33개월간의 축조 과정은 모든 것이 세세하게 기록되었다. 도시 전체를 보여주는 ‘화성 전도’를 비롯하여 ‘장안문’, ‘팔달문’ 등 주요 건축물의 내·외부 모습이 도면으로 표현되었다. 성곽을 구성하는 각종 문루, 노대, 치성, 포루 등의 모습과 축조 방식이 담겨있고, 거중기, 설마 등 각종 기계의 도면과 해설을 싣고 있다. 사용된 재정의 조달과 지출내역, 공사에 들어간 물품의 수량과 단가, 투입된 장인의 명단과 근무일수 및 담당업무, 수당까지 기록되어 있다. 각종 건축 용어를 이두로 표기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이러한 영건의궤는 지금의 건설지와 같은데, 수원화성의 것은 영건의궤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고 한다. 의궤의 간행은 축조를 마치고 5년 뒤인 1801년 9월에 이루어진다. 「화성성역의궤」는 대한민국 보물 제1901호로 지정되었다.

 

장안문 주변 옛 사진a
한국전쟁 중 장안문(1950)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장안문 주변 옛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전쟁 중 장안문(1952) 수원박물관
장안문 주변 옛 사진
한국전쟁 중 장안문(1952) 경기대학교 박물관
허물어진 수원화성의 동북공심돈(1967) 수원시박물관사업소 소장
장안문 배면(1967) 수원시박물관사업소 소장



수원의 화성(Hwaseong Fortress)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화성은 등재기준(ii)과 (iii) 2가지를 충족하고 인정받았다. 간단히 인정 내용을 살펴보자. 기준(ii)에서는 축조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기존 성곽은 물론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수원에 가장 적합한 성곽 양식을 만들어 낸 것을 중요하게 보았고,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가치가 인정받았다. 기준(iii)에서는 기존 우리나라 성곽들이 산마루에 축조되었던 것과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된 점이 주요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에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사회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주는 새로운 양식이라는 점이 가치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가치를 설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새로 복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건축물들이 어찌 문화재적 가치가 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래됨 이면에 있는 내용적 가치의 중요함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화성은 크게 훼손되고 파괴되어 사라지고 있었지만,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건설기간 보다 2배의 기간이 소요된 화성성역의궤의 꼼꼼한 기록 덕분이 아니었을까? 덕분에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가치와 우수성을 인정받아 복원과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가서 아름다운 모습과 역사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항상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폐허 직전에서 구사일생한 화성의 파괴와 재축의 과정을 살펴보자.

 

서장대 방화 현장(2006) 수원소방서

 

서장대 방화 현장(2006) 연합뉴스

1922년 수원에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홍수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남수문이 유실되었고, 90년간 복원되지 못한다. 35년간 일제강점기 기간에는 한양도성과 마찬가지로 화성의 성곽이 조금씩 조금씩 해체되었다. 광복을 맞았지만, 생존의 절심함이 컸던 어려운 빈곤국가에서 사라진 왕국의 성곽을 복구하거나 관리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수원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치열한 전장이 되고 만다.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이 번창한 수원이었지만,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전쟁 중에는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던 것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다수의 사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2년 사진에는 서쪽 지붕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 잘려나간 모습이다. 큰 폭발로 한쪽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파괴된 장안문 앞에 소련제 탱크가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보면 수원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나머지 문루도 말끔하게 사라진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기간에 석재 기단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수원 화성은 1975년 장안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된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장안문의 실측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까지 확인된 사진자료와 화성성역의궤의 도면이 복구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화성성역의궤의 중요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조선에서 2년 만에 축조한 화성은 20세기 대한민국에서 20여 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복구된다. 신축보다 리모델링이 더 어려운 것은 현대 건축물도 마찬가지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1996년 정도가 되면 화성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되찾게 된다. 20여 년간 노력한 복원 결과를 바탕으로, 수원 화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준비를 가게 된다. 이때 주민의 부주의로 서장대에 화재가 발생한다. 성곽 주변을 살피고, 화성 내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팔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2층 누각 서장대 전체가 이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 다행히도 서장대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듬해인 1997년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화성이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도시의 확장과 증가한 인구 그리고 자동차를 위한 도로확장으로 현재의 도시상황에 맞추면서 복원과 관리를 병행해야 했다. 보존과 개발의 균형점은 언제나 풀기 힘든 방정식이다. 난해한 방정식에 매달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서장대 화재의 악몽이 되풀이되었다. 1996년 화재 이후 10년 만인 2006년에 서장대는 다시 화재 피해를 입는다. 이번엔 방화였다. 2층 누각에 오른 방화범은 불을 지르고 도주했고, 서장대의 2층 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2008년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기 2년 전의 일이다.

 

복원된 장안문


홍수, 일제강점기 훼손, 한국전쟁, 화재, 방화 등 수원 화성이 마주했던 파괴와 소실의 과정은 참담하다. 이런 화성의 역사는 수원의 역사이기도 하다. 수원은 역경을 딛고, 산업,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도시로 성장했다. 인구는 125만 명 정도로 울산광역시보다 많고, 대전광역시나 광주광역시 인구에 조금 밑도는 정도다. 18세기 말 정조가 꿈꾸었던 모습의 도시는 아니지만, 현대적 의미의 화려한 대도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상징하는 화성을 보전하고 관리하는 모습과 태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성은 조선에서 100년을 지내고, 혼란의 20세기 100년간 훼손, 파괴의 시기를 거쳐 기적처럼 부활했다. 역사를 이해하는 수원 시민들과 함께 수원의 화성이 불멸의 건축으로 남기를 바란다. 

 

복원된 수원 화성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 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 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2016년 젊 은건축가(문화체육관광부) 수상자이며, ‘얇디얇은집’으로 서 울시건축상(2019)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 겸 골목건축가이다.

shin@anlstudi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