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9. 09:07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ello, Inca 03
Trekking in Machu Picchu, a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마추픽추는 밀림으로 열린 잉카 제국의 식량기지 서쪽 관문으로 3박 4일 잉카 정통 트레킹으로 다가갈 수 있다. 살칸타이봉(6,271m)을 사이에 두고 남으로는 초케키라우(3,033m)가, 북으로는 마추픽추(2,430m)가 서쪽 밀림의 관문을 지키고 있다. 초케키라우가 아푸리막강을 두르고 있듯이 마추픽추는 우루밤바강을 두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차로 편리하게 마추픽추에 다가가지만, 정통 잉카 트레킹을 따라 마추픽추에 다가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도 많다. 케추아어로 왕의 길을 뜻하는 이 길을 따라 해마다 잉카 왕이 마추픽추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루트의 시작은 쿠스코에서 승합차로 오얀타이탐보에서 장비를 싣고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베이스캠프 칠카(2,793m)다. 우루밤바강을 가로질러 와이야밤바(3,060m)에서 첫 밤을 보내고, 죽은 여인을 뜻하는 공포의 와르미와뉴스카 고개(4,125m)를 지나 파카이마유(3,600m)에서 둘째 날을 보낸다. 룬크라카이 고개(3,998m)를 지나 사약마르카(3,600m)를 거쳐 위냐이와이나(2,630m)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이른 아침 해 뜰 시간에 인티푼쿠(2,650m)에 선다.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마추픽추를 바라보는 것이 모든 여행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마추픽추 정통 잉카 트레킹은 6개월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케추아어로 ‘왕의 길’을 의미하는 잉카 제국의 길, 즉 카팍 난이 그만큼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친체로를 지나 우루밤바로 내려설 즈음 절벽을 타고 도는 길이 심하게 구불거린다. 줄곧 우루밤바강을 따라 두 시간동안 덜컹거리다가 오얀타이탐보에 도착했다. 오얀타이탐보는 잉카 트레킹이 시작되는 유적지이자 마추픽추로 가는 첫 번째 기차역이 있어 언제나 여행자의 기대와 희망으로 설레는 곳이다.
숨은 장소에 있는 도시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는 오르막길에 나무 벤치가 나타나고 그 앞으로 수로가 넘칠 듯이 맑은 물이 흘렀다. 지나가던 말이 길게 목을 빼고 물을 마신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언덕길을 따라 걸었다. 우루밤바강을 밀어내고 산등성이를 오르자 지천으로 깔린 호박돌 사이로 오솔길이 거칠게 이어진다. 눈앞에 반듯한 평지가 나오자 앞서 가던 일행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반달 모양의 약타파타 유적지(2,850m)다. 쿠시차카 강줄기가 산허리를 감싸며 흐르다 우루밤바강과 만나는 삼각주에 놓였다. 곧바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건축가 책상 위에 놓인 모형처럼 선명하다.
잉카인은 까마득한 협곡 아래 강줄기를 따라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귀족의 주거지를 짓고, 유선형의 테라스를 만들었다. 반달 모양의 석축은 강줄기에 발을 딛고 선 퓨마의 발톱 모습이다. 잉카 장인에게 대지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생명이었다. 거대한 농경지를 하나의 대리석 판에 펼쳐놓고 섬세하게 조각한 모습이다. 산허리와 만나는 상부 테라스에는 집과 광장, 통로와 구조물이 반달 모양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곳이 단순한 촌락이 아니라 주요 농산물의 생산과 집하를 관리하는 신성한 장소였음을 증명해준다.
약타파타 유적지는 테라스 상부의 주거지와 강 연안의 테라스 모두 대지의 곡선 형태를 존중해 건설돼 있다. 테라스 상부의 주거지는 마당 혹은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싼 형태다. 출입구는 마당을 향해 열려 있지만 창문은 잉카인이 신성시하는 아침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개방돼 있다. 주거지의 창문을 하나같이 동쪽으로 내면서도 적절하게 마당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광장의 동선을 공유하는 독특한 배치다.
강 연안으로 내려갈수록 테라스가 올록볼록 아치를 그리는데 퓨마의 발톱처럼 보인다. 강 연안 북쪽, 유적지의 동쪽 끝 테라스에 풀피트유흐라 불리는 반원 탑이 있다. 문헌에 따르면 풀피트유흐는 잉카 시대의 명칭이 아니고, 설교대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와 케추아어의 접미어를 묶어 만든 복합어다. 돌출된 자연석 위에 탑을 세우고, 바위 끝에 돌기둥을 세워 무너지지 않게 받쳤다. 쿠시차카강 연안의 저지대를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상상 속 코끼리 같다.
동쪽 벽의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면 어두운 실내 바닥에 의미 있는 빛의 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다소 조악한 둥근 벽에는 손목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마추픽추 콘도르 신전의 벽감에 나 있는 구멍과 같은 모양이다. 이것을 두고 감옥이나 미라를 안치했던 곳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눈 위의 도시
다시 가파른 절벽 앞에 섰다. 암석 가운데로 길쭉한 굴이 나 있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정도의 계단이 이어진다. 굴에서 나와 몇 발짝 걸어가자 삼각뿔 모양의 굴이 또 반듯하게 나타난다. 잉카인은 석축을 쌓을 수 없는 절벽에 맞닥뜨렸어도 절망하지 않고 20m의 굴을 뚫었다. 손과 돌만으로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뚫은 잉카인의 열정이 손에 잡힐 듯하다.
푸유파타마르카(3,680m)에 이르는 트레킹은 열대우림 속 긴 터널을 지나듯 깊은 숲길이 이어진다. 푸유파타마르카라는 이름은 이곳을 탐험한 페호스가 눈 위의 도시, 마을, 장소라는 뜻으로 붙였다. 장소와 이름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푸유파타마르카가 그럴 것이다.
유적지는 피르카(돌과 돌 사이를 좀 거칠게 짜 맞추는 고대 건축 양식)라고 불리는 건식 마름돌쌓기 공법으로 지어졌다. 중앙 돌출 부분의 계단을 중심으로 유적지 양쪽이 정반대의 형상이다. 푸유파타마르카로 다가서는 순간 전형적인 잉카 테라스의 간결함에 압도되는데, 정상에 오르는 순간 서쪽은 동쪽과 완연하게 다른 모습에 놀라게 된다.
동쪽의 기하학적 모양의 테라스가 서쪽으로 휘어질수록 주름을 말아 올린 듯 우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동쪽에서 만나는 직사각형 샘은 그 아래로 연속된 여섯 개의 샘으로 이어진다. 서북쪽 경사지의 건물 유적은 말미잘 모양으로 구불구불한 자연의 주름을 따라 벽을 쌓아올린 특이한 공간이다.
건축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다른 형태와 구조로 둘러싸는 것은 결코 평범한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푸유파타마르카를 보면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떠오른다. 미술관의 외관은 빌바오강 방향으로 유선형의 곡선이 굽이치지만, 도시를 향해서는 기존의 박스 건물과 비슷하게 직선축의 돌로 마감되어 있다. 도시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구겐하임만의 독창성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 독특한 공간에서 잉카인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오른쪽이 기하학적 배치라면, 왼쪽은 자연의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자유 곡선 배치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자유와 구속 같은 극적인 대비를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왜 가파른 경사지의 절벽을 따라 삐뚤빼뚤 벽을 쌓았을까.
태양이 머무는 자리
푸유파타마르카 서쪽으로 7km 떨어진 인티파타로 가는 길. 수직으로 깎아지른 계단을 내려가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보았다. 층층이 쌓아올린 곡면의 석벽이 하늘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돌계단이 대나무 숲 사이로 내리꽂히듯 깊게 이어진다. 해발 3,670m 고지에서 야영장까지 1,000m쯤 수직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인티파타 테라스가 경사지에 불룩하게 솟아 있다. 거뭇거뭇한 석축 테라스가 층층이 절벽에 박혀 있다.
가지런히 포장된 돌계단을 따라 끝도 없이 하강하는 숲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석굴이 막아선다. 돌의 결을 따라 길쭉한 타원 모양으로 난 굴은 안데스의 여신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 속으로 난 계단은 자주 허리를 구부려야 지날 수 있다. 굴을 벗어나자 발밑으로 우루밤바강이 굽이쳐 흐른다.
1941년 폴 페호스의 탐험대가 발견한 인티파타는 마추픽추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마추픽추와 완벽하게 차단돼 있다. 페호스는 태양의 자리라는 의미로 이곳을 인티파타라고 불렀다. 아침마다 해가 테라스를 비추면 인티파타는 대지의 여신처럼 일어난다.
야마 떼가 한가롭게 노니는 풀밭을 지나 작은 목책 다리를 건너 유적지 사이를 걸었다. 거대한 테라스의 물결이 해일처럼 몰려와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돌이 절벽에 층층이 박힌 가파른 테라스 중앙에 수직 사다리가 있다. 네 발로 기어오르자 어느새 계단은 사라지고 오른쪽으로 난 샛길이 나온다. 좀 더 올라가자 인티파타의 상부 테라스와 하부 테라스 사이를 구분하는 길이 나온다.
인티파타의 허리를 따라 걸어가는 순간 왼쪽의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는 테라스가, 오른쪽 위로는 건물 유적지가 망루처럼 서 있다. 상부 건물 유적지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하늘에 걸려 있어 네 발로 기듯이 올랐다. 왼쪽으로 의식용 샘이 낮게 자리하고 계단을 따라 을씨년스러운 유적지가 서 있다. 건물 내부는 담장으로 칸칸이 막혀 있어 전체적인 형상을 가늠할 수 없다.
거대한 인티파타의 테라스는 산등성이를 수직으로 구획하는 중앙 계단과 좌우 세 개의 다른 계단으로만 오를 수 있다. 유적지 상부에 있는 공간은 잉카 건축의 전형인 사다리꼴 문과 벽감과 창으로 이루어졌다. 급경사진 테라스 형태에 맞추어 자연스러운 곡선의 돌담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2층으로 된 방에는 독특한 절구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중요한 제의가 이곳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절벽에 테라스를 쌓고 건물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인티파타 유적지는 멀리서는 엎어놓은 소쿠리 같아 부드러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날카로운 돌일 뿐, 날카로움이 앞선다. 이곳은 마추픽추를 지키는 마지막 요새임에 틀림없다. 가파른 수직 계단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48개의 테라스를 이어주지만 중앙 계단의 머리는 아직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채 흙 속에 묻혀 있다. 신성한 샘물은 서남쪽 테라스 상부에 설치된 수로를 따라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
그 넉넉한 품
평탄한 길을 따라 위치한 위냐이와이나 유적지는 오묵한 소쿠리 모양이라 어느 한 부분도 눈을 불편하게 하는 곳이 없다. 인티파타가 거친 남신의 일부라면, 위냐이와이나는 여신의 품이나 마찬가지다. 파차마마가 두 팔을 벌려 지친 영혼을 품어주는 것 같다. 서쪽 산등성이에 위치하는 까닭에 석양의 끝자락에서 오랫동안 물들고 있다.
인티파타와 위냐이와이나는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있지만, 인티파타에서는 위냐이와이나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 인티파타는 동쪽 산등성이에, 위냐이와이나는 서남쪽 산비탈에 있기 때문이다. 유적 전체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기를 거부하는 인티파타와 반대로 위냐이와이나는 한눈에 전체 모습을 펼쳐 보인다. 모성적인 공간의 위력이다.
위냐이와이나는 이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토종 난의 이름으로, 영원한 젊음을 상징한다. 이 일대는 열대운무림 지역이라 수많은 꽃과 동물에게 이상적인 곳이다. 여기에 반해 계곡 가까이 위치한 유적지는 거대한 테라스의 남쪽 사면을 따라 기하학적 모습으로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수직의 계단과 맞물려 테라스 형식의 샘 여러 개가 상하의 건축물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상부 유적지의 내부는 이중 문설주를 통해 들어간다. 들어갈 때는 하늘을 이고, 나올 때는 안데스의 절경을 품는다. 반원형 공간이 넉넉하게 마중한다. 반원형 탑은 질이 조금 떨어지는 막돌로 쌓았지만 벽에는 잘 가공된 사다리꼴 창문과 인방 좌우로 돌출된 원형 봉이 정교하게 놓여 있다. 거친 문설주에 달린 잘 가공된 돌 경첩이 방금 만든 것인 듯 손으로 돌리니 빙글빙글 돌아갔다. 돌 틈 사이로 잡풀이 무성하다.
이곳의 성격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주장과 주변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요충지인 까닭에 관측소나 군사 시설이었다는 설도 있다. 잉카 시대에 권력과 신앙 숭배는 중세의 요새가 교회와 성을 동시에 상징하던 것과 비슷하다. 가장 높은 곳에 망루와 신을 섬기는 제단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제사장의 목욕 공간, 그 밑에 귀족 거주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잉카 유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배치다.
주거지와 신전 사이를 이어주는 열 개의 도드라진 샘이 직사각형 형태로 열 지어 박혀 있다. 테라스 중턱에 돌출된 일련의 의식용 샘은 상부와 하부 유적지를 징검다리처럼 이어준다. 테라스의 경사에 맞게 계단을 설치하고 그 옆으로 직사각형 샘을 배치한 것은 기능적, 미적으로 볼 때 완벽하다. 건축은 순간의 환상으로 짓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다. 완벽한 건축물일수록 그 시대의 문화와 철학과 가치가 통째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 잉카 유적에 공통된 구조와 디테일이 반복되는 것은 잉카 문화의 일관성을 대변한다.
태양의 문
인티푼쿠는 케추아어로 ‘태양의 문’이라는 뜻이다. 아침마다 잉카의 태양이 마추픽추 태양 신전으로 다가서기 전에 여기서 고개를 내밀었고, 잉카인의 하루를 열었을 것이다. 마추픽추가 손에 잡힐 듯 가깝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길은 꿈틀거리며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호기심을 꺾을 수 없다. 오솔길이 마지막 고개를 바짝 세운다. 600년의 시간을 당기는 발걸음이 떨린다. 높다란 계단을 오르자 인티푼쿠라는 작은 표지판이 석벽에 기대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입구가 열려 있다.
직사각형의 방이 나오고 그 왼쪽으로 벽이 트여 있다. 마추픽추의 태양 신전을 향해 난 작은 창문으로 섬광처럼 날아가는 그 빛을 보고 싶다. 잠시 희미한 자태를 드러낸 마추픽추는 안개 장막을 두르고 바람난 애인처럼 달아난다. 그 앞으로 이어지는 경사길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협곡을 두르고 있다. 그 위로 승합버스가 버거운 허리를 틀며 기어오른다. 마추픽추 테라스가 잠시 드러나는 순간 그 뒤로 와이나픽추가 위엄 있게 고개를 내민다.
인티푼쿠는 거대한 콘도르의 입으로 들어가는 진입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잉카 제국의 영혼이 소통하는 인티푼쿠는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일출을 멈춘 적이 없다. 날마다 태양의 손길에 깨어나 숨 쉬는 마추픽추의 숨구멍이다. 인티푼쿠는 또한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테라스 절벽 위에 서 있는 잉카의 눈이자 태양의 길목을 지키는 천문관측소였다.
인티푼쿠의 설렘을 가슴에 안고서 1km 거리의 마추픽추 신전으로 향한다. 그 옛날 잉카인이 걸었던 길은 산허리를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촘촘하게 포장돼 있다. 북쪽 하늘에 와이나픽추가 우뚝 솟아올랐다.
마추픽추 봉우리와 푸투쿠시 봉우리가 만나는 선상에 직사각형의 유적이 나타났다. 안데스의 신 아푸스에게 의식을 올리던 제단은 섬세한 조각으로 반짝거린다. 제단을 둘러싼 방 내부에 설치된 정갈한 벽감은 잉카의 성직자가 의식을 준비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마추픽추, 돌의 신전 앞에 서자 침묵하던 잉카 역사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는 것 같다. 놀란 가슴은 망아지처럼 날 뛰며 시간의 경계선에서 떨었다. 위대한 잉카의 힘과 논리는 예측을 거부하며 상상력의 한계를 지워버렸다.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마추픽추의 존재는 현실이지만 그 존재의 이면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는 도저히 어찌할 길이 없다.
계단식 테라스의 비밀
마추픽추는 언뜻 보면 해자(빗물과 하수를 흘려보내는 통로)와 성벽을 중심으로 남쪽은 테라스, 북쪽은 도시 유적이다. 도시 유적도 반은 건물이 앉아 있고 반은 테라스로 비어 있다. 마추픽추는 비밀스럽게 쌓아올린 계단식 테라스 위에 건물이 한 몸처럼 서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거대한 기하학적 돌 텐트라면, 마추픽추는 급경사지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계단식 피라미드다.
잉카인은 산봉우리의 불규칙한 경사지에 집을 짓기 위해 경사도가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사면에 테라스를 쌓아올렸다. 이집트 초기의 피라미드의 형태인 마스타바처럼 한 단 한 단 테라스를 쌓아 마지막 꼭대기까지 폭우와 지진에도 끄떡하지 않는 단단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마추픽추엔 미학적, 구조적, 공학적 요소가 모두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다.
남쪽의 거대한 농경 테라스 지역뿐 아니라 요새 안의 궁전 그리고 일련의 주거 건축 지역도 모두 테라스 위에 올라타고 있다. 마추픽추는 단순히 아름다운 공중 도시가 아니다. 여기에는 콘도르의 이미지, 합리적인 도시 계획, 철저히 계산된 수로가 도시 중심으로 흐르는 과학적인 도시다.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구조공학, 토목공학, 천문기상학 등이 융합된 건축 공학의 결정판이다.
해발 2,450m에 이르는 고지에 마추픽추는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테라스와 도시를 만든 어떤 단서나 건축 디테일을 남겨놓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추픽추의 신비를 시원하게 풀어줄 특별한 장비를 발견한 것도 없었다. 로마인들이 이용한 도르래나 오늘날 크레인의 초기 단계인 기계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마소의 도움도 없이 오직 원시적인 도구만으로 수십 톤의 돌을 캐서 절벽 위로 옮기고 또 그 돌을 안전하게 세웠다.
벽돌을 만들다 떨어진 자투리와 자갈로 테라스를 쌓아올렸다. 현대의 건축공학으로도 만만찮은 작업이다. 폭우와 지진으로 돌담이 무너져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질 위험을 항상 안고 있었다. 고작해야 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공사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썰매와 사다리 정도다. 그 외는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위험한 정상에 마추픽추가 서있다.
마추픽추가 자리한 위치는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화산대 지각판 위에 걸터앉아 지각변동으로 침하한 지대다. 지진과 폭우로 테라스가 허물어지면 삽시간에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갈 수 있다. 연중 2,000mm가 넘는 폭우와 지진에도 지금까지 꿋꿋이 서 있는 테라스는 이 모든 장애를 이겨내었음을 의미한다.
테라스의 상세한 도면에 따르면 빗물이 스며들면 쉽게 흙으로 흡수되고, 잉여의 물은 외부로 흘러가게 설계돼 있다. 직접 실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서 있는 테라스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상부에서부터 테라스가 흡수할 수 있는 양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부 테라스를 적당히 채우고 나서는 외부 하수도로 신속히 흘러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마추픽추 테라스의 가장 큰 비밀은 테라스 단면도에 나와 있듯이 테라스 벽이 5도 산비탈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5도의 기울기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마추픽추의 모든 건물 벽은 모두 안쪽으로 15도 기울어져 있다. 이 또한 왜 15도로 기울어져 있는지 과학적인 해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건축가로서 한 가지 재미난 부분은 15도로 테라스 벽이 기울어져 있으면 경작지의 면적이 턱없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높이 1m정도의 테라스 벽이 가장 안전하게 구축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이 5도였음을 잉카인들이 경험으로 발견한 것이다. 잉카인들은 경작지를 최대로 확보하는 것과 테라스의 구조적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 수없이 실험하며 지금의 테라스 구조를 개발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에 빗물을 적당히 받아들이고 잉여의 물은 과학적으로 설계된 배수로를 따라 해자로 흘러내리도록 설계한 것이다.
잉카의 기술자는 지반을 적당히 파내고 맨 아래쪽에 작은 돌을 촘촘히 박아 넣은 다음 그 위에 좀 더 큰 돌을 5도의 경사를 지어가며 1m 높이로 쌓아올렸다. 벽 안에 작은 돌로 큰 돌의 틈을 촘촘히 메우고 밑에서부터 자갈, 모래, 흙(부식토와 표토)을 채웠다. 큰 돌 위에 작은 돌을 놓고, 그 위에 모래와 부식토, 표토를 덮었다.
오늘날에도 집을 지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반을 안전하게 다지고 석축을 쌓는 일이다. 중력이 작용하는 건물이 지진에 흔들리거나 폭우로 침하 하는 순간 건물은 한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경사가 50도에 육박하는 산비탈에는 더욱 위험하다. 비탈의 흙을 적당히 긁어내고 돌을 위계5도 안쪽으로 기울어짐대로 쌓고 그곳에 자갈, 모래, 흙을 일정 비율로 채우는 방법까지 찾아낸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건축설계도는 항상 모든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대표적인 몇몇 경우를 적용한 표준설계도에 불과하다. 각각의 지반 구조가 다를 경우 그 특성에 맞게 맞춤시공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추픽추의 테라스는 한순간에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기념비가 아니라 끊임없는 시행착오 끝에 안전한 구조와 배수 설비를 갖출 수 있었다.
오늘날 여행자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낙수용 홈은 많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낙수용 홈이 모두 13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산정에 폭우가 쏟아지면 잉여의 물들이 미리 설계된 배수 시스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하수구를 통하여 건식 해자로 흘러내린다는 뜻이다. 계단식 테라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서운 과학을 품고 있는 잉카 건축의 핵심이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 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 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 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 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아티클 | Article > 연재 | Ser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시의 정체성 ①‘현재의 도시, 서울’의 도시성 어휘에 대해 2023.1 (0) | 2023.01.19 |
---|---|
불멸의 건축 08 화성 장안문(長安門) 2020.9 (0) | 2023.01.19 |
도시의 실업,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20.9 (0) | 2023.01.19 |
[Archisalon] 노후화된 양곡 창고에서 청춘의 꿈이 가득한 공간으로, ‘순천 청춘창고’ 2020.9 (0) | 2023.01.19 |
불멸의 건축 07아야 소피아 박물관 2020.8 (0) | 2023.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