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잉카 05상상력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2020.10

2023. 1. 25.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ello, Inca 05
Trekking in Machu Picchu, a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마추픽추 테라스와 그 오른편에 솟아 있는 와이나픽추

쿠스코 북동쪽 안데스의 고원과 열대우림이 교차하는 산등성이 위에 마추픽추가 남북으로 길게 앉아 있다. 남쪽에는 농경 테라스가, 북쪽에는 건물 유적이 직사각형 테라스 위에 겹겹으로 있으니, 마치 두 손을 꽃송이처럼 펼친 듯한 모습이다. 남쪽 테라스와 북쪽 도시 영역은 마치 칼로 자르듯이 해자와 성벽으로 단절돼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 보면 테라스와 도시 영역은 거대한 콘도르 형상이다.

해발 2,430m, 빌카밤바 산맥의 북쪽 우루밤바강이 굽이쳐 흐르는 협곡 위 산정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마추픽추. 잉카 제왕의 절대 권력이 조각한 하늘 신전이다. 에스파냐 타호강의 물줄기가 협곡을 깊게 가르는 산정에 위치한 고도 톨레도가 에스파냐의 심장이라면, 마추픽추는 안데스 산맥을 호령하던 잉카 제국의 심장이다. 

 


마추픽추에 다가서기

잉카 정통 트레킹 코스를 따라 마추픽추에 다가서는 순간, 테라스 서쪽 언덕에 망루가 우뚝하다. 모든 여행자가 한 번은 꼭 찾는 이곳 망루에 올라 마추픽추 요새 전경을 오래 바라본다. 침묵의 시간 위로 가슴 떨리는 곳, 눈앞의 광경이 예측을 벗어나고, 상상력이 옷을 갈아입는 마추픽추다.

우루밤바강이 흐르는 신성한 계곡을 따라서 잉카인은 다양한 종교시설을 갖춘 주거단지를 세웠다. 그 중에서 마추픽추는 완벽한 기념비다. 잉카인에게 종교, 군대, 경작지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삼각편대다. 로마제국이 이민족을 점령한 후 황금을 약탈했듯이 에스파냐 침략자 역시 황금을 찾기 위해 잉카 유적을 파괴했지만 다행히 마추픽추는 온전하게 살아남았다.

섬세하게 조각된 유적 앞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는 숨을 내쉰다. 그 유적이 현대 건축물보다 몇 배는 더 세련됐고, 그만큼 인간의 한계를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늘이 조각한 날카로운 산과 깎아지른 듯한 협곡에 기대어 기하학적으로 조형된 마추픽추는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하모니를 보여준다. 구름과 빛과 안개와 그림자만이 잠시 머물다가는 봉우리에 인간이 조각한 마법의 성이라니, 더욱이나 깊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은 기적이다.

테라스 옆구리로 난 비탈길을 따라 마추픽추 게이트로 내려갔다. 마추픽추 입구의 절개지에 빙엄을 기리는 동판이 새겨져 있다. 그는 밀림 속에서 잠자던 마추픽추를 깨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는 마추픽추에 다가선 최초의 서양인에 불과하다. 에베레스트 고봉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산악인은 없다. 에베레스트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알피니스트가 셰르파의 도움으로 정상에 설 수 있었듯이 빙엄은 잉카 농부의 도움으로 마추픽추를 찾을 수 있었다.

 

산과 협곡에 기대어 기하학적으로 조성된 마추픽추


고지대 묘지와 경비병의 집

농경 테라스 남쪽 허리에 줄지어 있는 경비병의 집을 통과해 마추픽추 요새로 진입한다. 남쪽 절벽에 나란히 기대어 있는 경비병의 집 다섯 동은 테라스 구조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띈다. 남쪽 테라스의 끝선을 따라 층층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은 마추픽추의 젖줄인 샘과 물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빙엄은 이곳을 요새를 지키는 이들이 기거하던 경비병의 집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식량 저장고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경비병의 집을 지나 테라스 상부에 자리한 망루에 올랐다. 마추픽추를 굽어보는 것은 몇 번을 보아도 속이 시원하다. 망루 뒤쪽 평평한 테라스에는 장례용 제단이라 불리는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의식용 단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바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3단의 계단(하늘을 상징하는 콘도르, 대지를 상징하는 퓨마, 지하를 상징하는 뱀을 은유한다)이 남아 있다. 성직자와 귀족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 데 사용했거나 혹은 다른 형식의 종교 의식이나 동물과 사람을 제물로 바쳤던 곳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곳에서 일련의 묘지가 발굴됐는데, 그래서 이곳 일대를 고지대 묘지라고 한다.

고지대 묘지

고지대 묘지 뒤로 남서쪽 테라스 가장 위쪽에 일련의 건축 구조물이 줄지어 있다. 산등성이를 따라서 긴 직선의 석축 벽이 서 있고 그 벽에 출입문 열 곳이 있다. 석축은 모두 같은 층에 있으며 눈썹처럼 테라스 상부의 산등성이에 박혀 있다. 바로 아래 경비병의 집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군사용 막사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산바람이 테라스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차단막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테라스의 석축이 낮 동안 태양의 열기에 데워진 공기가 차가운 밤을 견디게 해준다는 논리다. 잉카 고지대의 유적들은 밤마다 차가운 구름이 산봉우리의 허리까지 내려왔다가 아침 햇볕에 떠밀려 하늘로 수직 상승한다. 천을 짜는 섬유 생산 작업장이거나 농산품 작업장으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명확한 답은 아니다.

열 개의 출입문이 있는 벽, 서남쪽 사면으로 난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찔한 절벽에 걸린 도개교가 나온다. 잉카의 길은 항상 열려 있지만 마추픽추 요새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추픽추로 통하는 굴과 다리는 하나같이 유사시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 수단이었다. 마추픽추 남서쪽 절벽 허리에 잉카의 길이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사람이 건너뛸 수 없을 만큼의 낭떠러지 공간을 가로지르며 위태롭게 놓인 나무 발판, 도개교다. 양측 면에 수직으로 돌담을 쌓아올리고 양쪽 모서리를 한 단 낮게 쌓고 그 위에 걸쳐진 나무 발판에는 소통과 단절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진가는 단절에 있다. 마추픽추 도개교는 적의 통과를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양쪽 모서리 사이의 중간 부분을 길게 비워둔 것은 유사시 나무 발판을 제거해 적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다.

낭떠러지 위에 위태롭게 놓인 도개교

마추픽추는 열대우림 지역에 거주하는 호전적인 이민족의 침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군사 요충지에 자리한다. 잉카의 지배자는 1년에 한 번씩 마추픽추에서 생활하며 이민족으로부터 쿠스코를 지키기 위해 국경 수비를 점검했다. 마추픽추의 테라스와 도시 영역 사이에 설치된 담장과 해자 역시 적의 침략으로부터 시간을 벌고, 전투 준비를 하기 위한 군사적인 장치였다.

 


허리에 걸린 달의 신전

와이나픽추는 케추아어로 ‘젊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지각변동으로 절벽이 생기지 않았다면 와이나픽추는 마추픽추를 넉넉하게 품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추픽추의 돌을 깨워 잉카의 전설을 듣고 싶은 사람은 와이나픽추에 먼저 오르는 것이 좋다. 해발 2,720m 고지의 와이나픽추는 마추픽추에서 거의 수직으로 300m 위에 있다.
와이나픽추는 마추픽추를 둘러싼 지역을 한눈에 굽어보며 우루밤바강 건너편 밀림 지대의 이민족을 살필 수 있는 천혜의 요새다. 태양의 아들 파차쿠텍의 권위를 닮은 곳이 바로 와이나픽추다. 서쪽의 숲길을 돌아가면 길 아래쪽에 달의 신전으로 향하는 무시무시한 절벽길이 나온다.

마추픽추의 신성한 광장에 자리한 타원형 기단 역시 달의 신전이라 부르지만, 와이나픽추의 달의 신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와이나픽추에 있는 달의 신전은 부유하는 타원형 자연석만으로도 달의 신전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곳 달의 신전에 인위적인 곡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지하 동굴의 지붕을 장식한 어눌한 곡면이 동굴의 천장으로 자연스럽게 내려앉았다.

산비탈에 박혀 있는 거대한 둥근 바위를 발견한 잉카인은 그 바위의 생김새에 걸맞게 동굴 신전을 만들고 지상에는 부속실을 마련해 그들의 신을 불러들였다. 동굴 안에 잘 짜여진 블록이 돌 사이를 어눌하게 결속하며 천장의 곡선미를 완성한다. 내부 벽에 정교하게 장식된 사다리꼴 벽감조차 자연스러운 것은 아름다운 곡선 천장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희생물을 공양한 것으로 보이는 제단 모양의 돌이 놓여있다. 출입문 크기의 사다리꼴 벽감은 이중 문설주처럼 벽을 장식하며 이곳이 특별한 공간으로 사용됐음을 짐작케 한다. 왼쪽에 난 벽에는 출입문 크기의 벽감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작은 벽감이 대칭으로 나 있다. 동굴 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벽은 자연스럽게 돌 블록으로 막았지만 자연석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손대지 않았다. 거북의 등을 탄 듯 달의 신전 상부에는 다소 질이 떨어지는 돌벽이 쌓여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체감을 보여준다.

 

달의 신전

달의 신전에서 오른쪽 산기슭으로 오르면 경사지에 일군의 돌집이 가지런히 서 있다. 와이나픽추를 지키는 군인의 거주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직사각형 돌 구조물에 사다리꼴 출입구와 창문이 숲속에 꿋꿋하게 남아 있다. 돌쌓기는 전체적으로 질이 좀 떨어지지만 이중 문설주로 마감된 사다리꼴 출입구는 다른 벽에 비해 마름돌쌓기로 정성을 들였다.

규칙적인 출입구와 벽감이 질서정연한 공간과 기능을 암시한다. 내부 벽에도 일련의 벽감이 줄 지어 있는데, 이것만 봐도 공간마다 저마다 다른 용도를 갖고 있다고 짐작 할 수 있다. 다양한 방이 서로 다른 층위의 테라스에 일사분란하게 연결돼 있다. 이는 달의 신전이 전략적인 길목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마추픽추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와이나픽추


와이나픽추 정상

와이나픽추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모험이다. 가파른 비탈길이 지그재그로 허리를 꼬았다가 곧추서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아슬아슬 가파른 돌계단을 기어오르고 나니 드디어 화살표가 작은 테라스로 안내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서자 마추픽추가 알라딘의 양탄자처럼 천 길 낭떠러지 아래 누워 있다. 한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며 기어오른 데 대한 와이나픽추의 선물이다.

이곳이 정상인 줄 알았는데 왼쪽 언덕 위로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어느 순간 거대한 암석이 막아서더니 그 속으로 난 좁은 동굴이 그림자를 안고 있다. 허리를 구부리고 조금 걸어가니 넉넉한 공간이 나타났지만 곧바로 경사진 좁은 굴이 미끄럼틀처럼 나타났다. 지친 몸을 구겨가며 좁은 굴속을 비집고 들어서자 거의 납작 엎드려 기어서 올라야 하는 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어두운 굴을 통과하고 나니 높은 테라스 벽체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좁은 통로가 계속된다. 석축 테라스를 끼고 계단을 오르니 작은 돌 틈 사이로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이나픽추 정수리로 올라서는 숨골 같다. 몸을 비집고 겨우 빠져나오니 엉성한 나무 사다리가 깎아지른 듯한 암석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다. 천길 낭떠러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발아래 온 천하가 펼쳐진다. 그 순간 콘도르 형상의 마추픽추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추픽추는 투시도로 보는 곳이 아니라 조감도로 보는 것이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의 정상에서 볼 때만이 콘도르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마추픽추는 콘도르 신의 모습으로 만든 천상의 도시다.

인티푼쿠에서 길게 원호를 그리며 흐르는 진입로는 콘도르의 입으로 빨려들어가고, 그 뒤로 이어지는 오른쪽 산비탈은 콘도르의 머리처럼 곧추서 있다. 그 아래 잉카 유적지가 콘도르의 날개처럼 펼쳐지고, 하부에는 콘도르의 발 모양이 살짝 삐져나와 있다.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하던 바벨탑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잉카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와이나픽추 정상에는 자연석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 잉카인은 정상 조금 아래에 테라스를 만들고 망루를 세우고 계단으로 연결했다. 돌벽은 정상의 자연석을 잘라서 만들었을 것이다. 바늘 끝 같은 산꼭대기에서 어떻게 돌을 다듬고 옮겼을까? 사람이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이 험준한 산에 돌을 쌓아올리다 피로 얼룩졌을 잉카 석공이 어른거린다. 

600년이 지나도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인 와이나픽추. 잉카인이 쌓은 석벽 위로 안데스의 바람을 탄 햇살이 무심하게 내리꽂혔다. 돌조각에 눌러 붙은 검푸른 표피는 하늘의 입김에 닳고 닳은 흔적이다. 돌과 돌이 서로를 끌어안고 견뎠다. 세상엔 역사라는 보자기로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진실이 존재한다고 와이나픽추는 가만가만 얘기하고 있다.

가파른 계단에 층층이 쌓아올린 잉카의 돌집들. 층을 달리하며 규칙적인 출입구와 창문이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도 어김없이 있다. 어떻게 돌을 가공하고 쌓아올렸을까. 떨리는 가슴으로 절벽에 뚫린 작은 창에 다가선다. 액자에 담긴 안데스의 봉우리를 쳐다본다.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건축가의 눈으로는 그 신성을 이해할 수 없다.

 


구름 위에 도시를 세운 까닭

와이나픽추를 뒤로하고 하산하는 길은 천국에서 인간계로의 환속이다. 와이나픽추를 오르기 전에 바라본 마추픽추가 돌의 요새였다면, 오르고 난 후엔 완벽한 콘도르 신전이다. 잉카의 콘도르가 마추픽추에 내려앉아 있다. 마추픽추가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다. 그러나 건축가로서 마추픽추를 바라보고 있으면 밀림 지역의 이민족 동태를 살피는 요새, 또는 우루밤바강을 따라 늘려있는 경작지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잉카의 돌은 말이 없다.

폭우와 지진 그리고 산사태 속에서도 마추픽추는 600년을 버텨냈다. 수천 개의 돌이 정확히 계산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중에는 무려 20톤이 넘는 돌도 있다. 사람의 힘과 원시적인 도구만으로 육중한 돌을 깎아내고 적절한 위치에 배치한 것은 기적이다. 신예 왕인 파차쿠텍의 야망으로 지어진 도시, 위대한 아메리카인디언의 왕이 상상력으로 빚어낸 유물, 전쟁과 정복의 산물, 이것이 마추픽추의 진실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험한 곳을 선택해 건축물을 지을 사람은 없다. 와이나픽추도 그렇지만 마추픽추 역시 가파른 산이다. 도시를 세울 만한 평평한 공간도 거의 없고 작업 공간 역시 매우 협소하다. 그런데도 잉카인은 이렇게 힘든 곳에 왜 도시를 왜 세웠을까. 구름 위에 마추픽추를 건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의 주장은 다양하지만 그 어느 것도 속 시원하게 비밀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파차쿠텍은 쿠스코 계곡의 작은 세력에 불과한 잉카부족을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북쪽의 콜롬비아와 남쪽의 칠레,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잉카 제국은 1,000만 명이 넘는 백성을 호령하던 남미의 로마제국이었다. 파차쿠텍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자신의 신적인 권력을 시험하기 위해 이곳에 마추픽추를 지으라고 명령했을 것이라고 한 <잉카 제국의 마추픽추> 영상에 고개가 끄떡인다. 이 불가사의한 도전을 통해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모험가의 위치에 있었다.

 

마추픽추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와이나픽추


마추픽추는 750명 이상의 주민을 수용할 만한 규모로 제국의 중심 쿠스코에서 80km 떨어진 높은 안데스의 절벽 위에 세워졌다. 이렇게 볼 때 왕실의 은둔처라기보다는 밀림의 호전적인 부족을 방어하는 요새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공을 들여 마추픽추를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추픽추는 신성이 깃든 잉카 산맥에 있다. 마추픽추 잉카 트레킹의 여정마다 주요 유적 건물들이 도열해 서있다. 이는 잉카인은 하늘과 자연을 신으로 모시며 숭배했음을 의미한다. 태양 신전과 신성한 광장 그리고 인티우아타나에 조각한 성스러운 세계의 축 ‘악시스 문디’는 잉카의 종교적 상징과 일치한다. 마추픽추는 하늘과 산, 강의 영적인 중심에 있다. 성스러운 산 위에는 남십자성이 빛나고 있는데, 신성한 광장의 경사진 판석이 정확하게 그 별을 향한다. 종교적 의미를 띤 자연 요소에 둘러싸인 마추픽추는 파차쿠텍만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였다.

 


기적의 샘

산정 요새의 기본은 식수 확보다. 에스파냐의 알람브라 궁전 역시 초기에는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했다. 그 이후는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산을 뚫고 수로를 연결하여 요새까지 이끌고 왔다. 마추픽추 산정 역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할지라도 식수를 구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마추픽추 산정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450m 절벽아래 우루밤바강에서 물을 퍼오는 것이다.

잉카인은 어떻게 식수원을 마련했을까. 디스커버리에서 제작한 영상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2007>는 마추픽추 설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남쪽 테라스를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에 있다고 주장했다.

마추픽추 산정에는 순간 최대 3,000mm 정도 쏟아지는 빗물을 저장하는 것도, 우물을 파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름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비를 건기인 겨울까지 보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따라서 잉카인은 마추픽추와 가까운 곳에서 물길을 찾든지 아니면 수로를 연결해야만 했다. 해발 2,430m의 높고 험준한 고지대에서 가장 확실하게 물길을 구하는 방법은 로마제국처럼 설산에서 녹아 흘러내리는 물을 수로를 설치해 끌어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요새를 짓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잉카인은 대체 어디서 물을 끌어왔을까. 오늘날 마추픽추에는 잉카 시대처럼 물길이 흐르고 있다. 이 물줄기를 따라가면 남쪽 테라스 끝에서 숲속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숲속 어딘가에 수원지가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그재그 도로로 승합버스를 타고가면 길가에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에서는 숲속에 있는 물줄기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지형학적으로 마추픽추 요새 부지는 자연 침하에 의해 생겨난 대지다.

북쪽으로 와이나픽추 봉우리 허리에 마추픽추 요새가 걸려있지만 남쪽 마추픽추 봉우리는 낙타 봉우리처럼 굴곡만 있을 뿐 지각변동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쪽 테라스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겨난 틈에 수원지가 놓여있다. 신기한 것은 자연적으로 샘솟는 샘물이 아니라 마추픽추 봉우리에 뿌려지는 빗물이 지각 틈으로 스며들어 지하수처럼 연중 지속적으로 흐르는 것이다. 잉카인은 그 틈 앞에 낮은 벽을 세워 물웅덩이를 만들어 마침내 요새까지 끌어온 것이다. 

이 물줄기를 적당한 경사도를 유지하며 끌어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넘치지도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물줄기가 흘러 남쪽 테라스를 관통하고서 요새 중심의 의식센터까지 흘러온다. 그 거리는 750m나 된다. 더욱 중요한 점은 테라스를 쌓을 때도 물길의 기울기를 적정선으로 유지하며 쌓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추픽추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그 물길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조금만 신경 쓰면 남쪽 테라스에 정성 들여 만든 물길이 해자를 건너 마추픽추 요새 안으로 안전하게 흘러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약 3도의 경사를 이루고서 물이 넘치지도 않고 바닥으로 누수 되는 것까지 고려하여 지속적으로 흘러 의식센터까지 이르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요르단 페트라 유적지의 수로는 1m짜리 옹기 관으로 연결된 물길이 4도의 경사도를 유지하고 있다. 현대과학자들이 4도의 경사가 실제 물이 수도관 속으로 흐르는데 제일 적합하다는 것을 실험으로 알아냈다. 마추픽추는 수로는 관이 아니라 도랑으로 오픈되어 있기에 3도를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잉카의 기술자들이 실험으로 알아낸 것이다. 남쪽의 수원에서 거대한 테라스 경작지를 가로질러 요새까지, 750m에 이르는 수로는 첨단공학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신성한 물줄기가 해자 위로 가로질러 가장 먼저 도착하는 지점에 의식을 올리는 공간과 그 물을 지배하는 왕의 궁전이 놓이는 것은 당연하다. 잉카인에게 물은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의 실질적인 배치 구조는 이 신성한 수로에 의해 결정됐다. 만약 물줄기가 다른 곳에서 발견됐다면 지금의 왕궁과 신전 자리는 바뀌었을 것이다. 콘도르 형상의 마추픽추 배치도 틀어졌을 것이다.

 

왕궁으로 흘러들어 오는 물줄기


오늘날 왕의 궁전 영역 내에 위치한 샘물은 잉카 시대 이후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 이 신성한 물이 처음 도달하는 목적지는 완벽히 계산된 곳이다. 신의 대리자인 파차쿠텍의 궁전과 의식센터로 제일 먼저 도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샘물은 잉카 왕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잉카 왕은 의식을 전행하기 3일 전부터 신성한 물로 목욕하고 경건하게 신을 영접할 준비를 했다. 목욕은 정신을 깨끗하게 씻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잉카인은 층층이 놓인 샘에서 신분에 따라 마실 물과 목욕물을 충당했다. 잉카인에게 식수는 세속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 그 이상이었다. 샘에는 벽감을 만들고 배수구도 따로 설치했다. 평소에는 물을 받는 곳이지만 의식을 진행할 때는 몸을 단정히 하는 목욕 공간이었다.

왕의 개인 목욕탕 아래로 열여섯 개의 독특한 급수대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따라서 마추픽추는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설계된 고도의 기술 집약적인 산성 도시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을 작은 틈으로 흘러내리게 해서 잉카 특유의 물병인 아리발로를 효율적으로 채우도록 만들었다. 대지와 물을 통제함으로써 파차쿠텍은 마침내 세상을 통제할 수 있었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 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paco994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