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잉카 06상상력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2020.11

2023. 1. 26. 09:06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Hello, Inca 06
Trekking in Machu Picchu, a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마추픽추의 중심에 있는 왕의 궁전 내부 모습

마추픽추는 인간의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콘도르의 눈으로 바라봐야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와이나픽추 정상에 서는 것이다. 마추픽추를 배치도로 보면 마추픽추 봉우리와 와이나픽추 봉우리 사이의 길쭉한 선형으로 보인다. 와이나픽추 봉우리에 올라가면 테라스와 돌집들이 그로테스크한 콘도르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마추픽추는 성벽과 해자를 중심을 남쪽 테라스 영역과 북쪽 도시 영역으로 나뉜다. 와이나픽추에 오르면 그 물리적인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거대한 콘도르의 형상으로 하나가 되어버린다. 도시 영역의 중심인 왕궁과 신전이 정확하게 콘도르의 심장으로 작동한다. 콘도르가 날아가는 방향에 맞추어 상부는 귀족 영역이 위치하고 하부는 도시를 유지하는 기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계획이 신화와 현실적인 기능이 교묘하게 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늘조차 꽂을 수 없는 섬세함

마추픽추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만들어낼 수 없는 걸작이다. 여러 연구자들은 마추픽추의 돌벽 쌓기 작업에는 결과에 따른 보상이 걸려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작업의 주체가 바로 석공 한 사람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한양 성곽 쌓기에도 이같은 보상 방식이 적용됐기에 마추픽추만의 특별한 경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절벽 위 테라스 꼭대기에 석벽을 쌓는 고도의 정밀한 작업을 설명하기에는 이 주장은 어딘가 모자란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비밀이 숨어있었을까.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잉카의 건물들

시멘트와 회반죽을 사용하지 않고 28m 높이의 세고비야 수도교를 쌓아올린 로마인의 놀라운 장인 정신처럼 잉카의 석공 역시 시멘트와 회반죽 없이 마름돌쌓기만으로 육중한 석축 구조물을 만들었다. 기중기와 금속 도구 없이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벽을 쌓은 것은 기적이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오차의 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석재 대패로 0.05mm 차이까지 돌을 일정하게 갈았지만, 잉카인은 돌과 돌을 서로 자연스럽게 결속시켰다. 파르테논 신전의 벽은 외부의 줄눈과 내부의 접합면이 평면이지만, 잉카의 석벽은 외부의 줄눈과 내부의 접합면이 평면이 아니다. 시간을 비웃으며 접합 부위의 돌 형태에 맞추어 정성스럽게 갈아냈다. 강철 도구 없이 기껏해야 철을 함유한 단단한 차돌로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돌을 갈아냈다.

큰 돌 사이에 세밀하게 다듬은 작은 돌들을 틈틈이 쌓아 만든 주 출입구

마추픽추의 돌벽에는 작은 돌로 수없이 두드려서 만들어낸 돌망치 자국이 남아있다. 이 방법은 파르테논 신전의 돌을 갈아내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갈하게 쌓아올린 돌담을 보니 잉카 석공의 위태로운 작업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마추픽추는 잉카 시대의 이름이 아니다.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하이럼 빙엄이 1911년 이곳을 발견한 이후 산의 이름을 따서 마추픽추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고학자, 역사학자, 건축가 등 많은 연구자들이 수십 년 동안 마추픽추를 조사했지만 건설 과정의 비밀을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인티푼쿠에서 마추픽추 요새로 진입하는 순간 서쪽 절벽에 기대 선 출입구가 우리를 맞는다. 눈앞을 막아선 담장은 두께는 1m가 조금 넘고 높이는 상부가 잘려나가 3∼4m에 불과하다. 사다리꼴 문이 잘 보존된 주 출입구는 일반적인 성벽 출입구와 달리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잉카 시대의 성벽은 지금보다 조금 더 높았다.

주 출입구는 서쪽 테라스 상부에서 연속되는 세 번째 테라스를 관통한다. 주 출입구의 서쪽 높은 절벽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진 일곱 번째 테라스 위에 자리한 돌집을 상부 복합건물 단지 또는 귀족 주거지라고 한다. 동쪽으로 기울어진 테라스는 자로 잰 듯한 직선은 아니지만 최대한 자연 지형에 따라 단을 형성하고 있다. 출입구로 이어지는 통로 아래쪽 테라스 중간 지점에 거대한 자연석이 돌출된 채 건물 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잉카의 석공은 자연석을 옮기지 않고 건물 벽과 나란히 방을 만들어놓았다.

 


샘을 품은 의식센터

귀족 주거지를 돌아내려오니 끝나는 지점이 바로 여덟 번째 테라스다. 건물은 없고, 수로만 연결돼 있다. 수로는 일종의 완충지대다. 수로 아래 아홉 번째, 열 번째 테라스에는 뉴스타 궁전과 태양 신전, 의식센터, 왕궁이 자리해 도시 영역의 중심을 잡아준다. 마추픽추 요새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태양 신전과 왕궁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의식센터가 위치한다. 의식센터 아래쪽에는 샘이 있는데, 작은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며 직사각형 수조로 떨어진다.

신성한 물줄기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이곳은 최고 권력자의 공간이다. 의식센터는 왕의 부속 시설이나 마찬가지로, 왕의 공식 업무인 종교행사를 보조한다. 이곳에서부터 열여섯 개의 샘이 방향을 틀어가며 겹겹이 포개져 있다. 신성한 샘물에서 어떤 의식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물줄기가 이곳 지배자의 권력을 상징한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다. 잉카 시대 물은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왕이나 제사장들이 종교 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세 벽으로 둘러싸인 의식 공간은 잉카 시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 세 면은 벽으로 막혀 있고 한 면만 트인 ㄷ자 모양의 이런 공간을 잉카인은 와이라나(세 면은 벽으로 막혀 있고 한 면만 트인 ㄷ자 모양의 공간.)라고 했다. 동쪽으로만 트인 의식센터는 마추픽추 요새에서 가장 중요한 태양 신전과 왕궁 사이에 있다. 이곳 의식센터에서 물 숭배와 관련된 종교 의식을 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농경사회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일하기 때문이다.

 


생사를 품은 태양 신전

의식센터 남쪽으로 어깨를 마주한 건물의 마감이 유달리 정교하다. 마추픽추 요새에서 유일한 원형 건축물인 태양 신전이다. 신성한 광장의 서쪽에 달의 신전이라 불리는 반원형 테라스가 있지만, 이것은 완전한 공간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에서 원은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동양에서도 원기둥은 절대 군주와 사찰에서만 사용했다. 오늘날 태양 신전은 신성한 샘 남쪽 거대한 바위 위에 장엄하게 서 있다.

빙엄은 마치 자로 잰 듯 정밀하게 짜 맞추어진 반원형 탑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쿠스코에 있는 코리칸차(태양 신전)를 떠올렸다. 벽체를 반원형으로 쌓아올리는 작업은 어려운 공정이라 구체적인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실현하기 힘들다. 거대한 자연석 위에 두부처럼 반듯한 돌 블록을 쌓아올리고 하부 자연석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작업이다.

금과 은으로 동쪽과 남쪽 창문을 장식했다면 햇살에 반짝이는 그 섬광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하지에 태양의 문(인티푼쿠) 위로 떠오른 햇살이 남쪽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 때 그 빛줄기는 더없이 신성했을 것이다. 두 개의 창문은 1년 중 동지와 하지에 떠오르는 태양의 위치에 각각 맞추어 배치돼 있다.

 

마추픽추의 유일한 원형 건축물인 태양 신전

태양 신전의 북쪽에 난 창을 뱀의 창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잉카의 석조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사다리꼴의 정교한 돌쌓기로 설치됐으며, 상부에는 하중이 무거운 인방돌을 길게 놓았다. 북쪽 창문이 특별한 것은 사다리꼴 창문의 낮은 부분에 작은 구멍이 여럿 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는 그 구멍이 창문에 어떤 장치를 걸어두기 위한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학자는 특별한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뱀을 들여보내기 위해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태양 신전의 내부 벽은 돌 블록으로 정교하게 쌓은 뒤에 사다리꼴 벽감을 설치했다. 특히 동쪽과 남쪽 벽은 타원형으로 더 정밀하게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동쪽과 남쪽의 창문 외부에는 기능을 알 수 없는 원형 봉이 돌출돼 있다. 외부에 태양의 극지 의식과 관계된 장식을 걸거나 알 수 없는 어떤 물체를 지지하도록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왕의 무덤

태양 신전의 평면 구조를 확인하고 나서 다시 계단으로 내려와 왕의 무덤 앞에서 섰다. 서쪽 벽은 땅속에 가려 있지만 동쪽은 1층처럼 입구가 드러나 있다. 왕의 무덤은 정확히 태양 신전 지하에 있다. 태양 신전의 기초가 되는 거대한 자연 암석이 왕의 무덤 벽이자 지붕 역할을 한다.

태양의 아들인 왕의 미라를 태양 신전 아래 안치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는 발상이다. 지하 동굴을 동쪽에서 바라보면 1층처럼 노출돼 있지만 남, 서, 북쪽은 벽으로 막혀 있다. 오직 동쪽 출입구만 삼각형 모양으로 열려 있다. 텐트를 반쯤 걷어 올린 모습의 사선은 마치 안데스의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

사면으로 기울어진 동굴 천장과 비슷하게 기울어진 입구는 3단 계단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길어지는 계단 모양조각은 흡사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잉카 왕의 투구와 이마와 눈과 코와 입과 목의 형태를 추상적으로 조각한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건축 공간은 그 속의 기능이나 사는 사람을 닮기 마련이다. 계단 형태의 조각이 잉카 왕을 상징하는 것인지 대지의 여신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사선 아래 3단으로 조각된 돌의 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어렴풋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동굴 내부 바닥에는 3단 돌이 탑처럼 조각되어 있다. 지하(뱀), 지상(퓨마), 하늘(콘도르)의 신을 상징한다.

태양 신전 하부에 자리 잡은 왕의 무덤


출입구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두 개의 넓은 단이 간격을 두고 북쪽 벽과 나란하게 설치돼 있다. 서쪽 벽 안쪽에도 그 기능을 알 수 없는 낮은 단이 놓여 있다. 무덤 내부 벽은 잘 가공된 돌 블록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다. 또한 출입문 크기의 사다리꼴 벽감 네 개가 설치돼 있다. 마추픽추 높이에 원형 돌 봉이 돌출돼 드러나 있지만 역시 용도는 알 수 없다.

 

공주의 거처, 뉴스타 궁전

왕의 무덤에서 남쪽으로 한 품 떨어진 곳에 뉴스타 궁전이 있다. 얼른 보면 별도의 건물로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태양 신전과 연속되어 있다. 뉴스타는 케추아어로 공주를 뜻한다. 따라서 뉴스타 궁전은 공주의 거처다. 잉카 시대에는 궁전 출입구 오른쪽 계단으로 태양 신전에 오를 수 있었다.
뉴스타 궁전은 사다리꼴 형상의 2층 구조로, 사다리꼴 출입구의 비례가 건물 형태로 확장된 모습이다. 2층 북쪽 벽에 설치된 창문은 태양 신전에서 볼 때는 1층에 있다. 학자들은 뉴스타 궁전 내부의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 이 창문을 통해 태양 신전으로 드나들었다고 주장한다. 

뉴스타 궁전은 태양 신전 만큼이나 완벽할 정도로 정성들여 돌 블록을 짜 맞추었다. 잉카 건축에서는 석조 구조가 다층적이고 돌 가공의 정밀도가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적절한 크기의 사각형 기초 위에 벽이 안으로 경사져 2층으로 솟아 있어서 그 비례가 탑처럼 아름답다. 외부 벽 위쪽에 지붕을 결속하기 위한 원형 돌봉이 돌출돼 있지만 그것 자체도 대칭이어서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태양 신전으로 통하는 큰 창을 제외하면 내부의 창문과 벽감은 아담한 모양이다. 모든 건축물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거주자의 행동과 성격을 반영한다. 단순한 사다리꼴이지만 전체적으로 비례가 아름답고 우아해서, 잉카의 공주나 귀족 가운데 특별히 존경받는 여사제가 사용했으리라고 추측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태양 신전과 연결된 뉴스타 궁전


왕의 궁전

뉴스타 궁전, 태양 신전, 의식센터와 나란히 왕의 궁전이 놓여 있다. 마추픽추 요새에서 전략적 중심이 바로 왕의 궁전이다. 왕궁과 의식센터 사이의 통로에 면해 있고, 통로 계단으로 신성한 광장과 인티우아타나에 쉽게 오를 수 있고, 광장 맞은편에 있는 콘도르 신전까지 한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다.

의식센터와 마주 보는 진입 동선만이 왕의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출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사방은 완벽하게 막혀 있다. 입구와 출구가 같은 공간을 경유하도록 설치된 것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내부 공간의 건축적 마감 또한 훌륭하다. 출입구로 이어진 통로 좌측에 작은 제단이 놓여 있으며, 좁은 통로를 따라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알코브 공간이 연속적으로 설치돼 있다.

태양 신전에서 연결돼 있는 왕의 궁전

벽에는 석조 원형 고리가 돌출돼 있다. 이 원형 고리는 교수대로 이용됐거나 횃불을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추픽추에는 감옥이 따로 있기 때문에 궁전 출입구에 교수대를 설치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밤에 횃불을 걸거나 잉카 왕을 상징하는 깃발을 꽂았던 고리일 수도 있다.

출입구와 파티오(중정)가 만나는 벽 아래에 낮은 단의 돌이 놓여 있다. 단 위로 두 개의 사다리꼴 벽감이 있고 그 위로 높은 벽이 솟아 있어 외부에서는 아무것도 엿볼 수 없다. 아마도 의식과 관련된 장식이나 선조의 미라가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티오 남쪽의 방이 북쪽에 있는 방보다 작다. 남쪽 방은 침실이고, 북쪽의 큰 방은 왕의 집무실로 빙엄은 추정했다. 전체 공간의 균형을 잡아주는 파티오를 중심으로 침실과 집무실이 서로 마주 보며 기하학적으로 배치돼 있다.

파티오 북쪽의 방은 남쪽의 침실보다 조금 더 크다. 이 방에는 열두 개의 아름다운 벽감이 설치돼 있다. 그 옆에 낮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는데, 의식에 쓰이는 용품을 손질하는 부속 공간으로 사용됐다. 궁전의 동쪽과 북쪽에는 부속 시설로 사용함직한 더 많은 방이 있다.

 

태양을 묶는 기둥

신성한 광장의 주 신전 서쪽 벽을 따라 꼬불꼬불 테라스 위로 난 계단을 오른다. 이 길은 피라미드에 이르는 길이자 정통 잉카 트레킹을 압축판이라고 불린다. 그 꼭대기에 인티우아타나가 있다. 마추픽추 요새에서 가장 높고 위엄이 넘치는 피라미드 정상이다.

해시계 또는 천체 관측소 역할을 했을 인티우아타나

마추픽추의 건축물은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의 부속 건물과 서쪽의 피라미드 신전이 마주보는 형태로 배치돼 있다. 지형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인티우아타나가 위치한 피라미드 정상은 오늘날 신성한 광장으로 난 계단으로 오른 뒤 북쪽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오게 돼 있다.

인티우아타나 피라미드는 마야 유적지의 치첸이트사 피라미드처럼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는 아니지만 지형을 이용해 자연스럽다. 신성한 광장에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이르는 길은 마치 잉카의 길을 압축해놓은 듯 우루밤바 협곡을 끼고 오르는 계단길이다. 석벽에는 둥근 석재가 불룩 튀어나와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둥근 돌에 구멍이 난 정교한 조각인데, 용도와 기능은 알 수 없다.

거대한 피라미드 정상에는 남쪽에서 진입하는 순서에 따라 한 단 차이로 세 개의 마당이 연이어 있다. 두 번째 마당에는 서쪽 절벽에 기댄 일련의 건물이 동쪽을 향해 열려 있다. 정교하게 쌓은 벽과 창과 벽감으로 마감된 이 공간은 종교 의식을 준비했던 곳으로 보인다. 가장 넓은 세 번째 마당, 여기에 사각의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다. 이것이 인티우아타나다. 태양을 묶는 기둥이라는 뜻을 가진 높이 1.8m 거석 기념비를 중심으로 동남쪽의 ㄱ자 벽과 북쪽의 꺾인 벽이 낮게 자리한다.

잉카인은 태양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동지에 태양을 이 돌기둥에 묶는 의식을 치렀다. 그러면 동짓날 이후 일조량이 조금씩 늘어나 다시 태양이 원래 주기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태양의 귀환을 기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잉카 제국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 인티우아타나는 대지와 하늘을 잇는 상징적인 기둥이다.

이 놀라운 구조물은 주변 경관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배치상으로 마추픽추의 중심은 왕의 궁전과 의식센터이지만 지형적인 위계로 보면 단연 인티우아타나다. 인티우아타나의 네 모서리는 성스러운 세계의 축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

 


잉카의 심장은 뛰고 있다 

마추픽추 요새에는 잉카 시대의 골목과 추억과 역사와 신화가 조금도 빛바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다. 길과 돌과 광장과 샘과 계단은 모두 자연 지형의 일부처럼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다. 침묵하는 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도저히 발길을 돌릴 수 없다. 

콘도르의 날개짓을 형상화 한 신전의 모습

마추픽추는 운 좋게 수세기 동안 건재했다. 2007년, 진도 8의 강진에도 마추픽추는 아무런 손상 없이 살아남았다. 남미 그 어디에도 마추픽추와 비교할 수 있는 유적지는 없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요한 공간, 천혜의 절벽과 하늘이 맞닿은 신비로운 공간, 자연과 인간의 위대함에 넋을 놓게 되는 공간, 감동과 충격과 환희로 얼룩진 돌의 숲에서 시간을 지워버리게 되는 공간이다. 

미지의 도시가 신성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 어떤 흔적도 영혼의 작품 위에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숭고한 그 형상을 빚기 위해 잉카인은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붓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깃발처럼 안데스의 바람에 그저 흔들릴 뿐이다. 마추픽추는 속도의 빠름도, 효율성도 저만치 비켜서서 인간이 자연에 남긴 숭고함과 위대함과 신성함의 기념비로 남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먼지 같은 허물에 불과함을 마추픽추가 침묵으로 웅변한다.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다”. 에스파냐의 대문호 세르반테스의 이 말은 안데스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안데스의 콘도르, 마추픽추를 두고 하는 표현이었다.

 

 

 

.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 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 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paco994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