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고민하다 2020.11

2023. 1. 26. 09:07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ontemplate on the social meaning and value of an architecture

 

무엇이 집을 만드는가?(What it takes to make a home) 2019 / 다니엘 슈워츠 / 제작사=CCA
루이스 칸의 타이거 시티(Louis Kahn’s Tiger City) 2019 / 선다람 타고르 / 제작사=STC Production
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My Architect) 2003 / 나다니엘 칸 / 제작사=New Yorker Films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시작된 지 12회째다. 오래전 초대 받았던 토론회는 있었지만 영화는 거의 보지 않았다. 생계 때문에 시간이 여간해서 나지 않았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스마트폰으로 비대면 온라인 영화관을 보게 되었다. 어떤 영화를 볼까 하다가 첫 눈에 들어온 짧은 다큐를 고민할 틈 없이 시청하게 되었다. 왜냐면, 수 년 전 장기 미국 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LA의 사회 운동 때문이다. 
건축사인지라 매사 건축이라는 키워드만 들어가면 유난히 친밀감을 느끼는 이상한 심성의 소유자인 덕분에 한눈에 관련 조직을 발견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당시 자료를 조사하면서 LA의 홈리스 자선 단체(Skid Row Housing Trust)라는 조직 활동에 감동받았었다. LA의 홈리스 자선 단체는 이름 그대로 홈리스 (Homeless)에서 less를 떼어 버리는 자선을 한다. 집을 주는 자선 단체인 것이다. 당연히 임대료를 받지만 거의 공짜 수준인데다가, 실제 돈이 없으면 경우에 따라 무료다. 그런데 그런 집이 그냥 카드보드로 만들거나, 천막집이 아닌 말 그대로 보호장치로서 집을 제공하는 것이다. 각종 기부를 받아서 LA의 낡은 빈집을 사서 개조해 제공하거나, 도전적 건축사들의 작품으로 신축해서 제공한다.
LA의 빈집들은 도시재생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도시사회학적 가치가 있는 다시 말해 역사적 의미를 가진 낡은 건물들을 홈리스 주택으로 개조해서 재생 건축을 한다. 건축사로서 이 점이 정말 부럽다. 신축의 경우? 놀라지 마시라. 이들의 신축은 상당한 경우 미국 건축상을 수상한 걸작들이다. 이번 다큐에 소개된 스타아파트(Star Apartment) 역시 2015년 건축디자인 상과 시공상을 모두 수상했다. 더 흥미로운 점 하나 말하면 독특한 구조의 이 건물은 목조와 콘크리트 구조가 섞인 건물이다. 세상에! 홈리스 집을 누가 이렇게 건축할까? 마냥 부러운 이런 결과물을 오래전에 알고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이번 다큐의 첫 화면이 나를 유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큐 제목도 재미있다. ‘무엇이 집을 만드는가?’ 이 제목에서 뜻하는 집으로는 굳이 House가 아닌 Home을 사용했다. 왜 일까? 다큐를 보면 이를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사람이 살기 위한 기본적 요소로 의식주가 있다. 옷은 치장일 수도 있지만, 몸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의 요소다. 음식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면서, 맛을 음미하는 그 이상이다. 집 역시 마찬가지로 보호처 기능이면서 동시에 부가가치의 한 요소다. 사람의 생존에 밀접한 이 기본 세 가지는 필수요소이면서 동시에 기호적 요소이기도 하다. 필수이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발생되고, 기호적 요소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경쟁과 자본 사회의 집적공간인 도시에서 사람의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들이 저절로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쟁 사회는 도태되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드는데, 이들은 정치적 개념을 떠나서 인권의 기본적 시각에서 도와줘야 한다. 사회 안전망 차원에서도 재고의 여지없이 이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시민들이 자위권을 위해서 총을 들어야 하는 극단의 사회가 되어 버린다. 구제는 인본적 시각의 인권 개선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의 행위다.
그런 측면에서 이 다큐가 말하는 주거의 문제는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다. 도시에서 자신의 거주할 공간이 없다면 결국 노숙자로 배회하는 수밖에 없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모두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도시에서 모두의 공생을 위해서라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건축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사실 건축사들은 대부분 자본이나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각종 건축을 설계한다. 물론 권력이라는 표현에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공공을 집행하는 자들 역시 사회적 엘리트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경쟁사회에서 가장 약한 홈리스들을 건축사들이 만날 리 만무하다. 알코올중독이나 범죄의 굴레 때문에 홈리스인 경우도 있어서 무조건적 동정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최약체 계층에 머무르게 된 홈리스들을 고민하는 건축은 희박할 정도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이 자선단체는 주목할 만하다. 물론 홈리스나 집을 잃어버린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제공 운동을 펼치는 조직이나 단체는 많다. 세계적인 헐리웃 스타 브래드 피트가 주도한 ‘메이크 잇 라잇(Make it Right)’이라는 조직도 홈리스나 홍수나 태풍으로 집을 잃어버리고 재건하기 어려운 저소득 계층에게 집을 지어주는 봉사조직을 운영했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은 단순히 기능적 사고로 주택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건축사로서 부러운 점이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주택들도 미국 건축상을 수상한 것이 상당하다. 프랭크 게리의 핑크 주택도 AIA 건축 디자인 상을 수상했다. Skid Row Trust로부터 의뢰받아 설계한, 다큐에 나온 스타 아파트의 경우도 그렇다. 이 작품을 설계한 마이클 말찬(Michael Maltzan)의 대화를 보면 집이 가진 사회적, 인간적인 가치와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무엇이 집을 만드는가? ⓒ CCA

위로의 공간이면서 삶의 구명줄인 공간, 그게 바로 집이다. 그건 화려할 필요도 없다. 30분이 채 안 되는 다큐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다큐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이클 말찬의 또 다른 프로젝트 크레스트 아파트(Crest Apartment)나 무지개 아파트(Rainbow Apartment),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멋지게 느껴지는 뉴카버 아파트(New Carver Apartment)들을 보면 건축이 어떻게 사회의 약자를 위하는지 알게 된다. 물론 그가 공짜로 하진 않았겠지만, 건축설계의 사회적 가치를 충분히 고민하고 건축설계를 감동할 만한 직업으로 임하고 있을 듯하다.
이렇듯 건축이 사회와 어떻게 호흡하고 유대관계를 형성하는지 새삼 느끼게 해준 다큐였다.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버려진, 스스로 버린 자들을 위한 건축의 역할이 충분히 있음을 발견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다큐는 건축이 한 국가의 정체성과 정치, 역사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위치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건축의 사회화라고 해야 할지, 사회 속 건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앞선 다큐가 ‘개인의 공간으로서 건축’을 말했다면, 이 다큐는 ‘국가의 공간으로서 건축’을 말한 셈이다. 왠지 모를 동조화로 감동받아야 할 것 같은(?) 루이스 칸에 대한 다큐다.

루이스 칸의 타이거 시티 ⓒ STC Production

이번 영화제에 우리가 흔히 작품으로 알고 있는 루이스 칸의 방글라데시 국회 의사당에 대한 다큐다. ‘루이스 칸의 타이거 시티’라는 제목은 몇 가지 궁금증을 자극했다. 흔히들 건축사의 건축사로 알려진 루이스 칸의 건물들은 예술적 영감과 자극제라고 한다. 나 역시 보스턴이나 샌디에고에 건축된 그의 건물 몇 곳을 방문하면서 우리나라 자연에 있는 사찰에서 느끼는 명상감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런 선입견은 루이스 칸에 대한 다큐를 클릭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다큐는 조금 시선을 달리 보여 주었다. 
하나의 건물이 그 사회에서 어떤 이유와 배경, 그리고 가치로 시작되고 유지되는지 보여준다. 마냥 못살고 배고픈 국민들의 나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짧은 역사도 알게 되면서 그들의 정체성과 국회의사당이라는 건물 하나가 상징하는 물성 이상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다큐에서 주로 말하려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면 다큐는 다양한 주제를 언급했다. 기차역에서 사망한 시점을 다큐의 시작과 마지막으로 처리한 구조에서 루이스 칸이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듯이 보이기도 하다. 또는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과 생각을 담은 오래전 루이스 칸의 강연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사상과 철학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더불어서 방글라데시의 기념비적 국회의사당 이곳저곳을 보여주는 것에서 여타 건축사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다큐는 루이스 칸의 건축작품을 연구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등을 방문한 건축전공자 타고르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신생국가에서 건축이 정치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바탕으로 어떻게 작동하며 그러한 의미가 무엇인지 목격하게 된다. 물론 루이스 칸의 건축 특유의 정서적 힘과 시적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을 고백하기도 한다. 콘크리트 건물 하나가 한 나라의 독립운동을 비롯한 역사적 배경을 담아내는지,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어떻게 주는지 목격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루이스 칸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마치 이야기처럼 풀어내고, 재료와 형태의 일체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타이거 시티에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방글라데시 국회 의사당은 콘크리트 노출로 마감된 기하학적 형태로 건축되었다. 기하학적인 구성은 지극히 모던하고,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라는 중동·인도 문화적 속성을 드러낸다. 그가 사용한 원과 사각형, 삼각형의 기하학 배치와 구성은 수평으로 띳장을 형성한 하얀색 대리석과 맞물려 수학을 형태화한 느낌까지 전해준다. 그러면서도 매우 지역적 건축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천천히 보면 볼수록 지역색이 드러나는 그의 작품은 신기할 정도다.
노출 콘크리트와 원형이나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패턴과 구성은 이미 르 꼬르뷔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작품에서 볼 수 있다. 안도 타다오, 데이비드 치퍼필드를 비롯한 현대 건축의 상당수 작품에서 유사한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유사한 형태와 재료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루이스 칸의 건축은 판이한 느낌을 전달한다. 
기계적 비인간성, 엄격함보다는 종교건축에서 느껴지는 숙연함과 사색적 분위기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루이스 칸의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시적 건축의 대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 다큐에서도 감독은 루이스 칸의 건축이 표현하는 침묵과 빛의 조화, 감성적인 전달을 화면으로 담아내는 것에 대한 고민을 나중에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 ⓒ New Yorker Film


이 다큐가 흥미로운 점은 통상의 건축을 다루는 방식과 다르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건축 작품의 예술적 측면을 강조하는 화면과 접근을 보여주거나 건축사 개인에 포커스를 맞춰서 진행한다. 반면에 이 다큐는 건축의 성격과 프로그램, 특정 건축의 본질이 되는 부분에 이야기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왜? 이 건축물이 건축되었느냐 하는 배경을 구구절절 설명한 것이다. 다양한 종교 국가인 인도의 독립 과정에서 영국이 강제로 국가를 분할했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종교적 이해와 종족 간 차이로 국가가 분리되는 과정을 세세히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 차이의 극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종교 국가인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로선 이해가 안 되지만, 종교를 바꾸는 것을 죽음처럼 여기는 사회에서는 영국이라는 점령국이 행한 국가 분리의 시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 종교 안에서도 언어와 종족의 다름은 결국 국가를 분리시켰다. 그렇게 신생국가 방글라데시가 탄생했고, 시작 시점의 의도와 달리 신생국가의 국회의사당으로 역할을 부여 받고 건축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복잡한 배경과 이야기로 완성된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은 건축이 어떻게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또 다른 루이스 칸을 다룬 다큐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눈물을 흘리며 루이스 칸의 노력과 건축을 이야기 하는 방글라데시 사람이었다. 그것은 루이스 칸의 아들이 만든 다큐 ‘나의 아버지, 건축가 루이스 칸’에 등장한 장면이다.
사실 루이스 칸을 책과 유작들로만 만나다가 이런 다양한 다큐에서 언급되는 그의 생각과 세상을 보니 건축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현업 종사자로 고민하게 된다. 모든 예술 작품이 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재해석되고 이해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다큐는 오히려 한 사회에서 건축이 주는 영향력과 상징성, 그리고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족(蛇足)을 달자면, 두 편의 다큐뿐만 아니라 이번 영화제에 나온 요른 웃존 등의 공공 건축물이 한결같이 멋지고 훌륭하다. 말 그대로 훌륭한 건축 유산이 될 만한 작품들이다. 남의 것만 부러워 하다가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양화진 성당이나 동숭동 문예회관에 가보면 기가 막힌다. 전부 80년대 이전 공공건축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예산도 더 많아지고 더 많이 짓는 공공건축들이 그리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집요한 감각의 공예적 디테일도 사라졌다. 공산품으로 손잡이가 붙어 있고, 태양광 판넬이 볼썽사납게 옥상에 올라가 있다. 80년대 이후 퇴보된 우리나라 공공건축. 여전히 당선 투시도만 예쁠 뿐이다. 왜 이럴까? 형식과 내용의 과정에서 내용보다는 형식의 강박관념과 압박감, 무엇보다 관료적 집행 체제가 그 원인 같다. 가끔 공공건축 담당자를 만나보면 외국건축사만 이야기한다. 아니다. 업무 프로세스가 관료적 경직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공건축작품이 없는 것이다. 알간?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