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5. 09:07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The elite’s ridiculous hypocrisy, a world of overlapping architecture Movie 'THE SQUARE’
영화 ‘더 스퀘어’가 시작되자마자 낯익은 경험이 데자뷰되면서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화면의 인터뷰부터 오래전 기억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왔다. 몇 해 전 프로젝트 컨설팅을 할 때 일이다. 클라이언트와 건축사사무소 임원, 담당 디자이너와 함께 디자인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건축사사무소 임원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하면서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 어려운 단어를 사용했다. 생소한 영어였던가? 매우 학술적이고 어려운 단어였던 것은 확실하다. 이어지는 조사와 추상적 단어들의 나열……. 굳이 회의에서 저런 어려운 문장과 단어를 쓰는 이유를 몰랐지만 나는 대충 그가 의도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듯이 앉아 있었다. 모르면서 분위기상 이해하고 아는 척? 나도 처음 듣는 단어였으니……. 그렇게 얼마를 이어가는데, 클라이언트가 못 참겠던지 말을 잘랐다. “제가 무식해서 잘 몰라 그러니까 쉽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어서 하는 말이 “설명을 우리말로 쉽게 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였다. 말 그대로 ‘갑분싸’였다. 사실 클라이언트는 40대 초반의 소위 명문대를 나온 잘 나가던 금융인 출신이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몇 해 전 내 기억을 이렇게 소환했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스웨덴의 유명 미술관 큐레이터 크리스티앙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난해한 문장을 섞어가며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의 흐름을 짐작했다. 어설픈 크리스티앙의 설명을 대충 이해한 척하는 기자는 더 웃겼다. 그녀의 맹한 표정 연기는 압권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그냥 아는 척하고 넘어가는 적당한 어른들의 세계.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내가 속해 있는 건축계 사람들을 만날 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건축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보면 마치 어린아이들이 숨겨놓은 자기만의 보물을 찾아서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누가 누가 더 모르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내기를 하는 느낌도 든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어려운 단어를 쓸 때가 많다. 항상 반성을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건축 교육과정에서 학생 때부터 이런 지적 허영과 나만의 단어 사용이 시작된다. 사전을 찾아가면서 처음 보는 단어를 자신들의 작품 타이틀로 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끼리 문화의 산물일 수도 있다. 예전에 의사들이 처방전을 손으로 쓸 때 온갖 어려운 라틴어 명칭이나 영어를 거의 알아보지 못하는 필기체로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환자로부터 경외감을 통한 권위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후설도 있다. 비밀 정보망 같은 군사용으로만 암호가 쓰이진 않는 것이다. 이런 암호의 효능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겐 신비감(?)이나 경외감(?)을 부여할 수가 있어서 순종적인 태도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 권위를 인정받는다고나 할까? 90년대 국제 건축 토론회였던 와이즈(WISE) 컨퍼런스에서 어떤 사회학자가 피터아이젠만의 자끄데리다 인용을 공격했었을 때 바로 이런 지점을 문제시했다. 어려운 문장과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클라이언트들에게 엘리트로 보이려는 전략이라고……. 외국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다니, 놀라웠다.
’더 스퀘어‘의 주인공 크리스티앙 역시 고상한 척(!)하고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크리스티앙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시대 상당수 사람들이 그렇다. 영화는 그런 지적 우월감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저열한 것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 속 홍보 매체 담당자들이 전시의 최대 홍보효과를 노리면서 회의하고 만든 결과물은 충격적이다. 사람을 죽이면서 인류애를 논하는 비 도덕적 광고는 의식의 균형이 깨진 우월한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소위 말해 전문적 표현, 언어에 빠지다 보면 대중과의 괴리가 점차 벌어진다. 그러다 보면 최종 결과물은 완전히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만들어지고, 그들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영화에서 인류애를 이야기하는 광고가 강조하는 점이 어린 금발머리 아이가 폭파되는 끔찍한 영상이란 점이 이를 설명한다.
건축 디자인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동안 격론의 대상이었다. 대중적 디자인 코드와 엘리트들만 이해하는 건축 디자인 코드의 차이에 대해서 말이다. 20년대 초반엔 고전적 장식이 야만의 표현으로 질타 받았다. 산업화와 생산성의 평등성은 단순한 형태, 장식 없는 형태에 대한 열광으로 바뀌었다. 고전적 어휘를 쓰는 건축사들은 시대를 읽지 못하는 낡고 편협한 이로 치부됐고,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며 구현해낸 이들은 속속들이 거장으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상당수 사람들이 인정하는 건축의 혁명과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점차 새로운 시도가 엉뚱한 방향에서 적극 활용됐다는 점이다. 장식 없는 단순성은 제작의 편의성에 맞춰 표준화되면서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상업적 목적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정서적 요소, 기억과 시간이라는 정서적 교감이 사라진 건축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쉽게 제조·양산하는 건축 디자인이 일반화 됐다. 덕분에 건축은 장인의 작품에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생산품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중심엔 예술가로 칭송받는 작가들이 있었고,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건축의 국제주의 양식화는 장소와 지역을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세계 각국에 등장했다.
천만다행으로 벌거벗은 임금님을 지적한 아이와 같이 천재적인 크리틱 능력을 갖춘 건축사 로버트 벤투리가 이런 맹목적 신앙심에 일침을 놓았다. 쉽게 이해하는 건축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 것이다. 장식이 정말 의미 없는 것인지, 대중적 이해도를 높이는 건축이 좋은 것인지 등등 논란의 주제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개인적 ‘아름다움’을 주장하는 이론과 건축론들이 나타났고 포스트 모던의 개인화와 감성적 건축 표현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솔직한 표현도 조금은 가능해졌다.
‘더 스퀘어’에서는 여러 가지 복선과 우아한 척하는 위선적인 인물들을 통해 우리 모습을 비추고 있다. 위선은 가식으로, 이중성으로 나타나고, 권위와 계급의 욕망이 이와 함께 한다. 인간의 수많은 본성들 중에 하나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도덕과 가치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일일 텐데, 감정과의 균형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은 이런 균형 속에서 존재할 뿐, 어느 한쪽이 커질 때 힐난과 비난의 욕망덩어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가식과 권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욕망과 솔직함도 마찬가지다. 위선도 마찬가지다. 이런 인간의 욕망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부드럽게 하는 것이 소위 예의(Manner)다. 예의 이면에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이 자리하는데, 때론 이런 예의의 균형이 깨지면서 직접적 또는 간접적 폭력이 드러난다. 예의라는 포장이 깨지기 직전에 우월적 권력을 가진 자가 행하는 위선적 동정은 이 영화에서 불편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익숙하게 느껴진다. 양파를 빼고 치킨 치아바타를 달라고 하는 노숙자에게 음식을 던지면서 “당신이 빼 먹어”라고 말하는 행동은 우월감이 내재된 거만하면서도 타인을 의식한 형식일 뿐이다. 진심의 공감이 아니라 한 마디로 ‘나는 동정심을 가진 엘리트야!’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편의점에서도 드러나며, 거리의 노숙자에게도 드러난다.
‘더 스퀘어’라는 영화는 이런 인류 보편적인 이면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했다. 우아한 지식인, 품위 있는 교양, 타인을 이해하는 위선적 인류애……. 영화는 이어서 이런 키워드들을 정면으로 풍자하고 있다. 나는 이런 모순의 인간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조차 없으면 정글의 야만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지식인 엘리트 인터뷰 자리에서 한 관객이 틱 장애로 온갖 저급한 단어를 쏟아 내자 누군가가 장애가 있는 사람이니 참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불특정 다수에게 비난 편지를 쓰고, 어린 아이에게 도둑으로 협박하는 것도 불사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는 장면은 저녁 파티에 모인 수많은 사회지도층의 행사 부분이다. 행위예술가는 야만의 고릴라를 연기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연미복과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은 단 한 명의 행위에 침묵하면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행위예술가는 적당한 관용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을 한명, 두 명 공개적으로 폭력적 행위로 파티 장소에서 쫒아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누구도 항의하거나 이를 중단시키지 않고 침묵한다. 행위에 조심하더라도 공개된 공간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들의 침묵은 또 다른 유형의 공포다. 사회적 우월감이 숨어 있는 엘리트 의식의 지적 허영이 까발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 공포인 것이다. 이것이 정글에서 맹수가 사냥할 때 연약한 사냥감 동물들이 숨는 것과 뭐가 다른가? 교육받았고 우아한 경제적 지위에 있는 그들이지만,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모두가 지켜보는 노출된 공간 한복판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 별 것 아닌 지적 허영과 의식의 한계는 노약한 노인의 반발로 표출되는데, 그 역시 극단적인 변화다. 한 명 두 명을 쫒아낸 행위예술가는 젊은 여성을 공개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하더니, 수많은 사람 앞에서 겁탈하려 한다. 순간 노인이 나선다. 그러자 사람들은 행위예술가를 막는 수준을 넘어서서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그전까지 참았던 ‘비 윤리적 폭력에 대한 저항’을 표출하듯이 말이다. 비겁함을 감추려는 또 다른 비겁함이라고 할까?
건축을 하는 자로서 ‘더 스퀘어’가 흥미로운 또 다른 점은 공간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공개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외면으로 비밀스럽고 사적인 공간이 된 연회장에서 행위 예술가가 뛰어다니는 장면과 한 여인의 소매치기 장면 등이 그렇다. 불특정 다수가 언제든지 사용하고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오지 않거나, 서로 외면해서 각자의 길을 가거나, 침묵으로 일관할 때, 그곳은 공개되고 열린 장소라고 해도 지극히 비밀스럽고 사적인 공간이 되어버리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장식이 없는 주택과 기하학적 구성으로 디자인된 현대적 감각의 홍보 사무실, 미술관 등은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적 엘리트라는 허영의 완장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음으로 인해서 정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여백인 셈이다. 카메라 앵글은 공간을 빛과 그림자로 담아내면서 이야기를 풍부하게 보완해 설명하고 있다. 인물들의 감정과 언어 외에 분위기로 설명하는 셈으로, 제3의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런 류의 인간 이면을 다룬 영화 중엔 도그빌(Dogville)이 있다. 이 영화는 연극이나 발레극처럼 무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흥미로운 점은 사실적으로 벽이나 가구 등이 묘사된 것이 아니라, 건축 평면처럼 바닥에 선을 그어놓은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벽이 있고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연기를 한다. 관객들은 벽 너머의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그들이 어떤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 보게 된다. 이런 무대 연기는 배우들에게 엄청난 상상력을 요구하는데, 특히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영화 ‘도그빌’의 주인공 톰은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광기의 인물이다. 겨우 열댓 명의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지적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엘리트 의식을 느끼는 ‘더 스퀘어’의 크리스티앙과 비슷한 심리적 지위다. 비교할 집단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계급의식은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비교당할 때 분노로 변한다. 놀랍게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무대장치 같은 영화 속 공간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충분히 영화에 몰입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의식적인 존재로 설정된 공간의 요소들, 벽체와 계단, 층의 설정들을 마치 실제 존재처럼 기억한다.
두 영화 모두 빛으로 공간을 유용하게 설명하고 있다. ‘더 스퀘어’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인터뷰 공간에 부분 조명을 비춰 명암을 극대화해 공간의 실제 깊이를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미술관에서, 기자간담회에서, 계단실에서, 각종 인터뷰와 성명 발표장면에서, 조명은 감독이 정말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표현 같았다. 그래서 매번 이 부분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공간은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 내려지고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건축은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건축 활동을 해왔던 수십 년의 기억들이 중첩됐다. 그리고 나 자신의 위선과 가식이 까발려지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혼자 창피하다고 할까? 글을 써야하는 관계로 영화를 분석하면서 보는 것도 솔직히 힘들었다. 이 영화 글은 마무리도 쉽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에잇! 이럴 땐 그냥 지코의 ’아무노래‘나 들으면서 마무리하는 것이 답이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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