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8. 09:06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Freedom and independence of form
플라스틱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몇몇 종은 이미 멸종되었을지 모른다. 코끼리와 바다거북이 그것이다. 코끼리의 상아와 바다거북의 등껍질은 이른바 ‘중합체’로서 오늘날의 플라스틱과 비슷하다. 19세기에 이 물질은 상자와 빗, 단추, 피아노 건반, 당구공, 안경테를 비롯한 여러 인공물을 만드는 데 요긴하게 쓰임으로써 무차별적인 밀렵을 낳았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에 이미 코끼리의 멸종을 우려하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다. 1856년, 마침내 최초의 인공 중합체, 즉 오늘날의 ‘플라스틱’에 가까운 ‘셀루로이드(celluloid)’가 발명되면서 코끼리와 바다거북은 한시름을 놓았다.
20세기 초에는 좀 더 진화된 베이클라이트(bakelite)가 발명되었다. 이 물질은 나무를 굉장히 잘 모방함으로써 라디오, 전화기 같은 초기 가전제품의 재료로 각광받았다.<사진 1> 초창기 가전제품들은 대개 기술적인 외양을 감추고자 가구를 흉내 냈다. 나무는 고가였으므로 나무를 잘 흉내 내고 저렴한 베이클라이트가 주로 쓰였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플라스틱인 폴리에틸렌을 비롯한 다양한 플라스틱 기술들이 이미 완성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주로 군수물자에 쓰이던 플라스틱은 전후에는 생활용품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터퍼웨어다. 이 플라스틱 용기는 가벼운 데다 깨지지 않고 투명해서 내용물을 잘 보여주며 밀폐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터퍼웨어는 기존의 도자기나 금속, 나무 용기보다 엄청나게 저렴했으므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사진 2> 그릇에 적용된 플라스틱은 그 뒤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로 확산되었다.
플라스틱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고무와 같은 값비싼 천연의 재료를 저렴한 인공 재료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플라스틱 기술이 자연을 보호하는 관대하고 착한 기술로 보이도록 만든다. 셀루로이드의 발명으로 코끼리와 바다거북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 나무로 공들여 의자를 만들면 나무라는 자연의 일부를 해칠 뿐만 아니라 그 가격도 아무리 낮춰도 10만 원 이하로 떨어뜨리기 힘들 것이다. 플라스틱 의자는 자연을 덜 낭비할 뿐 아니라 가격도 1만 원 이하로 낮출 수 있다.
두 번째는 디자이너와 생산자의 관점에서 플라스틱은 조형이 매우 자유로워서 큰 이익을 준다는 점이다. 소비자에게 새로운 물건처럼 보이는 상품을 더 쉽게 개발할 수 있다. 사실 기능에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형태와 색채를 기존의 재료보다 훨씬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은 단지 새롭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소유욕의 자극을 받는 현대인을 어렵지 않게 공략할 수 있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소비주의 디자인은 플라스틱의 개발로 완성되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60년대에 유행한 팝 디자인은 일상생활 속으로 플라스틱이 침투하지 않았다면 발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플라스틱 가구, 플라스틱 가전제품, 플라스틱 옷이 팝 문화를 이끌었다. 팝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베르너 판톤은 자신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판톤 의자를 1959년에 디자인했지만, 1967년에 가서야 비로소 생산할 수 있었다. 기묘한 모양의 일체형 의자는 기존의 재료로는 결코 생산될 수 없었고, 플라스틱만이 그 형태와 하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사진 3>
플라스틱이 이익만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다. 기존의 재료들이 갖고 있던 제약이 플라스틱에서는 엄청나게 느슨해진다. 그 결과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변신의 자유를 만끽한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플라스틱의 변신주의는 완벽하다. … 기원은 단수지만, 효과는 복수다.”(롤랑 바르트 『신화론』에서 부분 발췌)
장점은 언제나 단점이 되어 돌아온다. 조형이 자유로운 만큼 쓰레기가 양산될 가능성도 훨씬 높아진 것이다. 찰스 임스는 이 점을 우려했다. “화강암은 너무 단단한 물질이어서 그것으로 뭔가 좋은 것을 만들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으로 뭔가 나쁜 것을 만드는 것도 극히 어렵다. 플라스틱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 뼈대 없는 물질은 그것으로 무언가 나쁜 짓을 하기가 놀랄 만큼 쉽다. 별 노력을 하지 않고도 상상할 수 있는 각종 나쁜 일들을 할 수 있다. 물질 자체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작업을 하는 예술가 쪽이 스스로 규율을 설정하고 지킬 수 있을 만큼 강인해야 한다.”(수전 프라인켈 『플라스틱 사회』에서 발췌)
하지만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 대부분의 기업과 디자이너는 그런 규율을 정하지 않는다. 규율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킬만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누구나 플라스틱으로 얻은 자유로운 조형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플라스틱 키치 상품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플라스틱은 인간의 몸까지 키치로 만들어버린다.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스트들이 산업사회가 낳은 뛰어난 기술과 재료로부터 성취하고자 한 것은 기능주의나 합리주의 같은 거창한 사회적 구호가 아니라 ‘조형의 독립’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해본다. 그것은 저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 건축의 5원칙에도 드러나 있다.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기술과 재료로 그는 평면의 자유, 입면의 자유, 구조로부터 독립하기를 논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건물을 땅 위로 띄움으로써 건축이 그것을 속박하고 있는 고유한 땅의 제약을 받는다는, 수천 년 동안 지켜온 법칙으로부터도 독립하려고 한 것이다.<사진 4>
20세기의 온갖 재료들은 결국 창작자에게 커다란 자유를 선사했다.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함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주었다. 그것은 모두에게 축복처럼 보인다. 하지만 좋은 것이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 또한 이 세상의 법칙이다. 인류는 조형의 독립과 그것으로 얻은 이익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플라스틱의 발명으로 구원된 줄 알았던 동물들이 플라스틱으로 인해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동물이 해를 입으면 사람도 해를 입는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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