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퓨쳐리스트 도시 브라질리아의 혁명가 2021.10

2023. 2. 10. 09:09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The 20th Century city of future list, the revolutionist of Brasília

 

다큐멘터리는 지루하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본다. 가끔 정신없이 몰입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다. 이야기 구조가 있으면 그나마 보는데 감정이입이 되지만, 다큐멘터리는 좀처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시선을 끄는 강렬함이 있는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그렇게 시선을 강렬히 끄는 건축 다큐멘터리가 있어 그림을 구경하듯 1시간 30분을 몰입했다. 우리나라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A Machine To Live In>이다. 

환상적이고 공상과학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도시 풍경을 가진 브라질리아를 이렇게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다큐는 공상과학영화처럼 내레이션을 하는 식으로 영상이 구성됐다. 감독이 가히 신난 듯하다. 브라질리아는 20세기 초반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브라질의 야심작인 신도시 계획이었다. 그리고 유토피아적 사고와 혁명적 진보주의자인 오스카 니마이어의 천재적 성과물인 도시다. 30대의 나이에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아 과감하게 시도한 브라질리아의 도시 풍경은 반백 년이 넘은 지금에 봐도 가히 혁명적인 모양을 보여준다.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브라질리아 대성당(1970)
브라질리아 대성당의 내부 모습


흡사 공상과학영화 <가타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는 듯하다. 미니멀한 분위기와 묘한 기하학적 구성, 그리고 언밸런스한 아날로그적 재즈와 클래식한 음악을 배경으로 구성된 다큐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사실 이렇게 인공적인 조형미로 도시를 구성하고 만든다는 것도 놀랍다. 

 

오스카 니마이어 설계의 브라질리아 국회의사당(1960)

 

도시와 건축의 완결성은 계획하는 디자이너의 완벽한 의도도 구현되지 않는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디자인은 관상용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면 완벽하게 계획된 도시는 비인간적이고, 철저한 계급적 구성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파괴가 된다. 인간은 기계적 이성으로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탈과 감정, 적절한 오류와 부정확함도 필요한 인간적 균형추이다. 계산된 도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평등과 불공정의 대상이 되고, 필연적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수학적 도시였던 로마의 도시들이 중세시절 기형적으로 변형되고, 일그러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인간의 모순과 한계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파시스트적인 아키텍트들은 도전하고, 실패한다.

20세기의 흔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브라질리아가 신도시로 성공했는지는 논란이 많고, 인도의 샹디갈(찬디가르)처럼 계획도시의 한계가 있다는 말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 도시들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계획된 도시구조가 깨지고, 각종 바이러스나 침투한 기생충에 훼손된 신체 장기 같은 복잡하고 엉클어진 미로 도시처럼 이들 계획도시도 그렇다. 철저하게 거주자에 대해 계획을 했지만, 의도치 않은 도시 빈민층의 마을이 질서정연한 계획을 깨고 있다. 로마 시대 성 밖은 계획도시도 아니었고, 위생 인프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시아의 고대 도시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역사 속 도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도 계획도시가 많다. 1970년대 철저한 산업의 기능으로 구분된 산업도시에는 창원이나 울산 같은 계획도시가 있다. 그런가 하면 부동산 가격 폭등의 문제로 인해 만들어진 일산과 분당 같은 신도시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국가기관의 부동산 투자가 대박을 터트린 광교나 판교, 위례 같은 도시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철저한 관료들의 도시, 공무원 도시인 세종시도 있다. 모든 시설에 용도가 정해진 계획은 거칠다. 그런 거친 계획으로는 삶의 다양한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신도시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가? 아주 끔찍하다. 그런 끔찍함을 말하는 내가 까탈스럽고 유난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해가 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를 걸어 보았는가? 아파트 단지를 감싸고 둘러친 인도를 걸어보았는가? 범죄가 일어나지 않은 게 신기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도에 박수를 칠 환경이다. 

우리보다 더 빈부격차가 심하고, 갈등이 많고, 부패가 만연한 브라질은 이런 문제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한번 바라보자. 브라질리아는 비록 도시적 성공을 말하긴 어렵지만, 모험과 실험 그리고 철학을 바탕으로 시도된 도시다. 오스카 니마이어의 확신과 과감함으로 완성된 브라질리아지만, 중세도시처럼 의도하지 않은 도시의 변형과 보통 사람들의 개입으로 정교한 완벽함이 깨져있다. 

그러면 우리의 신도시들은 어떨까? 세종, 송도, 위례, 판교, 분당, 일산…… 기계적 완성도가 있을지 몰라도 어색함이 존재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억제된 곳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아마 브라질리아도 그런 듯하다. 다큐 중간에 주목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봐도 그렇다. 오토바이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행렬과 손가락 욕은 유머스럽기도 한 비꼼이다. 인공적 도시 풍경이 아닌 뒷골목의 자유로움과 엉클어짐, 불규칙한 모습들. 인간은 이성의 합리성과 변칙적 감정의 소유자다. 이런 인간의 본질을 단순화해서 하나의 성질로 정의를 내려버리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느긋한 틈이 있는 도시, 변화와 개인의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도시들은 브라질리아보다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도시들은 지속가능성을 허용하고 있다. 느긋한 계획(?)이라고 할까, 아니면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100%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계획이라고 할까. 어쩌면 개인들이 자유롭게 개입할 수 있는 허용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더 완벽한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브라질리아가 아니더라도 당장 우리나라 신도시를 가보면 숨이 막히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잠실의 계획된 도시 풍경 안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신천 새마을 시장을 아는가? 도시계획가 어느 누구도, 계획한 시장이 아니다. 정교한 가로세로형 바둑판 도시에서 사람들의 삶의 의지로 기하학의 정교함을 덕지덕지 깨가면서 만들어졌다. 바로 이런 변칙성, 자유의지,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다큐멘터리의 브라질리아는 계획만능주의자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중남미 최고의 공산주의자였던 오스카 니마이어의 환상이 아니었나 싶다. 계급이 평등하고, 계층 간 우열 없는 유토피아적 사고관이 만들어낸 그의 디자인이 실제로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차가움을 전달해 주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건 낯설음이었고, 신기한 모습이다. 한발 더 나아가 기묘한 샤먼적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브라질리아라는 대상으로 다큐가 전개되지만, 공산주의자 오스카 니마이어의 유토피아적 관점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이 다큐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만국공통 목적으로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어의 사용과 독점적 소유가 아닌 공동체의 삶. 인간과 기계의 조화, 그리고 욕망의 배제와 헌신. 이성과 감성의 경계선과 자유로움의 표현. 그렇다고 이 도시, 오스카 니마이어의 이런 실험이 마냥 비난을 받을 건 아니다. 적어도 20세기 초반 브라질 정치권이 모험과 실험, 도전을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 안에서 긍정적 가치도 분명 발견할 수 있다. 창조적 인간의 노력과 도전에 대한 가치다. 오스카 니마이어가 100년 넘는 삶 동안 도전해온 원천의 장소가 브라질리아다. 그의 탐구와 도전은 과감한 시각적 건축으로 살아남았다. 분명 인류의 유산으로서 가치는 인정할 만하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던 것 같다. 좌우 대칭의 엄격한 구성과 여백을 만들어서 화면을 만드는 것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그래픽이다. 그것만으로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 만족할 만하다. 사회학적 관점과 사회와 인간의 관계로 빚어지는 도시와 건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다소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미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별 4개짜리 추천 다큐로 인정할 만하다. 아울러 황당한 외계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자극한 것도 있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기하학적 구성을 만들어낸 오스카 니마이어의 이런 작품들이 최근 우리나라 건축 작품이나 인테리어에 대 유행이라는 점이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배제된 유니크한 기하학적 그래픽이 세련되게 느껴지게 한다. 마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수직 수평의 스케치가 유럽에 건너가서 그의 유기적 철학이 배제된 채로 데스틸의 미학적 동기로 작용한 것과 같다. 무척 흥미로운 현상이다. 오늘의 이런 유행은 어쩌면 단시간 소비되는 상품의 도구로 소모되는 건축적 공급 시대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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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