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건축의 계급적 포지션 2021.11

2023. 2. 13. 09:09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Squid Game, hierarchical position in architecture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포스터 ⓒ 넷플릭스

떠들썩하다. 십여 년 전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국위 선양하며 국뽕에 차오르게 하더니, 이번엔 BTS에 이은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선전하고 있다. 일종의 금메달을 딴 느낌이다. 온·오프라인의 뉴스도 연일 국위 선양(?)하는 시청률을 보여준 드라마 한 편에 흠뻑 취한 느낌이다. 하도 요란해서, 탈퇴했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재가입하고 연휴기간에 드디어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9편의 시리즈를 전부 보고 나서 느낀 느낌은… 영화 <기생충>의 버전 2 같달까? 워낙에 좋아하는 장르여서 그런지 엉덩이에 땀이 날 정도로 집중해 보았다.

<오징어 게임>은 총 9편의 시리즈로 되어 있다. 
드라마는 경쟁 사회에서 이탈, 또는 패배한 자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됐다고 해서 마냥 착하고, 순한 어린양이 아니다. 적당한 욕망과 게으름, 허영과 처절함, 상처와 더불어 거친 상황에서 나고 자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해서 초반에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진 않는다. 이 문제 많은 사회의 패배자들 앞에 쥐덫의 먹이처럼 끄나풀로 살짝 살짝 유혹하는 죽음의 게임의 문이 열린다. 게임에는 논리나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불필요하도록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어린이용 놀이를 게임의 룰로 선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줄다리기에 어떤 대단한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 역시 아주 단순하다. 뽑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구슬놀이는 조금 머리를 써야 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선수의 자질(?)이나 능력, 인성 등은 중요하지 않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이 드라마는 반어법과 상징,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폭력적인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반면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은유와 상징, 반어법과 우리 사회에 대한 어두운 면을 상기해 보면 소름 돋을 만큼 적나라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도덕적 보완 요소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함은 정글 그 자체가 아닌가. 그것은 우리가 이미 19세기 산업사회에서 겪었고, 당장 수많은 산업화 국가들의 초기 과정에서 겪은 바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난 1960~1970년대 공장 노동자나 수많은 생산 기반 노동자들에 가한 비 인격적, 반 인권적 폭력을 떠올리면 된다. 그 시절엔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웠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변화는 유사한 과정을 겪게 되며, 갈등이 발생하고 문제가 생긴다. 이런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는 그 사회의 몫이다.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치열하게 한 단계씩 극복해 나갔다.
경우의 차가 있을 뿐 현재 자본주의 경쟁 사회의 룰에서 탈락한 사회 패배자(loser)들에게 선택할 기회는 없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이 가능한 것을 꿈꾸었다 실패했을 수도 있고, 과잉 욕망 또는 지나친 욕심으로 실패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은 21세기 사회 속 경쟁에서 탈락하는 순간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 게임에 배팅하는 자본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중국인, 미국인 등 다양한 글로벌 유한계층이다. 이들에게 목숨을 건 보통사람들의 생존게임은 한낮 게임의 배팅 대상일 뿐이다. 이들의 게임 속 놀잇감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외딴섬에 있는 네모난 스타디움 같은 게임장은 이런 은유로도 보인다. 완전히 폐쇄된 곳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네모난 열린 상자 안에서 이들은 생사를 건 게임을 하고 있다. 이런 한계는 에셔의 공간같이 그려진 파스텔톤의 미로 공간에서도 드러난다. 보색관계로 구성된 핑크와 녹색, 그리고 노란색은 삼원색의 파스텔 톤 버전인 셈이다. 통상 만화적이고 유아적인 공간을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사용하는 화사한 색상이 죽음의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에 사용된 것을 미장센의 메타포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왜냐면 에셔의 끝없는 계단을 연상시키는 이동 공간의 구성은 영화 속 게임 주관자들의 강력한 지배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 게임의 장치들과 구성 역시 관념으로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것들을 공간화 시켰다. 사회는 경쟁 구도일 수밖에 없고, 이런 경쟁에서 승리자가 전리품을 모두 획득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온라인 비즈니스의 경우도 시장 지배력이 점차 커지면서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고, 오프라인 비즈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오징어 게임>의 승리자가 획득하는 456억의 상금은 바로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 기업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개별 기업들이 M&A가 되었든 단순 매각이 되었든 간에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끝없이 흡수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456억의 상금을 모두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화처럼 상대들을 희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살벌한 메타포는 게임 참여자들과 진행자, 보조요원들의 신분에서 드러난다. 게임 참여자들은 우리 사회 최고의 학벌이라는 서울대부터 공업고등학교 출신, 그리고 조폭과 의사 등 모든 사회적 출신과 배경을 망라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언제든 우리 사회 속 경쟁에서 탈락해서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들을 구경하고 관람하는 이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본가들이다. 이들 역시 이들 간 계급구조로 상호 계급의 구성이 생기기도 한다. 즉, 먹이사슬 구조처럼 윗단계, 그다음 윗단계 식으로 연속되어 있다. 이런 연속된 관계의 정점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역학적 관계는 약간의 상호관계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절대 지배자가 없다. 프런트맨과 VIPS의 관계에서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건축계 비즈니스가 중첩되었다.
공공이 되었건 민간이 되었건, 건축사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이들 ‘갑’의 행태들이 중첩되었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건축사는 본인의 작품을 공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공공건축은 여기저기 완장을 찬 이들의 간섭과 오지랖 넓은 지적질로 휘청이곤 한다. 같은 건축사사무소는 어떤가?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은 발주처로부터 당한 것을 한풀이라도 하듯이 외주비를 지연시키고, 덤핑을 유도하며, 물밑 로비를 통해 프로젝트 계약을 한다. 이들은 비즈니스 테크닉이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로 설계외주를 통해 수익을 보전하고, 을의 지위를 ‘갑’의 지위로 신분세탁한다. 제한된 시장에서 건축사들은 네모난 게임장에서 벌이는 죽음의 게임 참여자들처럼 과잉 서비스와 무한 정보제공, 낮은 설계비를 감수하면서 제로섬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 참여자들의 서로를 죽여가면서 게임에 몰두하듯이 상호간의 허점을 휘두르며 완장질도 하고 있다. 그런 게임 모두 게임 주체자의 손바닥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사실 건축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사회 비판적 자아 고찰이 건축적 형태나 흐름으로 나타나긴 힘들다. 건축은 그 자체가 미학적 시각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건축도 최근에는 서서히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왜냐면 건축의 상당수는 사람들의 거주공간인 주택이고, 오늘날 주택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의 하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간 삶의 고통과 투쟁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오징어 게임>도 근본적으로 먹고사는 삶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건축은 우리가 벽을 뜯어 먹고 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잠잘 곳만 있으면 해결되는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먹고사는 삶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건축이 잉여자산으로 활용되고 상품과 이익 수단으로 확대되면서부터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전 세계 곳곳에서 주거문제가 삶의 필연적 복지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택이 상품으로 공급되었던, 또 정책적 이유로 사회공공주택이 공급되었던 건축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건설되는 것은 19세기 이전엔 없었던 일이다. 건축은 잉여 생산물이 아니며, 소수의 사용자를 위한 전형적인 주문 제조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공공은 공공대로 공급될 주택을 만들어야 했고, 정치적 이슈로도 경제적 이유로도 주택이 필요해졌다. 보다 생산적이고 다량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고, 이는 고밀도 주택이 탄생하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국가 중심의 통제권이 강한 정부에서는 아파트라는 대량 공급 시스템을 국가적 주택 정책으로 제공하며, 민간 중심의 국가에서는 민간에게 허가권을 주면서 공급하도록 한다. 

이렇게 공급을 해도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주택이다. 주택은 어떤 재화보다 많은 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문화권에 따라서 공공주택에 투입되는 비용은 더 커진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온돌문화로 비용이 훨씬 더 투입된다. 정책은 민간과 공존하는 공급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민간에 의존하는 경우는 수익창출의 기회를 극대화하려는 특성상 대중적 주택보다 고가 주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주택 공급은 각 사회 경제적 계층에 균일하게 매칭되기 극히 어렵다. 이런 불균형의 간극을 메우기란 정말 쉽지 않다. 

민간이 공급하는 주택은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고,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가격 상승의 동력이 된다. 가격 상승의 결과로 주택은 투자 상품이 된다.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거주해야 할 상품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가장 안정된 수요 상품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택은 캐피탈 게인(Capital Gain)의 도구화가 되어 공개시장에 던져지고 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주택을 매입하기도 하지만, 가장 안정적으로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해 투자대상으로 매입하기도 한다. 이런 잉여 투자수단은 과소유 대상이 되며, 다시 가격 상승의 압박요인으로 작용한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이 과정에서 <오징어 게임>의 패배자처럼 타이밍을 놓친 사람들은 거주안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식시장처럼 솟아오르는 주택 가격은 점점 투자 게임 참여자를 확대시키면서 한 번 기회를 잃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들의 노동 소득으로 결코 구입하기 어려운 가격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사회 작동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이미 상승한 주택 가격을 끌어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회, 국가 경제가 곤두박질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의 구슬치기처럼 게임에서 진 사람은 총을 맞고 죽을 수밖에 없을까? 주거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악에 받쳐서 죽자사자 비 오는 날 온몸을 던져 싸울 수밖에 없을까? 이런 사회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주택은 21세기의 새로운 주식(主食)의 대상인데 말이다.

사실 이런 시각에서의 주택 공급 노력들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20세기 초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자 주택, 사회적 주택, 공공 임대 주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국가나 민간 자선 단체 중심으로 공급되고 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나마 반가운 사실은 초기 공급된 사회적 가치의 공공주택들은 ‘공급’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주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언급했다던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적 가치로서 비를 피할 보송한 공간 정도로 만들어 공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색내기 공급이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왜냐면 사람은 단백질과 세포로 구성된 생물체가 아니라, 생각과 감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짜에 준하게 제공되는 공공주택이라 할지라도 심리적 안정과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처럼 타인의 죽음으로 획득되는 456억의 거금이 아닌, 누군가의 희생보다는 협력과 사회 재생산, 재기의 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공공적 주택이어야 한다. 

이미 다양한 사례에서 이런 협력과 사회 재생산의 시각을 제공하는 주택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건축은 힘을 발휘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 단지 ‘공급’이 아닌 사람의 심리와 감성을 이끌어내는 디자인된 주택이 등장하고 있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가 공급했던 ‘메이크 잇 라잇(Make it right)’ 재단과 함께 했던 프랭크 게리의 작품 같은 세계적 건축 작품들이 있다. 매번 전미 건축상 AIA를 수상하는 미국 홈리스지원 단체 ‘Skid Row Housing Trust’ 재단이 공급하는 공동주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매년 각종 건축상을 수상하는 유럽의 수많은 사회적 주택들 역시 마찬가지다. BIG를 세계적으로 주목 받게 만든 저소득층 공동주택도 있고, MVRDV를 스타로 만든 네덜란드 노인 공동주택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정치적 이슈로 등장한 사회적 주택, 공공 임대는 우리 사회에서 혐오시설로 치부되는 형국이다. 누구보다 이를 설득해야 할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이를 공격한다. 서유럽의 우파 정치인이나 미국의 트럼프조차 하지 않는 발언을 일삼는다. 이건 좌·우를 벗어난 무개념 선동이다. 슬픈 것은 이런 선동에 동의하고 박수치는 이기적 심리가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주택, ‘공공’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공동주택들은 이름을 숨기고 있다. 
 
인도의 계급사회를 지적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건축의 계급을 극복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에 숨어 있는 경제적 계층의 위상을 도시와 건축에서는 없애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착한 본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에서 우린 다음과 같은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은 희망의 존재라는……. 슬프면서도, 아프면서도 <오징어 게임>의 핑크색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인간성에 대한 희망 때문인 듯도 싶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