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3. 09:11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North Korean Architecture Watch 09
North Korea's architecture education ①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후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건축대학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해인 2012년 평양건설건재대학의 명칭을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바꾸었으며, 2013년 현지지도 시에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2014년에는 평양건축종합대학의 명예총장이 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12월에는 노동신문 한 면을 할애하여 평양건축종합대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최근 평양건축종합대학은 북한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철도, 도로, 항구, 발전소, 전력망, 경제특구개발 등 대규모 건설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건축기술수준, 건설산업, 건축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북한의 개발 시 북한건축인력의 활용이 필수적이므로 북한의 건축교육현황 파악과 건설관련 인력양성방안 검토가 필요하다.
1. 북한의 교육
일본은 이미 1900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09년에는 6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으므로 1936년 조선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26%, 해방 당시에도 초등학교의 취학률은 43%(남학생 60%)에 불과하였다. 1935년 일본에서도 중등학교 진학률이 20%를 넘지 못하였고, 대학진학률은 3%에 불과하였으므로 식민지 조선인 중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주 적은 숫자였다. 1944년 전문학교(2~3년제)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1만9,658명(당시 인구 약 1,500만 명)에 불과하였다.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남북은 1945년 해방 후 국가 건설을 위하여 교육체제 정비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남북은 모두 제도교육 정상화를 위하여 ▲초, 중등교육기관의 학제개편 및 확대 ▲초등의무교육 실시 ▲고등교육기관 설립 등을 추진하였고, 문맹률이 78%에 달하였으므로 문맹퇴치 운동도 시행하였다.
북한은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교육제도 수립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력 양성 ▲민주개혁을 위한 사상의식개조 등을 교육의 목표로 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1945년 11월, 일제강점기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인민학
교’로 개칭하였으며, 학교 교육제도는 소련의 교육제도를 참고하여 1년제 유치반
을 포함하여 인민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대학 4-5년으로 정
하였다. 1949년에 북한은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98%에 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초등의무교육을 1950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미루어져 1956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1958년에는 의무교육을 7년으로 늘렸으며, 1969년에는 9년제 중등의무교육(인민학교 4년, 중학교 5년)을, 1976년에는 취학 전 교육 1년과 인민학교 4년 및 고등중학교 6년을 합쳐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후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발표하고, 2017년부터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12년제 학제는 입학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 3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한은 6년제 초등의무교육을 1950년부터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1953년 휴전 후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59년 취학률이 96%를 넘어 초등의무교육이 정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열악하고 부족하여 한 반이 70~80명에 달하는 과밀학급이 많았고, 2부제·3부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수가 증가하고, 출산율도 떨어지면서 교육환경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남한의 중학교 의무교육은 도서지방 등을 대상으로 1985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된 것은 2004년이 되어서다. 일본은 1947년에 9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많은 국가들이 1970년대에 9년제 이상의 의무교육을 도입한 것에 비하면 남한의 중등의무교육 도입은 많이 늦은 것이었다.
해방 후 북한의 교육정책에서 의무교육 외에 시급하게 추진한 것은 종합대학교 설립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에 조선인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해방 직후 조선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가 매우 적었으며, 북한지역에는 그 수가 더욱 적었다. 일제강점기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제국대학과 전문학교를 포함하여 20여 개가 있었고, 194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60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에는 평양의학전문학교, 평양공업전문학교, 함흥의학전문학교 등이 있었을 뿐이다.
1945년 광복 후, 남북한에 일제 군국주의적 교육정책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고등교육기관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남한은 1946년 4월 경성제국대학의 3개 학부, 관립전문학교와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을 발표하였으며,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대학 설립 후 일부 학생과 교수들은 대학교의 통합과 학교에 대한 경찰의 간섭 반대, 그리고 친일 교수 배제 등을 주장하며 국대안 반대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운동은 해방 후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좌·우익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이 월북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은 해방 후 국가 건설을 위한 지식인과 권력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하여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우선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1946년 2월, 초대원장 김책)’, 당 간부 양성을 위한 ‘중앙당학교(1946년 6월, 초대교장 김일성)’, 경제관료 양성을 위한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1954년 인민경제대학으로 변경)’를 설립하였다. 이들 교육기관은 2~6개월의 단기교육과정으로 당장 필요한 간부인력을 양성하는 학교였으므로, 국가 건설을 위한 고급인력의 체계적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이 절실하였다.
북한은 종합대학을 설립하고, 종합대학을 모체로 하여 분야별 대학을 설립하는 방침을 세우고 1945년 11월에 평양대학건설기성회를 결성하였다. 건설기성회는 김일성을 고문으로 최용건 위원장, 강윤범 외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통일뉴스, 2016.10.02). 1946년 5월에는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일부 대학 설립자금은 주민들의 모금으로 충당되었다. 북한 지도층에서는 대학 설립보다 경제분야에 예산을 사용하여야 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대학 설립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이 높았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대학을 설치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법령 40호를 발표하였다. 결의는▲1946년 9월 1일 신학년부터 평양시에 북조선종합대학을 설립하며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는 대학으로 승격해 종합대학에 편입시키고 ▲본 종합대학에 조선해방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한 조선민족의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부여하여 ‘김일성대학’이라 칭한다 등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법령 서문에서 김일성은 ‘진보적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민경제와 문화를 건설할지 도력 있는 고등기술인들을 발달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여’ 대학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9월 15일 개교식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1946년 10월 1일 개교하였으며, 공식적인 창립일은 1946년 10월 1일로 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서둘러 창립한 것은 남한의 서울대학교 설립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은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대동공업전문학교의 후신)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학부로 편입시켜서 설립하였다. 대동공업전문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금광왕으로 불리던 이종만이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한 숭실전문학교 건물을 인수하여 설립하였으며, 1944년 태평양전쟁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총독부에서 인수하여 관립인 평양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이종만은 최근 강동원 배우의 친일파 외조부로 화제가 된 적이 있으나, 단순히 친일파로 보기는 어려운 이상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대학은 평양공전 2학년과 평양의전 3학년 학생을 대학 1학년의 자격으로 입학시켰다. 창립 당시 7개 학부, 24개 학과, 1개 예과가 설치되었으며, 68명의 교원과 1,500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었다. 해방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특히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노동자와 농민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하여 대학교 설립과 동시에 3년 과정의 예과를 개설하였다.
부족한 교원은 남한의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초빙하였다. 남한에서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면서 실직하였거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지식인 또는 국대안에 반대한 교원들을 초빙하였으며, 특히 과학·기술계통이 많았다.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은 8개 학부, 학생 수는 3,813명이 되었다. 초기에는 교사가 없어 흥국공업중학교, 창생상업중학교, 평양사범학교, 인민재판소, 검찰청 건물 등을 교사로 사용하고 일본인 소유의 호텔과 식당은 학교 식당과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1948년 9월에 모란봉 동남쪽 용남산 기슭에 대학 본 교사가 건설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9년 첫 졸업생을 내보냈다. 현재 김일성대학교는 부지 156만 제곱미터에 건물면적은 40만 제곱미터이며, 학생 수가 12,000여 명에 교직원 수는 2,500여 명이다.
1948년 7월 7일에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제69차 회의에서 결정 157호 '북조선 고등 교육 사업 개선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4개의 학부(공학부, 운수공학부, 농학부, 의학부)를 분리했다. 이를 모체로 하여 평양공과대학(현 김책공업종합대학), 사리원농업대학(한국전쟁 전에 원산으로 옮겨 현 원산농업대학), 평양의과대학 등 3개 대학을 새로 창설하였다. 종합대학에서 분야별 대학으로 분리는 소련의 교육체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김태윤, 「해방 직후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기관 설립과 체제형성(1945~1950)」, 서울시립대 통일평화연구원, 통일과 평화 10집 2호·2018, p115~155). 그 외에도 1947년에는 북한 최초의 공업대학인 흥남공업대학(현 함흥공업화학대학)을, 1948년에는 보건의료인력확보를 위하여 함흥의과대학, 청진의과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회생된 독립운동가 자녀의 교육도 해방 후 북한의 중요한 교육정책 중 하나였다. 김일성은 해방 후 중국 동북지방 및 국내에서 항일유격대 유자녀와 생존한 항일유격대의 가족들을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하여 이들을 귀국시켰으며, 1947년 10월 평안남도 대성군 간리역에 임시교사를 설치하여 개교한‘평양혁명자 유가족학원’에 입학시켰다. 1948년에 만경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1958년에는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사한 군인들의 자녀들도 입학하게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중고등학교과정 6년과 군사교육 2년 등 8년제 과정이며, 졸업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및 각종 군사학교에 진학하여 북한의 핵심 엘리트로 길러지게 된다. 만경대혁명학원의 졸업생은 총리를 지낸 연형묵과 최영림(1기 졸업생),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김영춘, 국방위 부위원장을 지낸 오극렬 그리고 최근 핵심 실세로 떠오른 최용해, 김영철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다. 만경대 유자녀학원 외에도 남포유자녀학원(남폭혁명학원), 신의주유자녀학원, 해주유자녀학원 등도 설립하였다.
1980년대,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공식화되면서, 교육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교육의 특징으로 ▲과학기술과 외국어교육의 강화 ▲수재교육의 도입 ▲고등교육의 대중화와 이원화를 들 수 있다.
과학교육을 위하여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의 교과내용에 수학, 과학 및 전자계산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여 교육하고,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기계대학, 평양철도대학 등에 프로그래밍학과, 전자계산기학과, 정보처리학과 등 관련 학과를 설치하거나 기계, 전자, 자동차 부분의 단과대학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외교역 확대와 외국선진기술 습득을 위하여 인민학교, 고등중학교에서 외국어교육, 특히 영어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평양에만 있었던 고등중학교 과정의 외국어학원을 각 시도별로 12개 추가 설립하였다.
1984년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수재교육을 시작하였다. 고급인력양성이 국가발전을 이끈다는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1985년에는 각도재지 12개지역에 제1고등중학교를 설치하였다. 1995년에는 각 도와 시에 26개의 제1고등중학교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1999년에는 그 수를 더 늘어났다. 그리고 남한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예술분야의 영재교육기관인 ‘금성학원’도 1989년 ‘금성제1고등중학교’로 설립되었으며, 나중에 인민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대학교과정이 있는 금성학원으로 바뀌었다.
1986년에는 대학입시에 예비시험제도를 도입하였다. 북한의 대학입시는 각 기관, 기업소별로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 인원이 정해져 있다. 성적, 품행, 성분, 군대근무 등을 고려하여 인원을 추천하면, 추천받은 인원은 각 대학별 시험을 치뤄서 합격하면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김정일은 당 간부의 자녀이면 성적이 낮아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비판하면서 지역별 예비시험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예비시험을 본 후 성적을 고려하여 대학별로 시험을 볼 수 있게끔 추천을 받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다.
김정일은 1984년 고등전문학교를 단과대학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1984년 20개의 고등전문학교가 단과대학으로 개편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3-4년제 단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대학 수는 1960년 78개에서 1970년 129개, 1980년 170개, 1990년 260개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정책은 중심대학(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을 통하여 핵심인재를 양성하고 단과대학, 전문대학을 통하여 지방의 산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이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후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다. 학제를 11년에서 12년으로 개편하고,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발표 후 5년이 지난 2017년부터 12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의무교육 학제는 학교 입학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 3년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학교시설 개선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정보화 등 첨단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했으며, 일반 노동자 대상 원격교육 등에 대한 인프라도 구축하였다.
의무교육을 12년으로 개편한 것은 국제적으로 의무교육 혹은 무상교육이 12년제로 실시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북한이 만 17세에 사회에 진출하는데 반하여 외국은 19세에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중등교육 다양화와 직업교육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참고문헌
신효숙, 「북한의 체제와 정책」中 12장, 명인문화사, 2014, p.354~380.
글. 변상욱 Byun, Sangwook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도라산출입사무소장·건축사·시공기술사
변상욱 건축사·건축시공기술사
1999년부터 현대아산에서 근무하면서 금강산관광지역 건 축물과 평양체육관 등 건설사업관리업무를 수행했으며,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근 무하면서 개성공업지구 종합지원센터, 기술교육센터 등 건 설사업관리와 공장건축 인허가업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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