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정체성 ③서울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화 도시의 시작, 도시 원형의 변형 2023.3

2023. 3. 17. 16:05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Identity of the City ③ _ Seoul, late 19C - early 20C : Beginning of modernization city and Transformation of urban origin

 

■ 변화의 배경 

 

도시 주체의 변화 
1897년 대한제국의 시작으로 조선왕조 체제는 해체되었고, 황제국으로 1910년까지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됐다. 1910년 서울은 “경성(京城, 도읍의 성이라는 의미로 보통 수도를 이른다)”으로 불리기 시작하며, 일본 식민통치의 중심지, 일본 영토의 일부로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자본주의 도시의 시작 
조선왕조시대의 신분에 의한 계급의 위계는 18세기 초부터 상인의 부와 그에 따른 권력에 힘입어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선 말 개항을 통해 외국인들의 상업활동과 함께 국제무역이 활성화되고, 일부 조선인들의 기업형 활동으로 상업자본이 도시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국가소유의 토지나 개인의 무신고 토지를 이용하여 공적 공간, 도로를 정비하고 공원과 학교를 짓는 등의 사업을 시작하면서 토지거래, 토지에 대한 개별 소유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상업과 산업도시로서 서울은 근대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도시 구성원의 변화 
이 시기 서울 도시 구성원의 주요한 변화는 지방 인구의 유입과 외국인의 등장이었다. 일제강점기 토지의 사적인 소유로 시작된 자본주의 도시사회로 전환점을 맞이한 서울에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거나 소유권을 선언할 수 없는 지방의 농민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지난 시대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사대문 안 외국인 거주가 허용되며 중국인, 일본인 및 서구에서 온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면서 서울 거주자의 구성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도시연구, 도시계획의 시작 
대한제국시기에 시작되었던 도시근대화 사업은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 1909년 지적조사, 1910~1918 토지조사사업, 1912년 경성부시구개정 제정, 1913년 시가지 내 토지대장 완성, 1913년 시가지건축취체규칙 제정, 1918년 내무성에 도시계획조사회와 도시계획과 설치, 1921년 경성 도시계획연구회 조직(1927년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 1928년경성도시계획조사서, 1930년경성도시계획, 1932년 경성도시계획자료조사서 발간),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 제정, 1936년 경성시가지계획수립으로  근대적 도시계획에 의한 도시 정비와 개발, 관리가 시작되었다. 

 


■ 도시 계획의 내용들 

 

대체되는 도시상징 체계 
일제의 도시 관리는 조선왕조의 행정수도로서 만들어진 기존 도시 상징체계 위에, 새로운 도시 상징의 배치를 통해 그 표상성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새로운 상징들은 근대화와 식민통치의 상징이라는 양면성을 띠며, 대한제국 말기부터 시작된 근대화 과정의 맥락성 판단에 어려움을 안겨준다. 대한제국 말기부터 자동차와 트램이 등장하며 시작된 성곽의 철거로 도시 경계를 나타내는 물리적 상징요소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914년 원구단 철거 후 조선철도호텔 건설, 1926년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건설로 고궁의 주축 변형, 1926년 경운궁 앞 경성부청사 건설, 1925년 창덕궁을 창경원으로 개조, 1932년 종묘와 창덕궁을 단절하는 율곡로 개통 등, 기존 도시 원형 상징장소의 중첩, 변형, 철거 등은 식민통치시대를 상징하는 장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림 1> 1917년 경성부관내도 ⓒ서울역사박물관


도시 인프라 재구성 
도로 정비 파리와 워싱턴의 도시계획을 참조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조성된 경운궁 앞의 방사형 도로망은 새로운 중심축을 만들어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주요한 도시사업은 도로 정비와 도로망의 구축으로, 현재 도시 서울의 근간이 되는 도시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 근대도시로의 변화를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1911년 4월 ‘도로규칙’의 제정으로, 향후 도시의 주요 축이 되는 서울역, 한강의 남쪽 용산과 마포까지 확장된 도시지역과 기존 도심을 연결하는 도로들을 신설하고, 도심 내 도로들은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여 선형의 격자형태로 조성하는 도심내 도로망을 재구성하였다. 도로정비사업의 계획 범위는 총 575개 노선, 총 연장거리 22,424.6킬로미터로,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림 2> 1937년 조선총독부청사(1926년) 일대
<그림 3> 1925년 남산 조선신궁

 

전차의 개통 1899년 종로에 개통한 돈의문~흥인지문 구간 서울의 첫 전차는, 대한제국 시기에는 4개, 1943년에는 지선을 포함한 노선이 16개에 달하며 1968년까지 운행되었다.

 

<그림 4> 1935년 경성부관내도 ⓒ서울역사박물관
<그림 5> 1940년대 남대문 일대
<그림 6> 1930년대 경성부청사(1926년)일대
<그림 7> 1900년대 한강 철교
<그림 8> 1941년 경성교통계획도 ⓒ서울역사박물관

 

토지이용계획 수립 
경성에 대한 일련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도시관리를 위한 계획들도 수립되었다. 1928년 수립된 토지이용계획은 도시를 상업(6.8%), 공업(20%), 주거(50%), 특별 지역(23.2%, 공원 포함) 등 4개의 용도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1930년의 경성계획안에서는 1928년의 계획안에 비해 약 8,793,389제곱미터(266만 평)가 추가되며, 주거가능지(71.5%), 주거지역(39%), 상업지역(12.3%), 공업지역(12.9%), 미지정지역(7.3%, 향후개발을 위한 유보지), 주거불능지(28.5%)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1936년 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 결정된 경성시가지계획안은 3월 26일자 총독부 고시 180호로 고시되며 확정되었다. 이 계획인구는 1965년 1,100,000명을 기준으로 계획면적은 135,355,032제곱미터로 결정되었다. 용도지역은 주거지역(68%), 상업지역(4.4%), 공업지역(4.9%), 미지정지(22.7%)로 이후 1941년 풍치지구 29,268,000제곱미터를 지정하였다.

 

<그림 9> 1928년 토지이용계획 ⓒ서울도시계획연혁 vol1, 서울시, 2001


공원과 광장 계획  
대한제국시기에 조성된 탑골공원을 제외하고 서울에는 1912년 남산한양공원, 1915년 철도공원, 1919년 장충단 공원, 1924년 사직단 공원, 효창공원, 1925년 경성운동장, 삼청공원, 앵정공원, 창경궁 , 덕수궁 공원  등 도시 면적의 1.2%에 해당하는 총 116ha에 이르는 21개의 공원이 조성되었다. 1936년 경성도시계획안에 따라 대공원 18개소(62.7%), 도로공원 13개소(17%), 근린공원 23개소(17.2%), 아동공원 86개소(3.1%) 등 총 140개, 13,807,730제곱미터의 공원이 계획되어 고시되었다. 다수의 공원 외에 최초의 계획광장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앞 광장이 조성되었다.

 

<그림 10> 1930년대 조선은행 앞 광장
<그림 11> 1930년대 탑골공원 일대

 
확대되는 도시화 지역 
1928년 계획에 따라 도시화 지역은 남대문에서 중앙역까지 이어지는 주축을 따라 용산까지 확장되었다. 트램 및 철도 인프라와 함께 동대문에서 신설동, 청량리를 거쳐 왕십리로 이어지는 도로 축을 따라 도시의 동측 지역이 개발되었고, 1930년에는 영등포지역이 추가되어 서울 남서부 한강을 넘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25년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로 도시화가 진행된 한강 일대에 큰 피해를 입고, 한강변과 지천 일대의 제방공사를 시작하며 도시외곽지역의 정비 또한 본격화되었다. 당시 서울 지역의 피해를 기록한 경성부수재도는, 도심일부를 제외한 서울 전역의 피해를 알 수 있다. 

 

<그림 12> 20세기 전반 서울도시영역의 변화, 이미지 재작성 ⓒ서울도시계획연혁vol1, 서우리, 2001
<그림 13> 20세기 전반 서울도시영역의 변화, 개념 다이어그램 ⓒ김선아, 2008
<그림 14> 1930년대 용산역(1906년) ⓒ용산공원홈페이지
<그림 15> 1930년대 말 영등포공업지역일대
<그림 16> 경성부수재도京城府水災圖 ⓒ서울역사박물관

 

도시 재개발 
시가지개발사업 수단들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하면, 시가지개발사업으로 ▲건축부지조성사업 ▲토지구획정리사업 ▲일단의 주거지경영사업 ▲일단의 공업용지조성사업의 4종류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 사업에는 토지구획정리사업, 일단의 주거지경영사업이 사용되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 아디케스법(Lex Adickes)을 도입한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토지의 재구성은 신속하고 효율적인 도시 재개발에 용이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 방식은 주택지개발을 위한 목적 외에도 도로조성 등공공의 도시개발 사업수단으로 2000년까지 사용되었다. 1945년까지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개발된 지역은 총 10개지구 18,611,187제곱미터(5,629,884평)였다. 각 필지에 도달하는 도로의 폭은 4미터로, 현재까지 건축법에서 규정하는, 건축 가능한 땅을 의미하는 대지의 기준이 되었다.

 

<그림 17> 종로 토지구획정리사업 계획도 ⓒ서울도시계획연혁 vol1, 61페이지, 서울시, 2001
<그림 18> 1933년 종로일대
<그림 19> 1930년대 후반 안암동 1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된 개량한옥지구 ⓒ성북마을아카이브



■ 도시의 형성 


분화되는 도시영역들 
도시 구성원의 변화로 거주지역의 상징성 또한 변화하였다. 지방에서 유입된 농민들은 경제적 취약 계층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산기슭, 구릉지, 다리 밑 등의 장소에 정착하여 1950년 한국전쟁 이후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는 특징적인 지역을 형성하여 20세기 후반의 주요 도시이슈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해결과제라 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서구인들의 정치, 종교, 문화, 교육 관련 근대화 활동지로 형성된 정동, 일본인 거주 및 활동영역으로 남촌이라 불린 청계천 남측의 을지로, 명동, 충무로 일대와 용산 일대, 서대문 일대 중국인들의 영역이 형성되었다. 조선인들의 활동과 거주지는 청계천의 북측인 북촌 중심에 형성되었다. 서울은 단일 문화가 아닌 다양한 외부 문화를 반영하며 도시 영역들은 외국인의 중심지들, 시민들, 식민 통치의 공간들로 분화되었다. 

나무 구조의 위계적 형태에서 동질한 연결성의 격자형 공간 구조 형성 
기능 중심의 도로조성 철도, 트램, 자동차 등 새로운 이동수단의 등장과 이에 따른 도로의 정비로 도시는 기능적으로 규칙화되고 분절되기 시작했다. 분지형 지형으로 중앙의 종로와 궁궐을 연결하는 중심축의 도로에서 낮은 위계의 도로들로 연결되는 나무구조의 위계를 따르는 도로 구조에서, 동서축, 남북축의 동질한 연결을 위한 격자형 도로망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교통 인프라와 도로들은 도시 이동의 흐름을 변화시켰고, 4대문 안에 한정되었던 도시 삶은 도시 내•외부 영역과의 연결로 확대되었다. 한강 남쪽을 연결하는 도로와 교량 건설은 사람의 보폭으로 계산되던 전통적인 거리의 계산 방식을 극복하고, 인간의 척도를 교통수단의 속도로 측정하는 시간 척도로 변화시켰다. 사람이 걷는 길로 일종의 열린 광장 역할을 했던 넓은 폭의 도로들의 성격 또한 변화를 맞이한다. 도심의 동서축인 종로는 보행자와 이동 수단 사이의 구분이 없는 길이자 광장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다목적 공간에서, 부분적으로 보행자 전용 인도가 있는 이동 수단 중심의 도로로 변화하며 거리의 주인공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차량이 되기 시작한다. 

<그림 20> 1938년 서울 도로체계 이미지 재작성 ⓒ서울역사박물


세분화되는 토지 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신분에 의한 위계가 사라지며, 토지는 왕이 하사하고 언제든 몰수할 수 있는 공권력에 의한 배분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 각자의 재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신분에 따라 소유되었던 토지들은 재구성되었다. 귀족 계급이 소유한 대토지는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여러 소유자에게 분할되어 매각되었고, 도시화가 진행된 외곽지역에서는 도심과 동등한 차원에서 토지구성이 진행되었다. 


중첩되는 도시조직 격자형 가로조성으로, 도시조직은 자연지형을 따라 형성되었던 유기적 형태에서 기하학적 형태로 변화하고 세분화되었다. 도심의 조직은 조밀해지고, 도시 중심에서 내사산으로 갈수록 점점 더 큰 토지구획들이 형성했던 도시조직의 위계성은 사라지며 그 위계에 따른 공간적 중요도의 상징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서울의 도시조직은 이 시기부터 보존된 도시 원형 부분, 부분적으로 유지된 원형 부분, 중소형 구획으로 만들어진 기하학적 규칙성으로 변형된 부분 등이 공존 또는 중첩되며 복합성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계획된 공공 공간의 등장 
공원이나 광장과 함께 제공되는 열린 공간은 사람들이 멈출 수 있는 새로운 도시 노드를 구성하고 해당 지역 또는 해당 구역의 중심이 된다. 이 외부공간을 위요하는 상징적인 물리적 요소도 보유한다는 것은 유럽의 광장공간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서울의 외부공간은 폐쇄적이거나 영역이 제한되지 않으며, 적절한 의미에서 그것을 정의할 수 있는 경계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외부 공간이 그 목적을 위해 별도로 설계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용에 순응했던 이전의 시기와 달리, 대한제국시기인 1897년 계획된 탑골공원과 같이 항상 도시와 인접했던 자연을 대체하는 도시 내 공원조성을 시작으로, 도시 내 공원, 광장과 같은 공공 공간은 도시의 한 부분으로 계획되기 시작하였다. 

수평건축에서 수직건축으로 
재료 건축물의 변화는 건축 자재의 변화로 가속화되었다. 외국의 기관건물 또는 주거에 도입된 다양한 양식의 석재 건축물이 서울에 등장하며 건축물의 외관에 벽돌, 화강석 등의 사용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철근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목구조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수평적, 점진적 공간성에서, 수직 입체의 존재들이 도시경관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또한 즉각적인 인상을 주기 위한 파사드 디자인에 중점을 둔 개별적인 수직 입체물의 외관은 거리의 경관을 만들기 시작한다.
건축물의 유형 ’현대식 공공 건물’, 각 실의 기능이 분명해지고 기후에 영향을 덜 받는 ‘개량 한옥’, 자본주의 상업기능의 상징인 ‘백화점’이 등장하며, 도시 곳곳은 새로운 건축의 경관들로 변모하였다. 석재로 만들어진 5층 이상의 건물들은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었다. 이 시기에 시작하여 1970년대까지도 지속되었던 대규모 개량한옥단지들은 디벨로퍼가 공급하는 정형화된 주거공간의 시작을 알렸다. 백화점은 시민들의 ‘새로운 물질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며 도심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백화점은 내부에 다층 건물 내에서의 이동을 위한 엘리베이터 또는 에스컬레이터와 같은 신기술이 적용된 건물로,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가 보아야 하는, 21세기인 지금의 상업 공간들과 같은 전략이 사용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행정도시에서 상업도시로의 변화는, 이 시기 건물의 정면에 그 장소의 용도를 드러내는 상업광고의 등장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전환을 알 수 있다.

<그림 21> 1900년대 남대문 일대
<그림 21> 1930년대 남대문 일대
<그림 23> 1898년 프랑스 공사관
<그림 24> 1926년 경성역사
<그림 25> 1937년 화산백화점
<그림 26> 1940년대 청계

 

 

■ 도시 형태(La Forma Urbana) 


추상상징의 도시에서 기능과 자본의 도시로 새로운 시대는 도시 상징의 새로운 지리를 만들어냈다. 궁궐과 종묘사직으로 상징되던 조선왕조의 행정 수도 ‘한양’은 식민국가의 중심 도시, 자본주의 도시, 근대도시로서 새로운 상징들로 대체되는 ‘경성’이 되었다. 산과 강은 더 이상 인간과 도시의 삶에 우선하는 요소로서 도시가 순응해야 하는 요소가 아니라 도시의 한 부분이 되며, 자연은 도시와 분리되었고, 인공성과 자연성은 이분법으로 대치한다. 도시는 더 이상 전통 철학을 담고 있는 추상적 상징의 도시가 아니라 견고하고 물리적인 대상이 되었다.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되는 양극화의 시작 서울의 도시 형태는 이 시기에 트램,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한 도로 정비에 따른 성곽의 철거, 철도에 의한 도시 간 연결의 확대, 교외의 도시화라는 세 가지 주요 요인에 따라 근본적으로 변형된다. 4대문 안 영역으로 집중되었던 도시영역의 확대로, 서울은 중심과 주변부로 양극화되기 시작한다. 
시공간 지형의 변화 새로운 교통수단의 출현은 이 시기까지 유지되었던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다른 스케일로 변형시켜 새로운 시공간의 지형도를 만들어냈다. 도시화된 주변부는 더 이상 시간과 공간적으로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도시와 분리되는 자연지형 확장되는 도시화 지역, 주변부의 방사형 도로 체계, 도심 가로의 직교 배치로 인해 내사산은 도시의 경계를 정의하는 근본적인 역할을 상실하고, 도시 체계로부터 분리되며 도시의 시각적 요소인 독립된 대상이 된다.
수평적 도시리듬에서 수직적 도시리듬으로 새로운 재료의 사용으로 건물의 구조가 변화하고 새로운 기능, 새로운 경관의 건축 유형들이 도시를 채우면서, 이전 기간의 목조 구조의 건축물이 만들어내던 도시의 리듬은 석조 구조물, 벽돌 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건축물의 볼륨이 만들어내는 도시의 리듬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기하학의 도시 근대의 힘은 계산 가능한 도시 질감의 기하학으로 전통의 힘을 파고들어, 곡선에서 직선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기능과 형태의 건축물들은 도시 곳곳에 퍼져 일상의 삶도 변화시켰다. 
오래된 도시의 생활과 관습들은 우선순위를 완전히 상실하고 근대성의 요소로 대체되었다. 

<그림 27> 20세기 전반, 서울의 도시형태 개념도 ⓒ김선아, 2008

 

■ 혼란스러운 도시: 해방과 전쟁, 1945-1955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이하며 식민지 시대에 계획되었던 도시 사업들은 중단되었다. 곧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다. 피해는 주택(29% 파괴), 대부분의 공공건물 및 군사 수송에 사용되어 폭격의 대상이 된 교통망(도로의 54.5% 파괴, 철도 및 교량 완전 파괴)에 집중되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후 도시의 기능은 마비되었다.

 

<그림 28> 1945년 조선총독부
<그림 29> 1951년 명동

 

*별도 출처표기가 없는 그림의 출처 :
서울20세기100년의사진기록,서울시정개발연구원,서울학연구소, 2000

 

 

 

글. 김선아 Kim, Seon-ah (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대표로, 1988년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및 2001년 베니스건축대학(IUAV), 2008년 로마 국립대학(La Sapienza,Valle Giulia)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건축사이자 이탈리아 건축사, 도시계획학 박사이다. 현재 서울시 공공건축가, (사)한국건축가협회 스마트 도시건축위원장, (사)한국도시계획가협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spacing-pa@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