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9. 15:02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Identity of the City ④ _ Seoul,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 Acceleration of expansion and growth, beyond the original form of the city
■ 변화의 배경과 특징
생존의 장소로 시작된 서울의 재구성 한국 전쟁 이후 서울은 일제강점기 동안 진행된 도시 변형 중, 훼손된 도시의 원형을 회복하고 고유의 의도를 가진 근대 도시로 거듭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된 상황에서,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서울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소로서의 역할을 위한 도시의 재건으로 시작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장소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행정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생산 장소로서의 역할을 했다. 국가의 재건 이후, 서울은 도시 스스로의 경제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준공업에서 경공업으로, 또 서비스업으로 생산의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생산도시는 ‘소비 도시’라는 양면성 또한 갖추게 된다.
양과 속도의 장소 빠르게 변하는 인구증가로 인해 서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다양한 요구에 지속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도시 서울이 선택한 전략은 가능한 최대한의 양을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작동하는 도시로 만드는 ‘실용주의’였다.
외국 문화의 이식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 문화의 영향력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와 개입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냉전 시기였던 20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국가들에 미국의 영향력은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토양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20세기 첫 50여 년 동안 식민 도시를 겨냥한 일본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근대 도시 서울은 일본이 남긴 제도와 사업방식 등을 이어받고, 이 바탕에 미국의 도시계획 제도, 계획내용 사업 방식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다양한 문화가 이식된 도시화를 진행하였다.
■ 도시 계획의 내용들
관련 법, 제도의 제정과 계획들 서울은 1952년 단핵 4부 도심의 도시재건계획 수립을 시작으로, 1962년 시작되어 제5차 경제개발계획까지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1966년 건축법 제정, 1972년 국토개발법, 주택건설촉진법, 1980년 택지개발촉진법등 정부의 관련 법 제정에 따라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주택 및 인프라 건설을 위한 각종 개발사업을 추진한다. 서울의 도시기본계획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에 맞추어 도시화 지역을 확대하고, 증가한 인구에 맞는 도시기본계획을 지속적으로 재수립해야 했다.
토지구획정리사업과 도시 개발 1950~1960년대의 도시재건 시기를 지나 1970~1990년대까지 서울은 영동개발계획으로 인한 강남개발 외에도 역사 도심부의 곳곳도 재개발을 진행하여 현재의 역사 도심부 건물의 규모와 높이의 기준이 되었다. 1986, 1988년 아시아선수권대회와 88올림픽은 도시의 무허가 건물지역일대, 노후지역을 철거 정비하고, 대대적인 잠실개발의 기회로 활용하며, 도시 내 취약계층들의 저항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파트로 조성된 대량의 주거지들 1972년 주택건설촉진법이 제정되고, 도시계획법 시행령 16조에 아파트지구가 신설, 1976년 서울시는 아파트지구 건축조례를 제정하며 14개의 아파트지구를 한강변 일대에 지정하고, 주택공급을 위한 방법으로 대규모 고층 아파트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는 역사 도심부의 인구밀도를 분산하기 위한 대책으로, 영동개발과 함께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한강 대교의 건설과 주요 도로만의 건설이 이어졌다. 또한 이에 더해 대다수의 강북소재 중고등학교들을 영동지역으로 이전하며 본격적인 강남시대를 열고, 이 과정에서 여의도, 잠실일대의 공유수면 매립사업과 강변북로, 올림픽대로 등의 도시고속화 도로의 건설이 완성되었다.
■ 도시의 형성
도시 영역의 변화
도시화지역의 팽창 서울은 예상치 못한 지속적인 인구 증가로 시가화 면적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도시계획을 지속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현재의 서울 면적은 1975년 605.23제곱킬로미터로 확정되었으며, 1995년에 25구, 424행정동(2010년 말) 체계가 완성되었다. 서울의 확장은 19세기 후반부터 도시 남측과 서측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여, 20세기 후반 50여 년간 지속되며 외사산 기슭에 도달하면서 확장을 멈췄다. 서울은 인구분산을 위해 진행된 1968년 서초구 일대인 영동 1지구 개발, 1971년부터는 강남구에 해당하는 영동 2지구 개발, 1980년대의 개포지구개발 등의 강남개발로, 중구와 종로구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중심지인 한강 북측과 토지구획정리사업, 택지개발촉진법, 아파트지구지정 등에 의해 신시가지로 조성된 강남지역으로 양분되었다. 500여 년의 역사도시가 유지했던 20킬로미터 내외의 면적이 지난 1세기 동안 20배가 증가했고, 현재 서울의 모습의 대부분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도시화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 영역의 양분화 확장된 서울 도시화지역의 대부분은 1970년대부터 개발된 한강 이남에 해당한다. 이러한 도시 영역의 확장으로 이전 도시의 경계 역할을 하던 내사산, 한강과 같은 입지선정 시 도시 요소의 의미 또는 역할은 변경되었고, 서울은 이 시기에 한강의 남쪽지역과 북쪽지역으로 양분화되었다. 강남을 향해 퍼져나가 외사산에서 멈춘 팽창과 변화의 원심력은 ‘도시 내 균형발전을 위해’ 다시 도시 안으로 돌아오는 구심력으로 작용하며 역사도심 지역도 변화시켰다.
일정한 시기에 일관된 도시계획에 의한 도시의 형성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인구증가로 수정안 수립을 반복했던 서울의 도시계획은, 고르게 작용하지 못한 도시변화에 의해 서울 곳곳에 도시양극화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도시 상징들
도시인프라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경제개발기 동안 서울은 팽창된 도시 영역을 하나의 도시로 네트워크화 하고, 중요하게 고려되는 장소들의 효율적인 연결을 위해 ‘속도’가 보장되는 다양한 도시 인프라를 조성했다. 이 시기 도시의 상징은 ‘발전’ 이라는 가치를 드러내는 요소였으며, 발전의 기준은 수많은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지상의 넓은 도로, 고가도로 또는 지하터널과 같은 방해 받지 않고 이동이 가능한 복층 도로, 도시의 생산성에 기여하는 많은 사람을 동시에 이동시킬 수 있는 지하철 노선의 건설 등이었다. 3개의 터널을 통해 내사산을 뚫고 외사산까지 진행된 서울의 도시화지역 확대 및 지금 서울 모습의 뼈대를 완성한 데에 토목공사의 역할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공공간 19세기 말 시작되어 20세기 전반기까지 도시 곳곳에 조성된 외부공간 또는 공원과 같은 공공공간은 건축물의 바탕 또는 배경으로 여겨졌던 요소에서, 도시에서 계획되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 대부분의 열린 공간을 형성해왔던 자연은 ‘녹지’라는 이름으로 도시 용도의 하나가 되며, 자연 녹지는 도시 성립시기의 도시화 지역보다 우위에 있었던 역할을 잃게 되었다. 또한 도시로 들어온 자연인 공원과 함께, 도시 곳곳에는 크고 작은 외부공간 또한 조성되기 시작했다. 공공에서 제공하는 외부공간들은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 단위인 동네의 골목에서, 대도시 서울의 시민들 모두가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민간에서 조성하는 외부공간은 상업적 이익과 연결되도록 조성되어 민간영역임에도 공공성을 갖춘 새로운 도시 영역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고층건물 서울의 본격적인 현대 도시 진입은 20세기에 등장한 신기술공법과 신재료에 의한 고층건물의 확대로, 도시 원형의 모습인 분지형 도시로서 자연 속에 묻힌 장소가 아닌, 자연을 뚫고 건설되는 경관을 연출하며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주거공간 또한 일제강점기 시기에 등장한 도시형 한옥이 1960~70년대에 여전히 건축되었으며, 단독주택, 2층 양옥주택, 3·4층 규모의 다세대 다가구주택에서, 1970년 공공에서 주거공급을 위한 정책적 사업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아파트는 서울의 No.1 주거공간이 되었다.
■ 도시 형태(La forma urbana)
자연 안의 도시에서 도시 안의 자연으로
외사산으로의 지속적인 확장으로 서울은 도시원형이 만들어지는 시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내사산 능선의 요새화된 경계는 완전히 사라지고 도시의 경계는 외사산이 되었다. 외곽 지역은 서울의 일부가 되고, 서울은 외사산 너머의 위성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도시의 표면적 확장으로 이해 도시 지리는 변화하였고, 도시의 구성 요소들은 다른 의미로 변모했다. 역사도심 지역의 남측과 한강 북쪽 사이에 있는 지역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도시의 주변 외곽 지역이었으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북쪽 도시와 남쪽 도시를 구분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도시의 경계와 방향의 지시적 배경인 산들은 도시 안에서 이동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며 서울의 도시 풍경과 공존한다.
유기적 그리고 기하학적 도시조직들
자연지형에 따라 형성된 내사산 안의 자기완결적 도시조직은, 식민지 시대의 기하학적 직교도로의 조성으로 물리적으로 개방된 도시로 변화를 시작했다. 지난 50년 동안 도시의 형태는 개입시기와 도시지역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오랜 역사로 인해 변형의 기회가 가장 많은 역사적 중심지에는 수많은 유형이 발생했다. 원래의 유기적인 유형, 식민시대의 토지구획정리작업으로 인한 기하학적인 유형, 1950년대 전쟁 후의 복구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재개발 사업으로 기존 도시조직의 삭제와 새로운 개입들이 공존한다.
크고 작은, 높고 낮은 건축물들
유기적, 그리고 기하학적 도시조직들과 함께 서울의 토지들 또한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공존한다. 이 토지 안에서 건물의 높이와 용적은 300여개의 지구단위계획 계획 안에서의 각 구역의 기준을 따르거나, 지구단위계획구역 외의 지역에서는 건축법에 의한다. 서울은 도시 영역 전체를 하나의 영역 단위로 고려하여 일관된 높이를 부여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었고, 한국의 건축기준은 개별 토지가 입지한 위치, 공간이용의 수요, 토지주의 부동산적 활용에 따라 토지별로 입지에 따른 다른 건폐율과 용적율, 높이 적용이 가능하며, 10년 미만의 짧은 시간마다 지역별, 구역별 도시관리 기준은 변화했다. 이러한 여건들은 각각의 토지들마다 모두 다른 형태의 건축물이 들어선 서울의 경관을 만들어냈다.
글. 김선아 Kim, Seon-ah (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김선아 건축사·(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대표로, 1988년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및 2001년 베니스건축대학(IUAV), 2008년 로마 국립대학(La Sapienza,Valle Giulia)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건축사이자 이탈리아 건축사, 도시계획학 박사이다. 현재 서울시 공공건축가, (사)한국건축가협회 스마트 도시건축위원장, (사)한국도시계획가협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spacing-pa@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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