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⑫<남아있는 나날> 1993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2023.3

2023. 3. 17. 16:1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⑫ <The Remains of the day > film 1993 directed by James Ivory
감독 :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 1928~ )/ 각본 : 루스 프라베르 이하브발라(Ruth Prawer Jhabvala)/ 촬영 : 토니 피어스-로버츠(Tony Pierce-Roberts)/ 음악 : 리차드 로빈스(Richard Robbins)/ 원작 : 카즈오 이시구로(a 1989 Novel Written by Kazuo Ishiguro, 1954~ )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1989)』 

출연 : 안소니 홉킨스(Anthony Hopkins as Mr James Stevens, 1937~ ), 엠마 톰슨(Emma Thompson as Miss Sarah "Sally" Kenton [later Mrs Benn], 1959~ ), 제임스 폭스(James Fox as the Earl of Darlington [Lord Darlington], 1939~ ),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 as Congressman Jack Lewis, 1952~2004), 피터 본(Peter Vaughan as Mr William Stevens [Mr Stevens, Sr], 1923~2016), 휴 그랜트(Hugh Grant as Reginald Cardinal [Lord Darlington's godson] 1960~ )외(running time: 134 minutes)

 

<살아있는 나날> 포스터

 

서(序)
오래전에 동네에 있던 영국문화원 코스에서 영화와 함께 소설 ‘남아있는 나날’을 다뤘다.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헤리티지 필름이라는 장르를 알게 되었고, 그 후 상당수의 유사한 주제의 필름을 보았다. 영화 시작 부분에 미국인 부호가 경매를 통해 영국의 저택을 사는 과정에서, 그가 구매하는 것은 귀족의 저택과 부속된 미술품이지만 사실은 역사를 산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저택에서 주인 공간과 하인들 공간의 구분으로 절대 부딪히지 않은 동선체계 등을 갖춘 가옥구조와 픽처레스크 정원의 외부공간에 대해서, 그리고 신분이 다른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는 버틀러(집사장)나 가정부(하녀장)의 역할 등에 대해서 새로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한 12개의 영화를 선정하면서 이 작품을 맨 마지막으로 배치한 이유는 나름 헤리티지 필름을 살펴보고자 해서다. 

그로부터 다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박사과정에 재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문캠퍼스 과목 중 ‘영국 영화와 국가 담론’을 수강 신청했다. 그 때 스스로 택해서 연구했던 것이 <공간파괴-마이클 보그다노프의 ‘맥베스’를 중심으로->와 맥베스를 공간 및 시간의 치환으로 재해석한 구로자와 아키라의 <구모노수 죠(거미집 성)>, 그리고 마침 그 몇 년 전 우연히 다루었던 제임스 아이보리의 <남아있는 나날>이었다. 물론 나름대로 건축물을 중심으로 해석했다. 어렵게 다시 찾아서 초고를 읽어보니 나눌 만하여 2007년 당시 구상했던 것을 좀 다듬어서 이 지면을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지난 11개의 칼럼과 구성은 좀 다르지만, 12번째이자 이 시리즈의 마지막 칼럼이라 정성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싶다. 

 

달링턴 저택 (Darlington Hall)과 헤리티지
 -‘남아있는 나날’에 나타나는 영국 헤리티지-
(British Heritage & Remains of the day)

Ⅰ. 헤리티지 필름(Heritage film)의 정의와 특성
Ⅱ.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의 남아있는 나날(Remains of the day)
Ⅲ. 달링턴 저택(Darlington Hall)의 공간특성



Ⅰ. 헤리티지 필름(Heritage film)의 정의와 특성

 

1. 헤리티지 필름의 정의
헤리티지 필름이란 찬란했던 과거에 대한 괄목할 만한 특징들을 상당수 지닌 일련의 영화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헤리티지(heritage)라는 용어가 역사보존(conservation)과 관광(tourism)이라는 담론 속에서 널리 통용되고는 있지만, 헤리티지 영화라는 것이 영화를 보러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용어는 아니다. 사실 헤리티지 필름이란 ‘필름 느와르(film noir)’와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용어다. 또한 헤리티지 필름의 장르로서의 위치나 그 경계의 본질 두 가지 다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이 용어가 관련되는 한 대개의 영화에는 일종의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 점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다음 여러 영화에 적용이 되었다. 바로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1981), 열과 먼지(Heat and Dust 1983), 인도로 가는 길(A Passage to India 1985), 다른 나라(Another Country 1984),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1985), 한 줌의 먼지(A Handful of Dust 1988), 모리스(Maurice 1987), 리틀 도릿(Little Dorrit 1987), 시골에서의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 1987), 바보들의 행운(Fools of Fortune, 1990), 천사들도 발 딛기 꺼려하는 곳(where Angels Fear to Tread, 1991) 및 하워드 엔즈(Howards End 1991)들이다. 이런 영화들은 전례가 없는 작품들이다. 찰스 바(Charles Barr)가 비판했듯이, 영국 영화(British Cinema)는 품격 높은 드라마의 재원(source of material)으로 영국(England)의 ‘풍부한 역사•문화유산(rich historical and cultural heritage)’에 너무 치중하려고 한다. 그리고 전시(戰時)의 ‘헤리티지’ 영화는 정말 ‘본질적으로 거의 한 장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파엘 사뮤엘(Raphael Samuel)에게 ‘헤리티지’라는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기반과 정치적인 소스와 연관되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지의 취약점은 가장 특별하거나 사회적으로 우세한 것들을 간과하는 한편 헤리티지의 다양한 버전들과 모두 함께 가게 된 점이다. 이는 또한 헤리티지 필름 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코너(Corner)와 하비(Harvey)가 헤리티지 문화의 귀족적이고 전원적이며 산업적인 이 세 가지 주안점을 확인했다고는 하지만, 헤리티지 영화가 선호하는 것은 지배계층 또는 중·상류층의 생활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런 필름을 만드는 역사적인 헤리티지는 국가 과거의 특별한 부분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 상류계층의 선택된 생활방식과 관련된 것, 캠브리지나 옥스포드 대학 같은 엘리트 교육기관, 전원 또는 전원의 저택, 홈 칸트리(Home Countries) 및 전(前) 식민지 등이다. 
데빗 켄내다인(David Cannadine)에게는 ‘국민 헤리티지(national heritage)의 진정한 아이디어란 때로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나 사실상의 필수적인 엘리트 문화인 예술작품 보존의 수단보다 조금 더 나은 것 정도이다.’ 
이 영화들을 구성하는 헤리티지는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며, 영국문학 및 극적(劇的) 소스를 차용(adaptation)하는 것은 헤리티지 영화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1980년대 가장 인기가 있었고 다섯 작품 이상(인도로 가는 길, 전망 좋은 방, 모리스, 천사들도 발 딛기 꺼려하는 곳 및 하워드 엔즈)이나 영화의 원작을 제공한 작가는 포스터(E. M. Foster, 1879~1970)다.

<남아있는 나날> 촬영장소


2. 헤리티지 필름의 특성(Characteristics of Heritage Film)
헤리티지 필름이라는 용어는 헤리티지 산업(heritage industry) 및 영국 국민영화(national cinema)의 대두와 함께 만들어진 용어다. 헤리티지 필름을 역사물,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 또는 여성 드라마로 나누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필름의 숫자와 그들의 연관성 때문에 대개의 평론가들은 헤리티지 필름을 그냥 개별 장르로 다루기로 했다.
챨스 바(Charles Barr)는 헤리티지 필름을 “국민 유산(National Heritage)을 스크린에 옮긴 재창조되었거나 새로 만들어진, 또는 단순히 제작된 어떤 한 장르의 필름이다” 라고 했다.

헤리티지 필름의 특징은 ▲첫째, 작품성, 공예적 가치 또는 예술적 가치를 강조한 저(底)예산 독립프로덕션 영화다. 이런 필름들은 문화적인 중요성에 대해 “중류 정도 품질의 제작물이다” ▲둘째, 국가의 과거(national past)를 엘리트적이고 보수적으로 표현하므로 “예술적이고 장엄하다” ▲셋째, 대개의 헤리티지 필름들은 어떤 건물이나 풍경 속에서 찍었다. 그 건물들은 오늘날 국민신탁(National Trust)과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에 의해 보존되는 그런 건물들이다. 영화의 배경은 상류층 문화의 장소라던가, 고상한 에드워디안 런던(elegant Edwardian London)이나 아니면 르네상스로 특징되는 이탈리아, 고전적인 그리스 등이다. 

헤리티지 필름들은 때로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거나 개별적인 로망스를 다룬다. 또는 사회문제, 즉 페미니스트나 동성애자들이 주제가 되기도 한다. 헤리티지 필름의 내러티브 전략은 대개 슬로우 무빙이며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주인공이나 장소, 주위 환경 등은 장엄하거나 목표지향적이지 않고 분명하다. 이 필름들의 카메라 워크는 유연하게 흐르고, 예술적이고, 회화적이며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다. 클로즈업 보다는 롱 테이크(long takes)와 딥 포커스(deep focus) 그리고, 롱 앤 미디엄 숏(long and medium shot)을 사용한다.

 



Ⅱ.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의 ‘남아있는 나날(Remains of the day)’


1. ‘남아 있는 나날’과 역사적 맥락(historical Context)
(1) 1919년 베르사유 조약(The 1919 Treaty of Versailles)
베르사유 조약이란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들의 1919년 파리평화회담(Paris Peace Conference)에서의 조인식이다. 패전국인 독일의 운명을 논의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당시 참석자였던 각국 대표는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태리 외무장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것을 비난받고 복구비용과 군대해산을 촉구 받았다. 게다가 독일은 점령지를 포기하고 교역을 중단해야 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식이 거행되었다. 조약은 15편 440조의 방대한 것이었다.
소설 원작의 달링턴 경(Lord Darlington)은 정치 및 경제에 열정적인 인물이었고, 1차 세계대전 후 그의 저택(Darlington Hall)에서 비공식 정상회담을 가진다. 이야기는 바로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달링턴 저택의 모습 wikimedia_Becks
달링턴 저

 


(2) 1956년 수에즈 위기(危機)(The 1956 Suez Crisis, 제2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이라고 부르는 수에즈 위기란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영국과 프랑스 주주들이 주로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일어난 중동 역사상 중대한 위기이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휴전을 위한 공동 최후통첩을 발령했지만 무시되었다.
원작 ‘남아있는 나날’은 수에즈 위기와 같은 해 같은 달(July, 1956)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영화의 주요 등장 인물
(1) 달링턴 경(Lord Darlington)
(2) 미국인 부호 루이스(Louis, 원작에서는 패러데이_Mr. Farraday)
(3) 가정부 켄튼(Miss Kenton, housekeeper)
(4) 집사장 스티븐스(Mr. Stevens, butler)
(5) 집사 윌리암 스티븐스(William Stevens, under butler)

 


3. 영화의 주제
‘남아 있는 나날’에는 의무(duty)와 헌신(dedication)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집사장 스티븐스는 완벽한 의무 이행을 추구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모든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 살다 보니 어느 날 되돌이켰을 때는 가족과의 관계도,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도 없고, 결혼은 물론 낭만을 추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뒤늦게 깨달은 그의 본연의 주안점들 즉, 훌륭한 집사장(great butler), 위엄(dignity), 그리고 직원 업무분장(Staff Plan) 등에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늦게나마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가 과거에 선택했던 길을 후회한다. 

 


4. 영화의 스타일
소설의 대부분은 일인칭으로 스티븐스(Mr. Stevens)의 과거 회상과 현재가 조우한다.  달링턴 저택의 집사장(執事長, Butler) 스티븐스는 과거 저택에서 일어났던 일과 직결된다. 달링턴 경에 대한 경외심을 키우는 동안에 그는 마냥 믿기는 어려운 화자가 된다. 내용의 일부는 비극적 요소와 희극적 요소가 산입되며 전체 내용을 좀 더 진솔한 애기로 끌고 간다. 

 

 

저택으로 가는 길
연회 준비를 하며 자를 대는 장면
달링턴 저택 내부

 

5. 영화와 소설의 줄거리

 

(1) 영화 줄거리
영화는 켄튼의 편지 내레이션과 함께 영국의 한 저택에서 소장품 경매로 시작한다. 
1956년 7월 집사장 스티븐스(Stevens, 안소니 홉킨스 분)는 달링턴 저택의 새 주인인 미국인 부호 루이스 씨의 권고와 배려로 세상 구경도 할 겸 모자라는 인력 문제도 해결할 겸 영국 서부 해안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한때는 달링턴 저택(Darlington Hall)에 세계(the World)가 모여들었으나, 그 영화로웠던 시절은 이미 빛이 바래고 저택의 역사와 미술품들은 미국인 부호인 루이스(Louis, 크리스토퍼 리브 분)가 샀으며, 루이스는 가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엿새 동안의 여행을 하며 스티븐스는 1930년대 국제 정상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 그리고 주인 달링턴 경(Lord Darlington, 제임스 폭스 분)을 위해 일해왔던 지난날을 회고한다. 당시 유럽은 나치(Nazi)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스티븐스는 집사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 경은 2차 대전 후 친 나치주의자로 몰려 몰락한다. 20년이 지나 스티븐스가 되돌아보니 맹목적인 충직 때문에 사생활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 윌리엄 스티븐스(William Stevens, 피터 본 분)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고, 매력적인 가정부 켄튼(Ms Kenton, 엠마 톰슨 분)의 사랑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달링턴 저택에서 켄튼과 스티븐스는 서로 경직된 채 오로지 임무에만 충실해온 것이다. 결국 그녀는 스티븐스를 포기하고 다른 가문 집사장과의 결혼을 위해 달링턴 저택을 떠난다. 켄튼 양은 조그만 사업이 꿈인 남편과 함께 서부 해안 지방으로 이주한다. 
스티븐스는 결혼에 실패한 듯이 보이는 켄튼(벤 부인)을 달링턴 저택으로 데려올 계획으로 서부로 향한다. 그러나 스티븐스와 만나기로 한 그날 아침 켄튼은 전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딸이 해산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스티븐스를 만난 켄튼은 그냥 그곳에 남아서 딸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미국인 부호인 새 주인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되찾으려는 달링턴 저택으로 주인의 배려로 몰고 갔던 다이믈러(Daimler)를 타고 혼자서 돌아오게 되며, 여전히 훌륭한 집사장(Butler)이란 무엇일까를 되뇐다.

 


(2) 소설의 줄거리

소설은 1956년 7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달링턴 저택
달링턴 저택에서 30여 년간 일해온 나이든 집사장(Butler) 스티븐스가 주인공이다. 달링턴(Lord Darlington) 가문에 200여 년간 속했던 달링턴 저택(Darlington Hall)은 최근 패러데이(Mr. Farraday)라는 미국인에게 넘어갔다. 달링턴 경이 점잖은 영국 신사라면 패러데이는 좀 가벼운 미국인이다. 새 주인은 한동안 출타할 계획이므로 스티븐스에게 자동차를 내주며 연료비도 보태주겠다고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권한다. 스티븐스는 오래 전 달링턴 저택의 가정부(Housekeeper)였던 켄튼(Ms Kenton)의 편지도 있었고 해서 여행을 수락한다. 너무 임무에만 충실했던 스티븐스는 저택에 사람이 필요한 시점에 켄튼 부인도 설득해서 데려올 겸 기대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첫째 날 저녁 솔즈베리(Salisbury)
스티븐스는 저택을 뒤로한 채 여행하는 것이 편안하지는 않지만 달링턴 저택을 출발한다. 운전을 하면서 끊임없이 반문을 한다. 훌륭한 집사장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What is great butler)? 과거 동료들과의 대화를 상기한다. 그는 겸손하지만 위엄을 가지고 그의 임무를 충직하게 수행하는 집사이다. 역시 집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수행했던 집사로서의 위엄과 헌신을 그는 높이 평가했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둘째 날 오후 도르셋의 몰티머스 연못(Mortimer’s pond, Dorset)
시골 여관에 머문 스티븐스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1936년 결혼하면서 저택을 떠났던 켄튼 양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은 벤 부인(Mrs. Benn)이지만 그에게 전달된 편지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직업정신이 투철하고 품행이 단정한 아주 좋은 가정부였다. 스티븐스의 늙은 아버지도 집사였는데, 그 저택의 주인이 죽자 갈 곳이 없어 달링턴 저택에 보조집사(under butler)로 오던 날 켄튼 양도 도착했다. 아버지는 임무 수행엔 문제가 없어도 늙은 나이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달링턴 경을 떠올린다. 그는 영향력이 있었고 정치에 관계했으며, 자주 파티를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에 일방적으로 가혹한 부담을 시킨 것을 동정했다. 1923년 달링턴 저택에서 열린 비공식적인 국제회담에는 각국에서 중요한 대표들이 참석했고, 독일을 대신하여 각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역설했다. 회담 도중 스티븐스의 아버지는 병이 나서 돌아가시게 되었으나 스티븐스는 그의 임무를 다하느라 들여다보지도 못한다.

셋째 날 저녁, 데븐의 타비스톡 근처, 모스콤 (Moscombe, near Tavistock, Devon)
여행 도중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도 ‘훌륭한 집사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끊임없이 반문한다. 자동차 문제를 해결해 준 기사가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을 위해 일했다니까 깜짝 놀라는 것으로 미루어 달링턴 경의 말로가 평탄하지 않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튿날 아침, 마을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과거 달링턴 경과 그의 정치적인 회합들, 그리고 나치 독일이 미친 영향들에 대해서 회상한다. 당시 갈 곳 없는 두 명의 유태인 소녀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던 일… 그 일은 켄튼 양을 화나게 했었고, 그는 주인이 반(反)유태자가 아니라고 옹호했다. 
스티븐스는 계속 운전을 하면서 회상한다. 켄튼 양이 자기 방에 들어와 스티븐스가 연애소설을 읽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오로지 그의 언어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의 회상은 다시 달링턴 저택으로 되돌아간다. 달링턴 경은 나치 동조자가 되었고, 권력자들에게 조종되어 이용당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이 억울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그의 주인에 대한 충성과 헌신은 비난받을 만하지 않고 현명하지 못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달링턴 저택 실내에서의 연회 모습

 

넷째 날 오후, 콘월의 리틀 콤톤(Little Compton, Cornwall)
스티븐스의 자동차가 연료가 떨어지자 친절한 기사가 그를 도와 연료를 주입하고 계속해서 콘월로 향했다. 켄튼 양이 결혼하기 위해 달링턴 저택을 떠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동시에 히틀러가 달링턴 경을 이용해 영국에 선전을 했던 것을 알았다. 

여섯째 날 저녁, 웨이마우스(Weymouth)
해변가 마을, 스티븐스는 켄튼 양을 이틀이나 미리 만났다. 서로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켄튼 양에게 남편이 잘해주냐고 물으니 그녀가 긍정하면서,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점점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고, 손자(손녀)가 태어날 것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녀가 혹 인생을 스티븐스와 함께 나누었더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끔 생각해본다고 고백하자, 스티븐스는 얼마나 바보 같은 삶을 살았는지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는 낯선 사람에게 후회스러움을 토로하며, 모든 것을 주인 달링턴 경에게 쏟아 부어 본인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달링턴 경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지만 스티븐스는 잘못했다는 것조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반문해야 한다면서 어떤 위엄이 그 속에 있는지 묻는다.
그 낯선 이는 스티븐스에게 앞만 보고 가라고 충고한다. 달링턴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티븐스는 새 주인에게 최고의 버틀러가 되리라 생각하며, 새 주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겠다고 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소설에 다섯째 날은 없다.)

 

사냥을 출발하기 위해 달링턴 저택을 나서는 사람들

 

Ⅲ. 영화 속 달링턴 저택(Darlington Hall)의 공간특성

‘남아있는 나날’에는 건물과 풍경, 그리고 사냥하는 광경이나, 예술품의 경매를 통한 문화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상류사회의 문화의 장소나 회담 등으로 과거(national past)를 엘리트적이고 보수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헤리티지가 표현되었다. 

내러티브 전략은 슬로우 무빙(slow moving)이며 에피소드(Episode)로 구성된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분명한 역할을 하고, 배경이 되는 온실과 영국식 정원이 딸린 달링톤 저택과 사냥을 할 수 있는 그 주위의 목초지는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카메라 워크는 유연하게 흐르며, 예술적이고, 회화적이다. 롱 테이크(long takes)와 딥 포커스(deep focus) 그리고, 롱 앤 미디엄 숏(long and medium shot)을 사용했다. 

영화 속 달링턴 저택은 17~18세기 헤리티지 건물이고 주인 공간과 접객 공간, 그리고 서비스 공간의 엄격한 구분이 있어서 집사나 가정부들, 하녀들과는 동선이 구분되어 있다. 
정원은 대표적인 픽처레스크 영국식 풍경 정원(Picturesque Garden)으로 잘 다듬어진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고, 실내와 정원의 완충지대에는 온실(Green house)이 있어서 화훼를 감상하면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 실내 공간도 국제회의 등을 할 수 있는 대형 거실이나, 차담(茶談)을 할 수 있으며 소규모 음악회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회담장도 가치가 있는 미술품으로 갖추어 시작 장면의 미술품 경매와도 연관이 된다. 

영화 속 달링턴 저택(Darlington Hall)
‘남아있는 나날’은 대부분 영국 서머셋에서 촬영했다. 촬영은 디럼의 디럼 저택(Dyrham Park), 배드민턴의 배드민턴 하우스(Badminton House), 윌트셔(Wiltshire)의 코샴 코트(Corsham Court)와 같은 영국의 여러 역사적 명소에서 진행했다.영화 속 달링턴 저택은 여러 집이 합쳐진 건물이다. 외부는 디럼 저택, 내부는 대부분 배드민턴 하우스, 그리고 컨퍼런스 룸은 코샴 코트다. 주요 건물을 살펴본다.

 

복도의 풍경(하인들의 영역)
달링턴 저택의 온실 밖

 

(1) 내셔널 트러스트 소유의 디럼 파크(National Trust - Dyrham Park [Dyrham House]- Listed Building –Grade I/17 Sep 1952)
사우스 글로스터의 디럼 마을 근처 고대 사슴공원에 있는 디럼 파크는 기존 엘리자베스 식 튜더 마노어 하우스(Elizabethan Tudor Manor House) 대지에 지어진 컨트리 하우스다. 1692~1704년에 건축한 바로크 건축 양식의 훌륭한 예인 이 저택은 윌리엄 블라스웨이트(William Blathwayt 1649~1717, 영국외교관이자 위그 정치가)를 위해 지었다. 
새뮤엘 오드로이(Samuel Hauduroy)와 윌리엄 털만(William Talman)의 감독 하에 1692년에서 1702년 사이에 두 단계로 지어졌다. 주택, 오렌지 온실, 마구간 블록 및 부속 교구 교회는 1등급 등록 건물이며, 공원은 국립 역사 공원 및 정원 등록부에 2등급으로 등록되어 있다. 집은 274에이커(111헥타르)의 정원과 풍경, 사슴 무리를 돌보던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래 죠지 런던(George London, c.1640~1714, 조경가)이 설계하고 나중에 찰스 하코트 마스터스(Charles Harcourt Masters, 1759~1866, 배스의 측량사이자 아키텍트)가 개발했으며, 이 부지에는 분수와 조각상이 있다. 
이 저택은 달링턴 저택의 외부를 보여준다.

(2) 배드민턴 하우스(Badminton House)
배드민턴 하우스는 17세기 후반부터 보퍼 공작(Dukes of Beaufort)의 주 거주지였던 영국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의 배드민턴에 있는 대형 컨트리 하우스이자 1등급 등록 건물이다. 배드민턴 스포츠에 이름을 붙인 이 집은 52,000에이커(약210,436,738 m2/63,657,052평)의 땅에 자리 잡고 있다. 집을 둘러싼 정원과 공원은 역사 공원 및 정원 등록부에 1등급으로 등재되어 있다. 
입구 홀과 가정부 켄튼 양(Miss Kenton)과 집사 스티븐스(Mr Stevens)의 응접실을 포함한 '달링턴 저택(Darlington Hall)' 내부의 대부분은 배드민턴 하우스다.

(3) 코샴 코트(Corsham Court: Listed Building – Grade I/20 December 1960)
코샴 코트는 케퍼빌리티 브라운(Capability Brown, 1716~1783, 영국 정원사 및 조경가)이 설계한 공원에 있는 영국 컨트리 하우스로 엘리자베스 및 조지아 하우스 양식(an Elizabethan and Georgian house)이다. 윌트셔의 코샴 마을에 있으며 1978년 웨식스 왕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고, 튜더왕조 때부터 왕실의 소유이다. 현재의 건물은 1582년에 건립되었다. 16세기에는 헨리 8세(Henry VIII)의 부인 캐서린 아라곤(Catherine Aragon)과 캐서린 파아(Katherine Parr)가 자주 사용하였다. 폴 메투엔(Paul Methuen)이 1757년 그의 삼촌인 외교관 폴 메투엔 경(1672~1757)으로부터 물려받은 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18세기에 그림전시실, 회의실, 도서관 등을 만들었다. 1796년 존 내시(John Nash, 1752~1835 British Architect, 버킹엄 궁전 설계자)가 북쪽 입구를 고딕 양식으로 개조하는 등 외관을 일부 보수하였다. 
영화 속 캐비닛 룸 컨퍼런스는 이곳에서 촬영했다.

비둘기를 날리는 장면


마무리에(結)

다양한 관점에서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1980~1990년대에 풍미했던 헤리티지 필름을 이제 와서 되돌아보며 16-7년 전 쓴 글을 소환하는 것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이 시점에 어쩌면 이런 특수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해서 우정 과거를 끄집어 낸 것이다. 라파엘 사무엘의 “유산 미끼(Heritage-baiting: 기억의 극장 1권: 동시대 문화의 과거와 현재, 1994)”에서 다각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30년 전 이미 영국에서는 헤리티지의 상품화에 대해 엄청난 비판이 있었다. “헤리티지”란 영국에서 도시개선계획을 홍보하고 서비스부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자금을 끌어들이려는 지방정부에서 유용했던 용어라고 한다. 헤리티지는 국가를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고 현재와 과거를 미이라로 만들고 전통을 젤리로 보존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유산 산업을 사기로 규정하고 과거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우리 안에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복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History)와 헤리티지는 상반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역사란 비판적 탐구의 영역으로, 동적이며 개발과 변화에 관심이 있고, 기록의 복잡성과 모순에 대해 회의적 지능을 유발하는 설명과 관련이 있는 반면 헤리티지는 단순 골동품 등 사물에 해당되며 정적이고 감상적이며 축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보았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동안 머천트 아이보리 사(Merchant Ivory Productions)는 역사와 유산이 있는 장소에서 촬영한 필름을 만들어 영어와 영국 문학을, 그리고 헤리티지 필름을 세계에 내놓았다. 애초에는 인디아에서 촬영하고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시작했는데 뒤에 가서는 영국의 20세기 초 에드워드 시기의 영국(Edwardian England, 1901~1910)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그 촬영장소들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광을 유발한다. 자국민들에겐 오히려 너무 똑 같아서 식상하다는 필름들이 외국에서는 저항없이 잘 받아들여져 왔다. 한국의 헤리티지 장소에서 촬영한 드라마들을 외국시장에서 환호하듯이… 우리도 이왕 만들 것이면 좀 더 진정성 높게 잘 만들자는 의미다. 그 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특히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지 편집팀에 박수를 보낸다.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수료(건축학 석사/건축학 박사)
· 건축학 박사논문(역사·이론 분야):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 독일 뮌헨대학교(LMU) 및 뮌헨공대(TUM) 수학(교환장학생)

 

choinsou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