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30. 09:25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War, a building that remembers its hidden history _ The Colosseum, focusing on the historical construction backdrop and the colonial people’s historical empathy
1. 죽느냐 사느냐의 흔적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테베레 강Tevere river을 배경으로 일곱 개 언덕 위에 건설한 도시였다. 고대 건축의 요람이며 문명과 과학의 박물관인 이 도시에 네로 황제Nero(AD 54~68)는 지중해 연안과 광대한 유럽에서부터 중동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로마의 군사력과 기술력은 제국을 세우는 초석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바실리카basilica 속 민회民會의 부패로 로마 시민의 지나친 풍요는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원인으로 다양한 물리적 관계가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플라비우스) 황제 시대에도, 지중해 연안의 속주屬州에 가혹한 조공朝貢을 요구했다. 당시 유대민족을 이미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조공 문제는 전쟁을 향한 도화선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반감이 극에 달하던 터에, 그들에게 목숨과도 같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세계사적 사태가 일어난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솔로몬 성전Solomon’s Temple’에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셀 수 없이 드렸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로마를 쳐부수고 ‘선민選民’인 자신들을 통치하는 위대한 왕, ‘메시아’를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공의 문제를 빌미 삼아 거룩한 솔로몬 성전 안으로 끝내 로마의 독수리 군기와 군화가 들어와 침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다. 개犬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의 군대가 감히 성전에 들어오자 그간 억누르던 분노가 터져 나오며 반란으로 치닫는다. 한 국가의 운명이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 사건을 맞이하면서 자기 선조들의 수난사를 회상했을 것이다. 그 옛날 조상들이 극악무도한 바벨론BC 585 제국과 아시리아BC 722 제국에 의해 처참히 도륙당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분신같이 여기는 ‘토라Torah(모세五經)’와 구약성경에 기록된 역사처럼 바벨론 강변으로 끌려간 조상들이 생사를 가르는 위험과 모멸감을 견디며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레스BC 559-530, Cyrus 왕에 의해 본토로 귀환한 후 스룹바벨AD 64, Zerubbabel 왕에 의하여 눈물로 성전을 힘들게 재건Solomon’s Temple한 일을. 뼛속 깊이 고난과 고통을 겪은 역사를 익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다시 로마에 의해 정신이 부서지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한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종교적Judaism 자존심은 죽음의 항쟁이자 마지막 반란AD 66~73을 결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소멸消滅’과 ‘부활復活’은 성경에 이미 조상의 범죄에 따른 대가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유대민족의 반란은 유례없이 강력했고, AD 67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진군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장군은 4개 군단을 투입, AD 70년 8월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당시 유대인 최후의 항전지인 난공불락 ‘마사다Masada’ 까지, 토성을 쌓아 반란을 도륙했다. 더욱이 민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 다시 하드리아누스AeliusHadrianus. A,D 117~138 장군을 재차 예루살렘으로 파병하여 예루살렘 주변에 사는 유대인 마을 980개 이상을 불사르고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60만 명 이상을 도륙했다.
이 전쟁의 기록은 지금도 세계사와 성경, 그리고 ‘요세푸스Josephus(유대고대사기록)’ 전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쟁 당시 로마군은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에 보관하고 있던 보물들을 노획하고, 자신들이 개척한 지중해 고속도를 통해 유대인 전쟁 포로 10만 명 이상을 로마로 끌고 갔다. 그 후 유대민족은 1800년 동안 나라 없는 유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들의 역사는 세계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지만, 유대인들의 흥망성쇠는 감히 살아있는 인류학적 기록물과 같을 것이다.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Diaspora’들은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적처럼 부활하여 한국전쟁이 나기 이태 전 이스라엘 국가로 1948년 ‘시오니즘Zionism’에 힘입어 건국하게 된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2024년 그들은 건국 75년을 맞이한다.
당시 로마는 승전하여 노획한 전리품과 유대인 포로들로 콜로세움Colosseum을 건축해 수입을 주요한 재정으로 사용한다.
오늘날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이 콜로세움을 누군가는 조상들이 남겨준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볼 것이고, 다른 누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피와 한恨이 녹아 있는 약속과 다짐의 건축물로 바라볼 것이다.
이제 멸망했던 이스라엘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콜로세움’ 건축에 대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축된 일련의 과정들을 간략히 건설의 역사와 정치적·시대적 배경으로 바라보면서, 인문학·역사학적 사고력으로 지금 우리의 현실로 이입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를 통해 우리가 겪은 시련과 유사성을 느낄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총칼로 지어진 ‘적산敵産’ 건축물들을 생각해 보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근대건축문화유산’이라는 주제를 잠시 미뤄두고 적산건축물을 보존해야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민족의 사관史觀과 개인의 존엄尊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근원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역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를 왜곡하는 자는 민족의 정신을 죽이는 매국노다”라고 했던가. 지금 신 냉전 시대 속에서 고대 로마 ‘콜로세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한 미래의 새로운 역사교육과 정체성을 향하며, 과거의 아픈 흔적들을 다시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아픔의 소산인 적산건축물을 통해 무심했던 역사관을 북돋우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 피의 건축이자 재앙의 건축 ‘콜로세움’
진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오늘날도 생도들에게 교육하는 전쟁사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로마 전쟁사일 것이다. 당시 표준화된 무기 생산, 직업군인 등으로 군단은 최강이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이스라엘의 반란을 수습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당시 로마의 공화정共和政은 민란과 정치적 혼돈이 극심했다. 황제는 시민들의 여론을 와해시킬 묘책으로 ‘네로 궁전’이었던 터에 로마 시민의 오락거리를 위하여 ‘콜로세움’을 짓도록 했다. 10년이라는 긴 공사 끝에 완성하게 되는데, 최고의 국책 사업인 만큼 막대한 건축공사비에 필요한 공급은 솔로몬 성전에서 노획해온 전리품과, 성전을 불태워 성전기초에 녹아든 금錦물까지 모두 수거한 금덩어리와 은銀을 약 200톤 물량, 유대인 전쟁 포로 10만 명으로 조달하게 된다. 심지어 일부 노예들은 매매하여 공사비로 충당했고, 남은 유대인 노예들은 로마의 부유층에 선물로 보내지기도 했다.
유대인의 반란과 항전은 약한 나라의 종교적 이념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면, 인본주의人本主義와 다신교多神敎를 믿고 황제를 신격화하는 로마에서는 유대교를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유대민족을 핍박하는 것은 그들 생각에 지극히 당연했을 것이다. 훗날 콜로세움은 기독교인들까지 맹수의 먹이로 던지고, 화형火刑까지 저지르는 잔인한 박해의 극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당대 로마는 콜로세움이 공화정 원로들과 로마 시민의 정신을 망가트리는 정신병의 소산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제국이 멸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근거는 그 후 학자들을 통하여 알게 된다.
3. 콜로세움의 건축술과 쓰임
콜로세움은 당대 최고.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그리스건축’의 영향을 집대성한 로마 건축물로써 간결한 설계, 효율적 공사관리, 뛰어난 시공기술, 재료 미학 등 아마 피라미드Pyramid 다음으로 웅장한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건설은 AD 70년에 착공하여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티투스에 이어 AD 80년 완공했다. 이 건물은 검투사들의 죽음의 묘지였으며,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의 처형장으로 전락했고, 그 옛날 바벨론 제국의 ‘공중정원’과 버금가는 아직도 신비에 싸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통사統辭적인 건축술에 대하여 논하는 것보다, 인문학적으로 몇 가지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째, 아름다운 원형극장에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한 엘리베이터의 시조로 불리는 37개의 ‘캡스턴Capstan’을 설치해 사용했다. 사람을 죽이는데 얼마나 기술적인 오락거리로 에둘렀는지 이해할만하다. 둘째는 내부의 반원형 넓은 광장 안에 역청으로 방수한 후 고가수로Aqua Claudia와 연결하여 물을 끌어들이고 호수처럼 물을 담수하여 로마해군의 전승역사를 퍼포먼스Performance로 즐기는 지중해 바다의 무대Stage로 사용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로마 시민들의 자긍심을 가히 짐작할만하다.
마지막으로 현대에는 경제력만 뒷받침되면 메가 빌딩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콜로세움은 강한 나라만이 지을 수 있는 기념비적인 특수 건축물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콜로세움은 매우 정치적이어서 냉혹한 현실을 대변했다. 죽고 사는 문제, 나아가 로마와 주변 속주屬州에게 보내는 힘의 상징이었고, 유대민족에게는 반란은 곧 영원히 가혹한 죽음뿐이라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정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4. 자랑스러운 로마인. 수취와 굴욕의 유대인
공화정은 지배계급층에서부터 평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콜로세움 안에서 오락과 잔인한 놀이를 즐겼다. 세월이 흐르며 그 건축물을 통해 로마 시민들은 인본주의 정체성Identity이 타락墮落의 길에 이른다. 로마는 그리스건축을 로마 양식으로 승화시킨 찬란한 ‘바실리카 양식’으로 절정을 마친다. 공공건축물의 꽃인 콜로세움을 비롯해 속주에 지어지는 다양한 공공건축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결과물인 적산건축물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자긍심은 가히 짐작만 할 뿐이다. 땅 위에 세운 영원한 제국은 없다. 훗날 로마는 북유럽 민족들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예고된 사건이었으며 멸망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로마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유산으로 넉넉히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민족의 침략과 수탈收奪로 쌓은 재물과 인권유린의 역사와 함께 자기 땅에 지은 ‘적산건축’이지만 그릇된 산물인 콜로세움을 지극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아주 당연시하고 있다. 이것은 강자가 누리는 권리일지는 모르지만, 공의로움을 보편적인 사고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묻고 싶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 편에서는 굴욕屈辱적인 기념물일 것이다. 제3자가 볼 때 콜로세움을 유대교인의 순교지와 성지로 생각하면 된다 할지 모르지만, 피해자의 역사관으로 그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원히 기억되는 자존심의 사관일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신병新兵 들에게는 마지막으로 교육하는 마사다 유적과 더불어, 자신들의 조상이 강제 노역으로 지은 주변국의 고대 건축물들을 보여주며 아픈 과거를 각인刻印시키는 역사교육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지금 남아있는 예루살렘 성평화의 성에 유일한 서쪽 성벽인 ‘통곡에 벽’에서 그들은 지금도 ‘토라’를 암송하면서, 그 옛날 솔로몬(평화라는 뜻) 왕과 행복했던 예루살렘 왕국의 시대를 회상하며, 오늘도 그때와 같은 기도로 메시아(구원자, 구세주 만왕의 왕)가 오는 그날까지 종교적Judea 신념을 굳건히 불태우고 있다. 더욱이 네 구역으로 나뉜 예루살렘 영토와 그 옛날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준 솔로몬 성전 터에, 지금 이슬람사원인 ‘알 아크 사원Al-Aqsa Mosque’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가히 짐작이 간다.
5. 양날의 칼
고대 건축물들이 지어진 시대적 배경과 건축 과정 속 공간들을 살펴보면, ‘이념’과 ‘공간론’에 대한 맥락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인간다움과 사회와 문화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게 해준다. 좋은 사회이든 나쁜 사회이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으로 반응하는 것이 그 나라 그 사람들의 삶 아니던가. 단적으로 사회와 문화를 굳이 함축한다면 작은방 하나에서 시작하여 집이 되고, 마을이 되고, 어느 날 도시가 되어 국가에 이른다. 구불구불한 골목길들 사이에 아이들이 뛰놀고 노인들은 햇볕을 쬐고 지역성이 강한 풋풋한 마을 냄새와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장소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장소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양면성의 두 가지 문화적 언어가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력처럼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또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觀念이나 이념理念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생각들은 인류학적으로 어느 지역을 통칭統稱할 수 있는 사회와 문화라는 함축된 증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해도 어떤 부분은 소홀해지는 것이 일반일뿐더러, 그 안에 이따금 담론 거리가 있고 논쟁거리가 되어, 가슴 아파 속상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기억들이 전개될 것이다. 그것이 사회와 문화를 아우르는 가족사이며 민족사일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의문들을 역사를 통해 회자回刺하여, 쓰러져가는 역사의식을 상처 난 건축으로 복원하여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세계사는 보이지 않으나 보일듯한 끝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마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고대블레셋족속과의 전쟁.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분야에 모두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 민족의 앞가림을 위해서, 내 빗장 단속을 위하여 더욱 지난 과거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6. 회상
불과 78년 전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고통을 당했다. 한편 한국인들의 사회, 문화, 그리고 역사관에 앞서 이 두 민족 간의 사건들을 공감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생각나겠는가? 당연히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사회적 잔재들과 현재 지방에 산재해있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마치 보물처럼 착각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건축물들이 눈에 밟힐 것이다. 인문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저 문화유산이라는 단어 한 마디에 보존保存해야 한다는 의식만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이들 건축물의 최전선에 서 있는 건축사들은 보존 외에 무엇으로 진정한 답을 찾고자 하였는가 질문하고 싶다. 보존의 이유가 무엇인가? 적산건축물들 속에 가려져 잊어서는 안 되는 선조들의 고통과 시대적 피의 얼룩들을, 건축사의 관점에서 역사적 소신을 국민들에게 얼과 정체성으로 고취高趣시킬 필요가 간절하지 않겠는가? 이 일은 당연히 건축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분명 우리는 지나간 과거의 적산 건축의 유적遺蹟들을 눈으로 보고 만져보게 해야 할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미래를 향한 이상도시異象都市를 생각한다면,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공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교훈敎訓 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마음에 기억하고 담아두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교육 방법을 생각하면, 우리 건축사들도 어린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깊이 있는 사관 교육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사관이 절실한 지금, 나의 조부曺夫가 자주 말씀하던 일본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지금地金. じがね’이라는 단어를 상기하게 된다.
한일 관계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미래도 한국을 향한 침탈은 ‘지금地金. じがね’으로 다지고 있을 것이다. 일본 그들의 마음을 살펴보자. 군국주의 피를 불러온 천황天皇이 있는 일본, 일본인의 민족성이 좋든 나쁘든 그들은 천황의 말에 따라야 한다. 오늘날 그들은 민주주의 국가라 자칭하지만, 정치는 사실 보편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특이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역사를 왜곡하고 그들에 로망인 ‘자유대’가 ‘군대’가 된 사실은 어떤 부활인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들이 피운 불씨는 지금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로히토’는 히틀러 악마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해 조선에 뿌렸다. 을사늑약의 후유증은 3대를 거처 지금 4대까지 이르러 아직도 당혹스러운 인사들을 볼 때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한국 사회는 아직도 파시즘fascism적 사회조직이다. 더욱이 잘못된 교육제도와 개인 이기주의, 게다가 자본주의 나라라는 말이 공공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비대칭발전의 고도성장은, 좀 늦은 성장이어도 편식 없는 밥상이 더 중요했음을 상기시켜주지 않을까 싶다. 지난해 전범자의 후손 아베 신조가 피살되기 몇 해 전, 그는 대외적으로 한국의 과거사에 대해 “털끝만큼도 사과할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 일찍이 이스라엘 강경파 정치인인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총리는 당당하게 대외적으로 이런 발언을 했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고통과 핍박 속에서 주변 여러 나라의 고대 건축물들을 건축했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시련과 수난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강조했다.
고대국가의 정복 사례를 중심으로 간단히 건축적인 상황과 정치적인 상황의 관점을, 정복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민족이 아닌 것이 자랑이라면, 내 곳간 단속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되었든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 중이다. 이번 전쟁은 전 세계에 파급되는 충격파가 지난 세기보다 클 것이다. 나 혼자 죽는 그런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냐민 네타냐후의 생각에 타협과 양보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말을 일본에 빗댄다면 그들의 역사적 사죄는 세기가 다시 바뀌어도 결코 사과 한마디, 외교적 타협 한마디 하지 않을 것이다. 조부의 말씀에 의하면 1945년 패전 후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100년 안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광복 78돌인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양 진영으로 갈라진 정치와 민심 속에서 기후 위기, 중동전쟁 등 도전해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중국, 미국 그리고 러시아는 한국을 주시하고 있다. 댐이 부실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군사, 경제, 문화 그 무엇으로든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숨통을 조일 수 있으니까. 분명한 것은 약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진리일 것이다. 국가가 약하면 가난한 자도 부자도 지식인도 다 죽는다.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가 또 다른 내부의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제2의 ‘병자호란’ 같은 굴욕의 역사를 맞이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는 동아시아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들 옆에 서 있는 건축사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건축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리고 역사적이다. 인구가 고작 1천만도 안되는 이스라엘이 이슬람 한복판에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스라엘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지금 우리는 생존의 현장에 서 있다.
토머스 제퍼슨은 역사란 “과거에 대하여 알려줌으로써 미래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펜스’ 전 미국 부통령은 강하게 주장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글. 천서진 Cheon, Seojin 종합건축사사무소 아키리움
천서진 건축사 · 종합건축사사무소 아키리움
대한민국 건축사(KIRA)로 서울시립대 석사를 취득했다. 현대건설(주), 김중업건축(주), 맥 종합건축(주) 등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경기미술대전, 한국건축전 등에서 수상했다. 「지역사회 노인을 위한 종교시설의 활용 가능성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a7w7arc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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