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국건축의 현재성 2018.06

2022. 12. 2. 19:17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편집국장 주

건축담론을 시작합니다. 매달 다양한 건축계 필진들을 모시고, 우리 건축계가 고민하고 있는 여러 주제들 을 논하려고 합니다. 우리 환경은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뿐만 아니라 초개인화 되 는 개인 경제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인구감소와 고령화가 세계 유래가 없이 전개되고, 도시재생이라는 이슈가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의 국가 정책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건축계 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시선과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입니다. 월간 건축사는 국내 유일의 건축사 발행지로 책임감을 가지고, 건축담론 코너를 시작하려 합니다. 지면특 성상 매월 각기 다른 주제로 약 1~2편의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의미는 강하게 나아가겠습니다.


590호 주제는 “한국 건축의 현재성”입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일제 식민시대에 한국 건축은 잘려져 나간 시기입니다. 농업중심의 중 앙통제 경제 사회의 조선에서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경제체제의 산업화 과정은 물 흐르듯 이동하지 않 았고, 단절되었습니다. 엉뚱하게 일본식 사고방식과 극단적 국가주의가 흐름을 왜곡했습니다. 1945년 이후 우리가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느닷없는 산업사회는 건축을 정신 없게 만들었고, 여전히 그 모순과 혼돈 속에 있습니다. 시장과 제도, 정책과 규제 등 수 많은 모순은 여전 합니다.

다만 2018년 건축의 희망이 보이고, 우리의 현재를 직시하는 노력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번 기회에 천천히 현재를 돌이켜 보고 생각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01 한국건축의 현재성

The Currentness of Korean Architecture

 

한국 건축의 현재성이란 고상한 담론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지금 이 시점의 치열한 상황이 며, 어찌 보면 우리가 자초한 슬픈 현실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직시해야 하며 정확하고 단호하게 환 부를 치료해야 한다. 또한 목표를 정당화하기 위한 지식체계로서의 담론이라는 의미로 볼 때, 우리 의 목표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나라에 맞는 좋은 건축인가, 전문가로서의 권위인가, 아니면 단순히 생계의 도 구일까? 물론 그 모든 것이 다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라도 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 하 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건축을 건강하고 튼튼하게 키워내지 못했을까?

현대건축이 들어온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의 건축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왜 우리는 우리의 건축을 건강하고 튼튼하게 키워내지 못했을까.

한때 한국의 설계사무소들이 중국으로 많이 진출하여 활발하게 설계를 하고 대형 개발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설계수준이 중국에 한참 앞선다고 생각했으며, 자심감도 꽤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 중국에서는 이미 프리츠커 상 수상자가 나왔으며,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본 중국의 건축 수준은 엄청나다. 중국뿐이 아니다. 어느새 베트남 등 동남아의 건축도 우리보다 훨씬 참신하 고 실험적이며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방심하는 사이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현대중공업에서 강릉에 짓고자하는 대형 호텔 설계를 리차드 마 이어라는 미국인에게 맡긴 적이 있다. 설계를 시작하는 시점에 현대중공업은 사업의 홍보차 리차드 마이어 초청 특강을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었다.

모처럼 듣게 되는 건축 거장의 강연이기도 했고 주최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홍보했던 터라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그날 나도 그 곳에 갔었다. 도착해보니 행사장 초입부터 사람들이 무척 많이 모여 있었 다. 다양한 건축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강당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주최 측이 출입을 엄격하게 체크하며 입장객을 대하는 태도가 딱딱하고 불친절해서, 남 의 잔치에 찾아온 불청객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건축특강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도 책으로만 봤던 사람을 직접 보고 그의 작업 과정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로 불편 함을 꾹꾹 참으며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이윽고 강연이 시작되었다. 하얀색을 주조로 한 깔끔하고 세련된 설계로 유명한 백발의 노장 리처 드 마이어가 단상에 올랐다. 그러나 강연 내용은 우리도 잡지에서 많이 봤던 자신의 작품을 슬라이 드로 나열하고 개요를 죽 읽어 나가는 정도였다. 그만의 건축의 철학이나 독특한 관점 등 기대했던 알맹이가 없었다.

대신 강연이 끝나고 주최 측 정몽준 회장이라는 사람이 단상에 올라 행사에 대한 공치사를 시작했 다. 그는 리차드 마이어를 굳이 소개하며(그보다 앉아있는 청중이 훨씬 많이 알고 있었을 텐데) 한 국 건축설계의 수준이 낮아서 자신이 외국의 유명한 건축사를 비싼 돈 들여 초빙하여 설계를 맡겼 으며, 우리나라 건축의 발전에 크게 기여 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자신이 주최한 행사에 일부러 찾아온 손님들 대다수를 이루는 우리나라 건축계의 많은 종사자들을 앞에 두고, 한국 건축을 노골적으로 낮잡아 이야기하는 어이없는 무례를 들으며 잠시 내 귀를 의심 했다. 한국 건축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모두 넓디넓은 강당에 앉은 채로, 아무런 준비도 반발할 틈도 없이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호텔은 잘 지어졌고 지금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호텔에 대 한 기사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때 짓밟힌 자존심이 떠오르고, 그때의 상처가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아물지 않고 욱신거린다.

 

이를테면 건설업 한 구석의 좁디좁은 분야로 보는 것이다

한국 건축의 현재를 보여주는 슬픈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에서 건축에 대한 인식이 대충 그 정도이 다. 이를테면 건설업 한 구석의 좁디좁은 분야로 보는 것이다.

또 한 번은 경기도 화성 봉담이라는 곳에 누군가 집을 설계하고 싶다는 요청을 받아서 방문한 적이 있다. 먼 길을 찾아가서 의뢰한 사람을 만나고 땅을 봤다. 큰 저수지를 앞에 둔 제법 괜찮은 땅이었다. 나를 부른 사람은 집도 제법 크게 지을 것이며, 어떤 기능을 넣으면 좋겠다는 등 설계에 대한 요구사 항을 죽 나열했다. 그리고 말미에 이것은 현상설계이므로 자신에게 설계안을 제출하라고 이야기했 다. 이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있게 지금 두 군데에서 설계안을 만들고 있으며 내가 세 번째 방문한 회사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런 현상설계가 어디 있느냐? 이게 대체 무슨 경우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의 선배가 그 렇게 하라고 조언했다고 했다. 그 선배는 “예전에 파주에 어떤 마을을 조성하며 건축설계회사 여럿이 모여 집을 지었는데 돈은 많이 들고 하자가 너무 많았다며, 건축설계 하는 사람들을 믿지 말고 경합을 붙여야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미리 의사를 묻지도 않은 현상설계에 참여할 생각이 전 혀 없으며, 처음에 만난 설계사무소와 착실히 진행해보라는 조언을 하고 막히는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다.

무척 입맛이 썼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의 현실이기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건축계를 생각하는 일 반인의 인식이 그 정도인지는 몰랐다. 이런 상황이 모두 무지한 대중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30년 전, 내가 설계사무소에 갓 입사했을 때만해도 비록 신입사원이었지만 현장에서는 대우를 받았 고, 내가 하는 이야기에 다들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줬고 공사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현장 에 나가보면 많이 태도가 달라져있다. 설계에 대해 지적하고 심지어 현장에서 맘대로 설계를 고치 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설계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그 의도를 파악하고 협의하면서 공사 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설계자는 공사를 잘 모르고 이상하고 낭만적인 소리만 하는 사람 취급 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00년대에 들어서며 민간발주의 일들이 많이 줄어들고, 건설시 장의 물량이 턴키,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사업 등으로 소화되는 공공발주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고층 주상복합과 뉴타운 개발 등이 줄을 이었고 공기업의 지방이전, 공공청사의 신축 등 대단히 큰 물량의 사업들이 진행되었다.

분명 건축계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건축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땅 짚고 헤엄치듯이 대형 건설사와 대형 설계사무소가 사이좋게 나누어 가져가며 소진되었다. 거창하 게 차려놓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다음 사람 먹지 못할 정도로 뒤섞어버리듯 아수라장을 만든 것이다.

 

들러리만 선 턴키 비즈니스…

과연 건축발전에 얼만큼 기여했는지 의문 대형사무소는 몸집을 계속 불리고 매출액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런 사업은 건설사가 주관사가 되고 설계사는 그 아래로 들어가서 설계비를 건설사에게 받는 형태였 다. 물론 건설사가 주관사가 되어서 안 될 것은 전혀 없다. 다만 건설사는 설계에 대하여 디자인이나 건축의 독창성보다는 공사의 용이성과 이윤에 대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므로 우수한 설계를 기대 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가 있다.

건설사의 눈치를 보는 설계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으며 그 사이 한국 건축계 는 이상한 컴퓨터 그래픽과, 기능에도 어울리지 않고 쓰기도 불편하며 에너지 낭비가 심하며 지나치게 번쩍거리는 공공건축물을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건축의 위상은 말할 것도 없고, 건축의 진정성보다는 건축에 대한 지독한 냉소만 남아있다. 물론 건축이 진정성과 열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자부심과 열정이 필요한 직업이다.

 

꼬여버린 건축교육 개혁

기형적인 설계시장 만큼이나 우리의 건축 교육도 아주 이상하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어느 시점에, 우리 건축교육의 내실화와 국제 설계 기준, 건축설계의 해외진출 운운하며 힘들여 5년제로 학제를 개편했다. 그에 따라 인증위원회도 만들고, 각 학교는 그 기준에 맞추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매달렸 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오히려 좋은 학생이 건축설계를 기피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앞선 교육 시스템이 오히려 진입을 막는 좁은 문을 만들어 버린 일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입시생들의 건축 과 지원이 줄어든 것 말고도, 그렇게 힘주어 연설하고 수선을 떨어 5년제 건축대학이 만들어졌으나 그 이후 오히려 건축 설계를 하려는 졸업생의 수는 많이 줄었다. 학생들은 졸업하는 해에 일찌감치 취업시험을 보고 여기저기 면접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결국 건축과는 공부만 길게 하고 별로 장래성이 없는 과가 되어버렸다.

이건 또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은 따지고 보면 그간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또한 당장의 이익을 추구하다 생긴 것들이다.

건축이란 오래 걸리는 일이며 그만큼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지켜나가야 한다. 많은 건축사들이 묵묵히 그 런 과정을 거치며 현실과 부딪히며 어렵게 건축을 한다.

설계를 하고 건물을 짓기까지는 많은 절차를 거쳐야한다. 인허가를 받고 사용승인까지 얼마나 험난 한 길인가. 그 과정에서 겪는 공무원들의 갑질 행태 또한 그다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나는 6공화국 때부터 건축인허가를 경험했다. 그 사이 많은 경험을 했다. 아주 관료적이며 지나친 억압이 이루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허가를 한 번 내기 위해서는 산더미처럼 접어서 철한 청사진을 쌓아서 들고 가서, 건축사협회에서 도장을 찍고 검토를 받고 구청에 들고 가서 관련부서에 하나씩 배부하고, 조금이라도 수정이 생기면 청사진을 갈아 끼우는 등 번거로움이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무원들도 아주 고압적이라 감히 말대꾸할 수도 없었다. 그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이상 하게 고정된 관료들의 못된 관행이었는데, 물론 그 사이 민주화가 많이 이루어지고 공무원들이 그 전처럼 고압적으로 군림하는 시절은 많이 지났다.

권위에 의한 규제보다 제도에 의한 규제가 기이하다.

그런데 지금은 과다한 심의 제도와 특별검사원 제도 등을 통한 간접 갑질이 아주 극심하다. 법에도 없는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으로 심의를 거치는 동안 설계안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뚜렷이 공 공에 피해가 간다거나 현저하게 법률적 위해요소가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아닐 때 어떻게 구제를 받아야하는가.

필요 이상으로 다수의 생각이 반영되다 보면 두루뭉술한 설계안이 나오고, 밋밋하고 특징이 없는 건축 환경이 되기 쉽다. 제대로 된 건축 설계는 이런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런 심 의란 결국 건축설계에 종사하는 사람끼리 서로 억압하게 하는 아주 이상한 구조의 시스템이고, 사용승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청이나 시청의 건축과는 범죄의 유무를 가리는 사법기관이 아니다. 그들은 행정기관이다. 행정적 으로 판단하고 지원해야 하는 우리의 공공기관이, 설계자를 견제해야하고 감시해야하는 예비 범법 자로 보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도처에 ‘열린사회의 적들’이 포진하고 있다. 마치 지뢰밭을 걸어가듯 건물을 한 채 짓기 위해서는 많 은 고난을 헤쳐야한다. 가끔 우리끼리 “이건 뭐 독립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이야기하며 이 런 저런 고충을 이야기하곤 한다.

한국 건설 시장의 규모가 160조 가량 된다는데 설계 시장의 규모는 5조 정도 된다. 건설규모에 비해 설계 시장의 규모가 분명히 작은 편이다. 정상적인 대가를 요구하기만 해도 우리의 시장은 두 배 이 상으로 커질 수 있다.

 

왜곡된 건축설계시장 정상화 되어야

건축설계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시장의 확대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 고 있다. 아주 이상한 일이다. 이것 역시 우리가 스스로 가격을 낮추며, 영역을 좁히며 만들어놓은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설계사무소는 대략 9천여 곳 정도 된다. 그중 75% 정도가 종사자가 5인 미만의 작은 사 무실이다. 그리고 매출액이 1∼3억 미만의 사무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중 4%에 불과한 대형 사무실이 설계매출 총합의 8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한다.

무척 기형적인 구조다. 그리고 여러 곳에 진입장벽이 설치되어 건전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 으며 참신한 건축사가 발굴될 수 없는 구조이다.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사회경제적 변환과 외환위기 등을 겪으며 우리나라 건축계의 작은 사무실들 이 많이 사라졌다. 사람은 동맥과 정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핏줄들이 건강해야 살아간다. 작은 규 모의 설계사무소는 우리 건축계의 실핏줄 같은 존재이다.

그런 실핏줄들이 다시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아파트에 지친 사람들이 다시 설계사무소 를 찾기 시작한 십여 년 전부터이다. 그 무렵부터 십 년 정도 빙하기를 거친 건축계에 약한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폐허에서 작은 꽃들이나 싱싱한 들꽃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어 올리듯, 많은 건축 사들이 성실하게 설계하고 열심히 현장에서 조율하였고 사회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렸다. 어찌 보 면 진정한 건축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고, 건축계에서 힘을 모아 응원하고 격려해야하는 일 이었다.

 

황폐화된 시장에서 희망이 보이는 작은 건축사사무소들...

소형 사무실들이 활기가 생기자, 대형사무실에서 나온 인력들이나 대학 졸업하고 몇 년의 실무를 거쳐 바로 독립한 사무실들이 비온 다음에 죽순이 일어나듯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적은 공사비로 집을 짓기 위해 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치고 건축주와의 신뢰를 쌓기 위해 많은 대화를 이루는 등 그동안 없어졌던 건축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렵게 찾아온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건축에 대한 애정을 되살리고 초심을 되찾아 서로 격려하고 지원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글. 임형남 Lim, Hyeung-nam ┃ 본지 편집위원 · 건축사사무소 가온건축

 

 

 

02 돌연변이 건축의 시대

The Age of Evolutionary Architecture

 

들어가며 :

땅집사향 11년 9개월째다. 그림건축과 공동으로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약칭, 땅집사향)라는 이름의 월례 저 녁 강의를 운영해온 지도. 초대된 이야기손님은 건축사, 건축가, 건축비평가, 건축학 교수, 건축사진 가, 건축·도시기획자, 미술 디자인 전문매체 편집자 및 기자로 구분되는데 그중 ‘건축가 초청 강의’를 통해 대략 100인이 넘는 건축사(및 건축가)가 출연했고, 현재 다섯 번째 시즌을 수행하고 있다.

매달 세 번째 주 수요일 저녁이면 으레 땅집사향을 통해 30대 부터 80대에 이르는 건축사(및 건축 가)를 만나서 그들의 건축 삶과 작업방식, 철학을 듣고 묻는 과정을 지나왔다. 무료 공개강의로 진행 되는 이 프로그램에는 건축전문직 종사자는 물론 건축에 관심이 많은 소수의 일반인들도 꾸준히 참 석해오고 있는데 강의 내용이 전문분야로 쏠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화불량에 걸린 표정일랑은 거 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야기손님과 객석의 참여자 모두 매순간 흥미로워했고 크든 작든 자극을 주 고받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야기손님들은 90분가량의 주제발표와 45분가량 진행되는 질의응답 또는 대담의 형식 그리고 1시 간여 지속되는 뒤풀이 자유대화 자리에서 각자가 현장에서 지켜오고 있는 건축의 경험을 공유하는 데 어느 순간에도 일방적인 자기주장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대기보다 청중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 를 기울이는 모습을 통해 땅집사향이 통상의 ‘교육/강좌’가 아닌 건축으로 소통되는 무대라는 점을 각인시켜준다.

지난 5월까지 총 137개의 이야기주제가 땅집사향에서 발표되었으니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 건축동 네의 이야기(목록)가 풍성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을 거는 사회든 말을 뱉는 사회든 이야기로 통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있다. 이야기의 진정성 혹은 깊이 등에 있어서 편차는 늘 발견되는 것이지만 여러 결의 이야기 구조 속에서는 넘치거나 부족하거나 그것들이 발화하는 ‘차이들’마 저도 배움과 소통의 기회가 됐다.

혹자는 건축인생 최초의 이야기주제를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고, 더러는 이곳저곳서 유사 주제로 발표해온 반복된 이야기주제를 들고 나선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듣는 사람의 양태 혹은 상태가 다르고 저들 이야기손님이 바통을 이어가며 쌓은 시간의 축적이 주관자의 의지를 뛰어넘어 땅집사향을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건축 콘텐트로 자리매김한 까닭이다.

그 출발은 미약한 것이었다. 2006년 늦가을 어느 그믐날, 서울 신당동에서 개업한 그림 건축사사무소(대표 임근배) 내의 개방 공간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앉아 개업 초기 몇 안 되는 직원들의 소속감 을 키우고, 지적 자극을 위해 소박하게 시작한 것이 (지금도 여전히 소박하고, 그것은 땅집사향의 밑 바닥에 깔린 정신이기도 하다) 한 달도 안 되어 입소문을 타고 두 번째 모임부터 외부의 건축인 몇 몇이 알고 찾아오게 되면서 땅집사향은 점차 건축동네의 공유재가 되어갔다.

건축동네에서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던 선후배 건축지인들이 하나둘 이야기손님으로 나서주기 시 작하여 지난 12년 동안 출연진의 면면은 한 차례의 겹침 없이 이야기손님들의 인생작처럼 이어오고 있으니 땅집사향은 어느덧 건축동네의 인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터로 자리 잡았 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저들 중에는 이미 세계건축의 큰 바다에서 한국건축의 자존심으 로 불리기도 하고, 많은 이가 건축동네 안팎에서 많은 화제를 뿌리는 리더로 활동하기도 하고, 한편 에선 대양(大洋)의 존재를 의식할 겨를 없이 현장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창조와 진화 :

더 타이탄 잠시 한 편의 영화(The TITAN)로 화제를 돌려 보자.

2048년. 지구는 방사능 낙진으로 환경의 파괴가 극에 달한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자원의 고갈이 뒤를 잇고, 지구촌 곳곳은 부족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의 참화로 뒤덮인다. 10년 뒤 지구 절반 이 물에 잠기고, 15년 뒤 세계 인구 절반이 굶어죽는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은 나사(NASA)는 지구 밖의 행성에서 살 길을 찾고 태양계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인 타이탄-그곳은 살인적인 추위, 액체 메 탄의 바다, 90%의 질소를 함유한 대기 조건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도, 헤엄을 치기도, 숨을 쉴 수 도 없다. 한 마디로 정상적인 상태의 인류 생존이 불가한 (생명체 탄생 이전의) 원시 지구와 같은 환 경으로 파악되는데-에서 희미한 가능성을 찾는다. 나사는 군(軍)의 협력 하에 현대 유전과학의 기 술력을 기반으로 행성 타이탄의 환경에 맞춰 진화시킨 초인류-창조주가 만들어낸 인류를 능가하는 변종 인류-를 내보내어 탈(脫)지구 플랜을 짠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영화는 천신만고 끝에 한 사람의 인위적 돌연변이를 완성하고 그를 타이탄에 안착시키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화면을 타고 흐르는 동안 문득 오늘 우리의 건축을 대입시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창조의 신화를 (그것은 늘상 인류의 지배 이데올로기이자 불가능에 도전하는 기제로 등 장하는데) 대신하여 진화에 기반한 우리 건축의 현재형에 대하여 고민해 볼 수 있었기에.

 

땅집사향을 통해 만난 건축의 주제들은 세대 및 건축수학의 배경에 의해 차이를 보였다. 노장 세대 의 경우 잘 다듬어진 (동시에 성찰적) 건축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다면 중견세대는 물오른 건축의 성 과에 적절히 언어를 입히고, 신진세대는 실험적 작업방식으로 설익은 상태의 (언어로나마) 존재감 을 발현했다. 이렇게 토막 내어 세대의 특징을 구분하는 것이 비합리적일 수 있지만 저들에게서 연 령대가 갖는 공통점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건축을 공부한 학력, 지역, 학풍의 차이 등도 저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의 지향성을 구분 짓게 했다. 다소 난해한 추상 언어의 조합으로부터 단순히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근작 소개의 형식 에 이르기까지 때론 도그마의 위험을 무릅쓰고 건축의 세계관, 관심을 정의하려드는 태도는 공부 배경에 의해 차이를 만든 증좌라 할만 했고, 각각은 우리 건축의 현재성을 담아내는 소중한 목록으 로 손색이 없었다.

 

그 중 이 글의 중점 대상이 되는 젊은 층의 관심주제는 기존 관행의 정석(定石)을 넘어 고유한 방식 으로 해법(解法)의 가지를 확장해가는 것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는데 이러한 지점은 통상 평단 의 호응을 얻기보다 비판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진세대는 건축설계시장의 상태를 다양한 층위로 뒤바꿔놓는 데에 긍정적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서구에 중심을 둔 건축(Architecture)의 창조론자들은 어떤 경우에서든 한국에서 건축 적응력이 대 박의 신상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쪽박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함을 경계한다. 애당초 승 산 없는 게임이므로 세계무대에서 건축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헛된 꿈을 꾸지 말라는 것이다. 대단 한 선민(先民)의식의 발로다. 그러면서 중간 단계에 대하여는 말을 아낀다. 현실은 대박 아니면 쪽 박의 이분법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중간 단계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너무나도 쉽게 폄하해버린다. 생물학적 창조론자들이 맹목적으로 앞쪽의 절벽만 쳐다보고 있듯이 건축의 창조론자들이 그러하 다. 돌연변이 혹은 그에 상응하는 중간 단계 존재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거룩한 백성과 아닌 백성이 라는 구분된 건축의 교리에 무한 관심을 표명한다.

 

주변을 돌아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건축(architecture)의 대부분은 비대칭적 권력 관계에서 비롯한 결과다. 일차적으로 건축을 생산하는 두 주체(설계자와 의뢰자)간의 비대칭성은 태생적으로 돌연변이의 건축을 생산할 확률을 높였다. 그 결과가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닐진대 서구 세계의 잣대 앞에서는 속수무책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건축 창조론의 기원이 외부세계에 있음으로 해서 빚어 진 하나의 (무시해도 좋을) 정황에 불과한 데 말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교육, 제도 등 인문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조차 일그러진 권력 관계의 구도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임과 그것의 결과가 유의미한 건축으로 평가되지 못할 것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신진세대(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 연령대에 걸쳐 당면한 과제)가 공통적으로 떠안고 있는 생존의 경 계에서 어정쩡하게 취하고 있는 중간 단계의 건축행위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건축의 진화론, 그러니까 돌연변이에 대한 이론화 작업이 수반되지 않고 있는 데서 촉발된 한국현대건축의 취약한 구조는 앞서의 건축을 생산하는 비대칭적 권력 관계 를 심화시키고 나아가 건축하는 전문 집단의 자존감을 상실케 하는 악재로 작용해왔다고 볼 수 있다.

 

멋진 신세계 :

돌연변이의 시대 2000년대에 접어들어 소수의 건축학자가 중간 단계의 건축에 대하여는 입론(立論)을 펼친 바 있었 다. 일견 조악하고, 답답한 거리에서 역발상적으로 한국현대건축의 잠재성을 발견하고 서구의 건축 기준과 차별화 된 우리 도시건축의 양상을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돋우었다. 그러나 표면 적으로는 그와 같은 건축의 상태가 여러모로 불완전한 건축설계시장의 상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극복의 대상이 될 뿐 기회요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다음 단계로의 전이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진화론적 건축의 과정이 한국현대건축의 발전의 축으로 모색될 수 있다면 그로써 우리는 어떤 건축 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결과적으로 건축의 고전으로부터 현대성까지 아우르는 서구 건 축의 기준(우리에게 늘상 딜레마로 다가선 창조론적 건축의 가치)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멋진 신세 계를 구현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하여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적 행동이란 무엇일까? 아니 지 금 우리는 무엇을 방기하고 있는가?

 

12년의 땅집사향을 통해 나는 세대불문하고 이 땅의 건축 프로페셔널이 무척 작은 서클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많이 놀라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소수에게서 서클이 보인다는 것은 그나마도 다행한 상태이고, 대체로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움직임, 조짐에 대하여는 관심을 끊고 살아가고 있다 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대체로 교육자(혹은 발화자)의 위치에 서는 것에 비하여 피교육자(혹은 수신자)라는 포지셔닝에 대하여는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받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연대감 또는 관심의 증폭이 의미 있는 돌연변이의 생성을 가능케 할 터임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생업(이권 등)이 달려 있는 현장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서 찾아가지 않는 닫힌계 안의 건축 종족들이라니….

 

그래도 희망을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소수일지언정 진화론적 군상의 건축인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 다. 당장 저들이 실현하고 있는 건축의 성과들과 무관하게 건축의 장(場)을 풍요하게 만드는 데에 작은 기여를 하며, 타자와의 관계망을 통해 건축의 가치를 재고하며, 우리 건축의 문제적 과제를 공 유하며, 불완전하더라도 건축의 실험을 마다하지 않으며, 생존을 위한 전장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교조적 건축의 기준에 항시 의문을 품고 앵무새이기를 거부하는 이들로부터 ‘모 아니 면 도’ 식의 논리가 아닌, 중간 단계의 흥미로운 한국현대건축의 결정판이 생산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

 

나가며 :

진화, 지상 최대의 쇼 우리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가 다소간의 차 이를 두고 우리와 닮은 동물들로 구성된 풍성한 생태계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우리와 덜 닮았지만 우리에게 모든 영양소를 공급하는 식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 우리의 먼 선조를 닮았고 우리 가 이 땅에서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돌아갈 때 우리를 부패시킬 박테리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 역시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다. 다윈은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문제인지 이해하는 데에 있 어서 시대를 앞서 갔을 뿐 아니라, 문제의 해결을 깨닫는 면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다윈은 또한 동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상호 의존한다는 것, 그 정교한 관계망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이해 하는 면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복잡성, 그런 우아함,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에 둘러싸여 존재하게 되었을까? 답은 이렇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에 관해 인식할 수 있는 이상, 그리고 그에 관해 질문을 던질 수 있 는 이상, 어차피 다른 식으로는 될 수 없었다.(중략)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무작위적이지 않 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직접적인 결과다. (리처드 도킨스, 『지상 최대의 쇼』, pp.563-565)

 

한국 현대건축의 성과가 세계 건축의 중심에 위치해야한다는 강박은 지우자. 그보다는 이 땅의 여러 조건으로부터 만들어진 건축의 상태를 함께 아끼고, 상호도생의 자세로 응원하자. 건축의 적(敵)이란 없다. 중간 단계의 건축을 폄훼하지 말고 활성화시키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결의 환경이 독 특한 이 땅의 건축을 생산하는 동력이 된다. 건축의 창조론에 빠져든 서구 건축의 앵무새도 우리에겐 소중한 건축의 생태계임에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영향관계를 통해 진화해 나가는 것이다.

 

글. 전진삼 Jahn Jinsam ┃ 《와이드AR》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