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갯짓 2024.1

2024. 1. 31. 09:2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Flapping

 

 

 

 

고요 속에서 소리가 더 분명해지듯,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물상(物像)은 ‘공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공간(空間)이 없다면, 일체의 현상(現象)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공간이 없다니, 그럴 수도 있을까? 

우리가 숱한 갈등과 번민 속에 구현해놓은 설계안이 바로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부실시공’이라는 세간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온종일 이 현장 저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우리들의 감리 행위도 모두 다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게 2D(two-dimensional space)이든 3D(three-dimensional space)이든, 우리의 삶터 자체는 언제나 이렇게 생생히 펼쳐져 있는, 이른바 3차원의 공간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없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니? 헛짚어도 한참 헛짚은 것 같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렇게 허투루 여길 일만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철석같이 믿으며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건 일찍이 ‘어느 조건에 이르게 되면’, 시간도 연속적이지 않고 공간마저도 휘어진다는 이론을 주창한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부정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동안 입자(particle)인 줄로만 알았던 빛이, 입자(粒子)와 파동(波動)의 성격을 동시에 띠며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한다는 ‘이중슬릿 실험(Double-slit experiment)’과 또 현상계에서의 실재성(reality)에 의문을 품게 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이 태동한 지도 벌써 100년이나 지났다. 

유사 이래 그 긴 세월 동안 시간과 공간이 선험적(先驗的)으로 주어졌다고 믿어왔던 게 우리의 착각이고 무지(無知)였던 셈이다. 애초부터 시공간(時空間)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삶의 무대인, 이 현상세계에서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생생하게 보고, 듣고, 만져지는 이 모든 감각과 느낌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여전히 저 먼 블랙홀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로만 들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당장 현실에서는 뉴턴이 구현해놓은 고전 물리학이 더 사실적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인식한 이 세계가 자연현상과 일치하지 않아 혼란스럽다고 할지라도, 우리 인간생활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時空間)이 그 오랜 믿음만큼 그렇게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소음(騷音)이 고요함을 가렸다가 사라지면 ‘고요’라는 본래의 배경이 드러나는 것처럼,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물질 역시 ‘공간’이라는 배경을 통해 잠시 드러났다가 다시 원초적으로 사라지는 존재라고 한다.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의 연구성과가 점점 더 그 사실을 규명해 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럼, 우리 건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평면도와 입면도 그리고 단면도라고 하는 2D의 세계에서 실체(實體)가 하나둘 가다듬어지다가, 마침내 때가 되어 3차원 세계로 툭 튀어나오게 되는, 온갖 건축공간이란 공간이 근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망상(?)에 이르게 된다. 아니, 망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에서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온 한옥(韓屋)은, 크게 ‘기단부’와 ‘벽체 가구부’ 그리고 ‘공포부(拱包部)’를 포함한 ‘지붕가구부’로 구분된다. 이를 어떤 이는 천지인(天地人)으로 각각 3분(分)하여 그럴듯한 이론으로 포장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한옥에서는 눈에 쉽게 띄는 벽체와 지붕 이외에도, 그 전체의 상부 하중을 통째로 받치고 있는 초석(礎石)이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만일 초석을 포함한 기단부가 부실해지면, ‘앙곡(昂曲)’과 ‘안허리’로 저렇게 유연하게 펼쳐진 한옥의 지붕은 더 이상 전개될 수 없게 된다. 마치 무대가 없는 연극이 되고, 바다가 사라진 파도와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한낱 작디작은 초석도 그럴진대, 우리 현상계의 무대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의 구성 원리가 송두리째 흔들린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온갖 삼라만상의 생생한 현상이라고 한들, 어찌 그걸 ‘공(空)’과 ‘무(無)’에 대한 ‘실재(實在)’라고 단언할 수 있으랴? 게다가 물리적인 요소를 하나둘 집적(集積)하여 구성한, 우리 건축의 기반은 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건축에 대한 지고지순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며, 내가 건축설계에 침잠(沈潛)한 지도 어느덧 사반세기(四半世紀)가 지났다. 지나고 보니 한순간이었다. 때로는 건축에 풍수지리를 접목해 보기도 했고, 때로는 일조일사(日照日射)와 바람의 영향 등을 건축에 대입한답시고 삼원 일차 연립방정식을 억지로 세우고 또 그걸 풀어본답시고 호기롭게 덤벼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요즈음 문화재 실측설계에 집중하면서, 마치 해골(骸骨)처럼 처연하게 스러진 유산(遺産)에 직면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다들 한때 버젓한 형상을 제대로 갖춘 건조물이었을 테고, 또 당시 그 좌표상으로도 거기 그 자리에 여전해야 하건만, ‘시간’이라는 매개 변수 앞에서는 본디 제 원상(原狀)조차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적잖았다. 어쩌면 우리 현실세계는 때가 되면 마침내 형해(形骸)될 수밖에 없는, 그런 허깨비같은 존재들로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을 기반으로 존립해야 하는, 우리 건축은 공간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참으로 고약한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빛의 이중성’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불현듯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顛倒夢想)”


아, 이렇게 간단할 수 있으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공간 자체가 모두 우리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망상(妄想)이라는 얘기다. 헛것이라니? 달리 무슨 대꾸가 필요 없을 것 같다. 흔히 건축공간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꼽는 바닥과 천장, 그리고 창호와 벽이 당초 그 본연의 공간을 창출한 게 아니라, 그저 잠깐 임시로 점유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아니 그것도 시간의 변폭(變幅)에 따라서는 극히 짧은, 정말 ‘찰나’와 같다고도 한다. 

요즘 부쩍 잦아진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보다 더 안전한 생활환경을 만든답시고 철근을 빽빽하게 집어넣고 거기에 고강도 콘크리트를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데도, 순간의 존재밖에 아니라면 이건 필시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갈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자역학을 필두로 한 현대물리학은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는데 한 치도 주저하지 않는다. 무한히 확장되던 우리 우주가 마침내 어느 조건에 이르러, ‘시간(時間)’과 ‘공간’이란 매개변수가 그 변화를 급히 달리하게 되면, 시간이 무한대로 느려지고 공간마저 휘어진다는 사실이 재삼 상기되었다. 

이미 고정된 실체로서의 ‘건축공간’은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밤새 물리적인 공간의 배치를 고민하고, 또 그 공간들 사이에서 거미줄처럼 연결될 동선계획을 짜느라 밤잠을 설치고 있다. 어젯밤에도 나는 그랬다.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음에도, 나의 날갯짓은 잠시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본디 소명(召命)이라도 되는 양……. 

 

 

 

 

글.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 ·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전북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대표 건축사로 활동하고 있다.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현상에 주목하고, 산 따라 물 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의 ‘온새미 사상’과 문화재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살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난 사랑』, 『전주한옥마을』 등이 있다.

ybdcs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