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1. 11:10ㆍ아티클 | Article/에디터스레터 | Editor's Letter
Creating an environment where architects can focus on architecture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서 사무실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오늘의 일정과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해 본다. 기억에만 의존하기는 어렵고, 수첩이나 모바일 기기에 남겨둔 메모를 찾아 오전에는 어떤 업무, 오후에는 어떤 업무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계획대로 진행되면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울리는 전화를 받아보니 예상 못 했던 서류를 작성해서 보내야 하고,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도 이어진다. 누군가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고, 현장에 가봐야 하는 일도 생긴다. 그렇게 갑자기 생긴 일들에서 파생된 다른 일들에 시간을 쓰다 보면, 아침에 계획한 업무가 모두 진행되지 못한 상태로 하루가 지나곤 한다. 건축사의 업무 중 건축 본연의 것을 제외한 추가적인 업무가 너무 많고, 이것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건축사가 자신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미용실을 찾을 때 예약을 하지 않고 방문하면 서비스를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삼십 분 정도의 미용 서비스를 위해 헤어 디자이너(자격 명칭은 미용사) 선생님이 가능한 시간에 맞춰 예약을 하는 것이 이제는 모두에게 익숙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병원 운영시간에 맞춰 진료 예약을 하고 시간을 내서 병원을 방문한다. 다른 직종과 건축사사무소를 비교하기 적절한가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건축사를 찾는 건축주에게 이러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건축사를 만나는 것이 수년이 걸리는 건축 과정을 위한 첫걸음임에도 불구하고 약속 없이 불쑥 사무실로 들어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건축주가 저녁시간이나 주말에만 미팅이 가능해서 그 시간에 건축사가 맞춰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건축사지에 수록될 작품을 취재하며 상당히 인상적인 사무소 운영사례를 만났다. 강릉이라는 지역에서 시청 근처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위치의 건축사사무소였다. 미용실을 예약하고 식당을 예약하는 것처럼, 건축사의 상담 가능시간이 표기된 포털사이트를 통해 상담 예약을 하고 상담료를 유료 결제한 건축주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오래전 시청 근처에 위치했던 사무실에 불쑥 방문하는 건축주들을 대응하느라 건축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에 더해서, 지금은 자기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건축주들이 건축에 대한 뚜렷한 방향을 가지고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큰 비용은 아니지만 시스템을 통해 예약하고 상담료를 지불하는 과정이 건축사와 건축주 사이에 신뢰와 믿음을 가지게 만들고 계약과 설계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느껴졌다. 그동안 설계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것으로 사무실의 일부를 꾸민 것 또한 건축이 진행되도록 하는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미 훌륭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건축사분들이 이러한 좋은 사례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건축주를 만나는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그만큼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불필요한 일을 줄여 건축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되기를 바란다.
글. 박정연 Bahk, Joung Yeon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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