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또 다른 이름, 사색 2025.1

2025. 1. 31. 09:3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Meditation, another name of architecture

 

 

 

긍정의 힘
아무리 세상을 살아보아도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버틸 수 있는 것과 버릴 수 있는 것들을 철저하게 구분하면서 저마다 삶이 준 무게를 지탱하며 살아간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 건축을 하는 내게도 무수히 반복되면서 지루한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하며 결코 끝나지 않을 시간을 또 다른 나와 같은 사람들처럼 지극히 평범하게 보내고 있다. 어차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고 피할 수도 없다. 예전부터 그랬듯이 이유와 변명은 스스로에게 절대로 위안을 주지 못하기에,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쓸모 있는 일을 마쳐내야 한다. 아무리 내가 모를 보이지 않는 지혜들이 있다 한들 가치 없고 쓸데없는 일에 전념하거나 나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눈치채지도 못하고 방관만 한다면 내 시간들은 바닷가 어느 모래벌판에 사장돼 흔적 없이 묻히고 말 것이 분명하다. 설령 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뚜렷한 나의 건축 색깔을 만들고 진정성(Calmative)을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나를 일으켜 세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
 
찾아온 의뢰인(client)에게 준비한 건축적 열정을 보이고 사람을 위한 공간의 연출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반겨주어야 그들(건축주)과 나(건축사)의 간격은 좁혀진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율적인 예술가’가 아닌 ‘긍정의 예술가’로 공간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    
카이로스(Kairos). 로마신화의 일명 기회의 신의 형상을 보면 앞 머리카락은 있지만 뒷 머리카락은 없다. ‘때’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오게 마련이다.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Kronos)와 시각을 일컫는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결국 ‘때’라는 기회가 오게 되면 이를 놓치지 않고 신속하게 판단하고 포착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건축이라는 프로세스 속에서 혼자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반복되더라도 그 속에서 신속히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건축인들과 앞으로 일하게 될 예비 건축인들(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점치고 불안해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크고 작은 일들에 열중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연습과 행동이 먼저인 듯하다. 



창의의 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수십 번씩 변심을 일삼는다. 할지 말지, 갈지 말지, 그려야 할지 지워야 할지 등.  내 앞에는 늘 숱한 갈등과 기로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도 귀착되는, 늘 숨어있는 한 가지. 바로 진심(Sincerely)이 아닐까 싶다. 내 몸 안에서 벌어지는 것들과 내 몸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질서를 바로잡는 어쩌면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고 지금 이 순간 준비해야 할 것들을 나열하는 일부터 마무리해야 한다. 더 가까이에서 쳐다보고 조금만 더 자세히 상상해 보면 ‘빛나는 건축’이 현실로 더 일찍 다가올 수 있다고 믿는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보이지 않는 소통과 길들의 선(動線)이 교차하고 간섭하면서 만들어지는 불편함을 차단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지나지 않는 철저히 사색하는 공간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건축사로 남는 것이다. 단 몇 분조차도 쉴 새 없이 생각하고 그려내고 만드는 일에 열중하지 않으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공간의 채움과 비움 그리고 분할과 균형은 절대로 형성될 수가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집과 집이 아닌 것의 차이를 굳이 구분하지는 않지만, 다분히 상업적이고 사무적인 공간을 설계할 때에는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로 인해 좀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평가를 하는 것도 어렵지만 평가받는 것은 더 부담스럽다. 화성 봉담에 크지는 않은 카페 하나가 만들어졌다. 건축주의 관심 속에 또 하나의 생명(건축물)이 한 생애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여러모로 크다. 길 위에 한자리 차지하고 수십 년 그 땅을 지키며 수명을 다하는 날까지 그 속에서 빛나주기를 항상 바란다.



인연의 힘
풀과 나무 그리고 그를 품은 숲과 그를 키워낸 대지. 한 번도 같은 땅을 마주해 본 일은 없고 항상 새로운 레벨과 주변 환경이 만들어 주는 심리적 부담감. 더불어 모든 것을 결정지어야 하는 마인드셋(Mindset, 마음가짐)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하다. 건축사로서 내가 선택할 권리도 있지만 선택받고 책임질 의무도 함께 있으니 아무리 흥미롭게 땅 위에 능력을 펼칠 수 있다 하여도 인연이란 굴레 속에서 조율과 타협이 없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위로할 기회조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볼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을 나열하는 일에 열중해야만 한다. 이미 나를 스치고 지나간 인연을 어찌할 순 없다손 치더라도, 다가올 인연을 위해 막연히 기다릴 수는 없기에 지금 내 공간에서 채비하고 마중할 것들을 채워놓아야 한다. 나에게 모자란 것과 알아야 할 것들을 그 사람을 위하여 한 아름 가득 서랍 속에 준비해 놓지 않는다면 나에게 올 기회(Opportunity)는 사라지고 만다. 코윈 베넷(Corwin Bennett)의 『인간(人間)을 위한 공간(空間)』에서 동기(Motives)와 기억(Memory)에 대해 언급했다. 건축사와 건축주의 인연 속에 디자인에 대한 물리적 기술과 또는 정서적 능력에 대한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건축적 계획(Plan)과 삶적인 계획(Plan)에 대한 조화와 절묘한 결합이 요구되기에 디자인에 대한 옳음(True)와 그름(False)의 차이는 쉽게 알 수가 있다. 


공감의 힘
건축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건축을 만든다는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하나 없는데 늘 그 자리에서 마주하던 새벽과 저녁. 보편적인 일상이 나에게 주는 감흥보다는 소소하게 풀어내야 할 건축 이야기와 숙제들로 몸살을 앓는다. 성공하기보다는 ‘성숙’해지고 정상보다는 ‘최상’을 고집해야 하는 이유가 누구에게나 있다. 이기기보다는 ‘이해’하고 설득하기보다는 ‘설명’을 하는 과정과 건축설계의 프로세스들이 내 손끝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 된다. 숙련된 자세로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함께 호흡하면서 마치 기계처럼 나를 헐값으로 부려먹더라도 나를 감동시키는 것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된다. 서있는 위치가 달라도 건축은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또한 내가 만들어낸 치수, 형태, 그리고 공간의 무게는 함께 누려야 할 양감(Mass)이 되어야 한다. 내가 건축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나의 눈과 손, 그리고 나의 디자인의 본질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베통 브뤼(béton brut, 노출 콘크리트)’로 메르세유에 세워진 르꼬르뷔제의 유니테 다비따시옹(Unité d’Habitation)이 192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뒤로 하고 이후 많은 건축사들의 우상처럼 남은 이유를 회자해보고 싶다. ‘공감’이 없는 집이 한낱 동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소설이 독자의 가슴 속에 쓰여지듯 건축은 땅 위에 쓴 시가 되어야 한다.

새 프로젝트의 시작에.
한라산이 내려다보는 바다. 그 바다 끝을 살짝 바라보는 동홍동 작은 두 대지. 귤 밭을 치우고 서귀포시 동홍리 경사지 땅에 바다와 산 그리고 마을이 공감할 한편의 공간을 그려낼 요량이다.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건축을 향하여 잰걸음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설렘 반. 두려움 반.


사색의 힘
어느 방향을 보아야 할까? 나는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자세로 서있어야 하는 걸까? 사람도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올곧게 서있는 듯하지만 눈여겨보면 허점 투성이다. 도시를 배회하는 사람들의 발자국과 건축물이 남긴 긴 그림자는 볼수록 마음을 아프게 한다. 비문학가이지만, 도시가 만들어놓은 길가에 한참 서있다 보면 누구나 철학자가, 또 수필가가 된다. 채워도 채워도 다 담아내지 못하고, 비워도 비워도 끝없이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사색이라는 다디단 도구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는 계절이다. 인생을 논할 것까진 없더라도 나의 주관적인 건축적 시선을 이제는 어딘가에 꼭꼭 담아두고 싶다. 혼란스러운 하루의 종착지인 달(月)의 시간이 되면 모래알 같은 삶의 조각들을 나열하면서 지극히 일반적인 하루를 갈무리한다. 기술자인지 예술가인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나 같은 건축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내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더 높은 것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스럽게 조금 더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얼마 전 건축적인 일상을 담은 에세이 한 권을 발간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생각으로 건축을 하는지에 대해 알리기 위함보다는 내 스스로 하루를 어떻게 채워가고 있는지, 어떤 생각으로 공간을 그려내고 있는지 이즈음에서 한번 되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공간이란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에, 사람의 생각이 없이 만들어진 공간이란 있을 수 없다. 



공정의 힘
욕심들이 많은 세상이다. 아무리 자신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하더라도 바르지 않은 방법과 변칙적인 방법을 고민한다면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작년 몇 달간 우리 협회 ‘공정설계공모추진위원회’에서 잠깐 활동하다가 그만두었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등을 돌리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 기준치 이상의 사심이 들어가 있다면 신속히 반성하고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 모든 것이 이치에 벗어나거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이지 못하면 아집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자신에게 당당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나 같은 단체이지만 독자적으로 일하고 있는 우리 건축사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공정이 아닐까 또 역설하게 된다. 흔적이 남지 않는다고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지속되는 이상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 소수의 힘이 다수의 힘이 될 때 마을 뒷산 바위처럼 공정의 힘이 자리매김하리라 생각한다. 

 

 

 

 

 

글·사진. 송원흠 Song, Wonheum 세담 건축사사무소

 

 

송원흠 건축사·세담 건축사사무소

 

1994년 설계를 시작, 희림건축사사무소를 거쳐 현재 세담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단국대 등 다수 대학에서 건축설계 및 건축법규, 건축계획 등을 강의했으며 현재 동서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대한건축사협회 공정설계공모추진위원회와 남북교류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하남시·고양시·산림청 등에서 건축심의위원을 역임하고, 대법원 건축전문 심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작업실 겸 북스테이 ‘책헤는 밤’을 운영하며 건축의 다양성을 발견하고 건축주와 일반인을 위한 공간 인식개선을 위한 다양한 행사와 소모임 등을 이어가고 있으며, 산림문학회 및 문학의집․서울 등에서 시와 산문 등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건축법규』와 건축에세이 『나의 건축 온도』가 있다. 

sedam373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