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직시한 표현 2025.3

2025. 3. 31. 09:20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Expressions that face facts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거의 마지막에 걸려 있는 <누워 있는 여성>에서 정점을 찍었다.<사진 1>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을 구경했다. 정말 걸작이다. 이 전시회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에곤 실레의 작품으로 끝난다. 그런데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수는 많지 않고 유명한 작품은 오지 않았다. 반면에 에곤 실레의 작품 수는 많고 대작도 있었다. 그 하이라이트가 바로 <누워 있는 여성>인 것이다. 이 작품은 기존 아카데미즘 누드화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클림트와 실레는 모두 비엔나 ‘분리파(Secession)’의 주요 예술가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분리파답다. <누워 있는 여성>은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느꼈다.<사진 2> 클림트가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면, 실레는 대상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나 스스로가 평가할 수 있을까? 나의 결함까지도 인정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재현 예술의 역사를 봐도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작품을 만나는 건 대단히 어렵다. 근대 이전 그림으로 재현되는 대상은 언제나 소수의 권력자였다. 뭔가를 재현하는 일은 비용과 기술이 필요하다. 재현의 기술을 익힌 사람, 즉 화가는 그 수가 많지 않고, 그들의 기술을 이용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극소수의 왕과 귀족만이 자신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었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남겼다. 선조의 이미지를 물려받은 후손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 그림들이 오늘날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술은 극소수의 권력자에게 봉사할 뿐이었다. 예술이 권력의 시녀 노릇이나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서 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의뢰인들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당연히 실제보다 더 근사하게 묘사하지 않겠는가. 아내는 내가 사진을 찍어주면 확인을 한 뒤 자기가 못 나왔다 싶으면 지우라고 한다. 나는 아내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다는 걸 확인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재현된 이미지가 근사하게 나오길 바란다. 생존 욕구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그러니 근대 이전에 예술가를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사람들, 다시 말해 돈과 권력을 모두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더 젊고 활력 넘치고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묘사되길 기대하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겠는가. 

 

 


여기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5세의 그림이 있다.<사진 3> 사냥개와 함께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당당하고 권위적이다. 반면에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카를 5세는 조금 다르다.<사진 4> 턱이 튀어나와 있고, 아랫입술이 윗입술보다 더 나와 있다. 두 얼굴은 비슷하지만 티치아노는 실제 모델을 이상화했고 크라나흐는 이상화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들은 끊임없는 근친혼이 초래한 ‘합스부르크 턱’이라는 유전적 특징을 가진 외모로 유명하다. 심한 주걱턱으로 인해 교합이 안 되었고, 발음도 샜다고 전해진다. 근친혼은 치명적인 유전병을 낳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자녀들은 늘 일찍 죽고 병약했다. 그나마 카를 5세는 건강한 편이어서 58세까지 살아남아 장수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티치아노는 결함으로 여겨지는 카를 5세의 외모를 최대한 약화시켰다. 크라나흐가 그린 카를 5세는 직접 보고 그리지 않았을 것으로 예측한다. 그는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과 그의 외모에 대한 설명을 참고해서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크라나흐는 카를 5세의 궁정화가가 아니었으므로 그를 이상화시켜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인물에 대한 이러한 여러 해석을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회화라는 미디어는 대상을 이상화하기 쉽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천연두에 취약해서 인구의 10% 이상이 곰보 자국이 있는 얼굴을 가졌다. 천연두는 신분을 가리지 않아서 왕족이나 귀족 중에서도 흉터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하지만 흉터가 있는 왕족과 귀족의 얼굴을 그대로 묘사한 초상화는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얼굴보다 누드야말로 이상화가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분야다. 왜냐하면 누드라는, 다시 말해 옷을 벗고 있는 상태를 그린다는 그 특이한 상황으로 인해 이상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하다. 이 세상에 다양한 몸이 있다는 것은 미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양하게 아름다운 몸이 있다고 해석해야 할까? 아니면 뚜렷한 미의 기준이 있어서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아름다운 몸이 적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유럽 사회가 추구한 미(美)에 대한 개념에서 찾아보자. 유럽에서 미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규정되었다. 미를 뜻하는 그리스어 ‘καλός(kalos, 칼로스)’는 영어로 ‘of fine quality’로 번역된다. 이것은 그 대상의 질이 정제된 상태라는 뜻이다. 정제한다는 것은 끝이 없다. 오늘 정제하고 내일 또 정제하면서 그 질을 높이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가 조화로워야 하고, 질서가 잡혀야 한다. 그리스 예술에서 대칭성과 비례는 핵심적인 가치다. 그리스 건축은 그런 비례미가 주는 균형감을 절대적 가치로 여긴다. 사람의 인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그리스 조각은 그들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비례미를 갖추고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인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헤르메스의 조각을 보라.<사진 5> 이 조각의 인체는 그리스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조화로운 비례미를 구현하고 있다. 이런 몸은 과연 이 세상에 흔하게 널려 있을까? 이런 몸이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면 다양한 몸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준이 엄격할수록 그 기준이 미치지 못하는 대상이 늘어나는 법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아주 소수의 아름다운 몸과 다수의 그렇지 않은 몸으로 나뉠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 세상을 아름답다고 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얼굴이나 몸이 잘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일까? 유럽인들은 그러한 가치관을 만들어냈다. 고전을 뜻하는 영어 단어 클래식(classic)은 탁월한 것을 뜻한다. 프락시텔레스의 헤르메스는 탁월한 것이고, 모든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고전주의 미학은 15세기 르네상스 때 부활되었다. 르네상스라는 말 자체가 고전의 부활을 뜻한다. 다시 한번 탁월하게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때 아카데미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고전주의적 미의 개념을 체화한 사람에게 실재하는 인체는 어떻게 비칠까? 벌거벗은 몸을 대하는 태도는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누드의 미술사』에서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벌거벗은 인체는 본래 우리가 그 자체를 즐거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또 그려진 것을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학교에 자주 가서 학생들이 열심히 그리고 있는, 볼품없고 가엾은 모델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망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체는 호랑이나 설경과는 달라서, 정확히 베낀다 해서 예술이 되는 그런 주제의 하나가 못 된다. …. 벌거벗은 인물들의 집단은 우리를 감정이입으로가 아니라 환멸과 실망으로 이끈다. 우리는 모방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 글에서 벌거벗은 몸에 대한 고전주의적인 시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실재하는 인체는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적 기준은 대단히 엄격하게 확고해서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몸은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드란 결함이 있는 실제의 몸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재구성한 것만이 해당된다. 유럽 회화의 누드가 그토록 활력이 없이 형식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벌거벗은 몸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천박한 짓이 된다. 따라서 늘 우아하다고 여기는 포즈를 강요받는다. 몸매도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이상화된 몸만이 아카데미즘이 인정한 누드로 허락을 받는다. 

 

 


실레가 그린 <누워 있는 여성>은 이런 아카데미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누드는 고상해야 한다. 옷을 벗었다는, 다시 말해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은 아름답게 이상화해야만 허용된다. 그렇게 이상화된 누드는 익명의 사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형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에곤 실레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아내를 그렇게 익명의 여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를 그렇게 그저 예쁜 몸을 가진 허상의 사람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 루벤스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 안나 푸르망을 이미 그렇게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육체로 묘사한 적이 있다.<사진 6> 프란시스코 고야도 <벌거벗은 마야>라는 그림을 통해 그런 육체를 표현했다. 

 

 


하지만 19세기 말까지도 아카데미즘의 누드는 여전히 익명의 여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몸을 그렸다. 그것은 마치 만화의 캐릭터와도 같다. 그런 누드를 그린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와 알렉상드르 카바넬이다. 카바넬의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을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다.<사진 7> 나는 이 여인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라고 느꼈다. 순정 만화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무엇보다 피부의 색채가 비현실적이다. 문학에서 흔히 고운 피부를 비유할 때 ‘우윳빛’이라고 표현한다. 바로 그런 비유에 적절한 회화적 표현이다. 영국의 예술비평가 존 버거는 누드를 일종의 의복을 입은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 비유에 딱 적절한 그림이다. 우윳빛 옷을 입었다고 할까? 19세기 말까지 제도권 아카데미즘의 누드란 이런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화가는 그림도 팔고, 상도 타고, 명성도 얻을 수 있었다. 사실에서 벗어나 거짓된 화면을 구성해야 했다. 그게 바로 아카데미즘의 권위였고, 화가들은 그것을 따르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겼다.

에곤 실레의 <누워 있는 여성>은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아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은 것 같다. 아카데미즘에서는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부도덕한 그림이다. 다리를 벌린 자세는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그런 포즈가 아니다. 자신의 생식기(아카데미즘의 완고한 권위자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곳이다)를 버젓이 드러내는 자세라니 얼마나 부도덕한가. 에곤 실레의 누드가 보여주는 포즈는 특별히 자신을 우아하게 하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에곤 실레의 누드는 집에 혼자 있을 때 취하는 그런 생활 속 포즈가 많다. 피부는 어떤가? 카바넬이 묘사한 피부는 대단히 균질하다. 균질하다는 건 질서가 잡힌 피부다. 하지만 실레 아내의 피부는 균질하지 않다. 질감이 뚜렷하다. 아카데미즘은 이런 피부를 아름답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런 균질하지 않은 피부 표현으로 인해 실레 아내의 육체는 정말 살아 있는 것 같다. 정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육체를 그리려고 실레가 얼마나 고투했는지 느껴진다. 그리하여 이 누드는 아름다움의 경지에 오르는데, 그 방식은 아카데미즘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아주 고유하고 독특하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런 아내의 아름다운 육체를 구현하고 있다. 실레는 사랑하는 아내를 그렸고, 카바넬은 대중이 아름답다고 여길 만한 만화 같은 몸을 그렸다. 실레의 누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몸은 그것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사실을 직시하여 표현하는 것은 높은 경지의 태도다. 특히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대상을 재현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림은 늘 대상을 이상화하려는 유혹을 느끼는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