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와 <브루탈리스트> ② 2025.5

2025. 5. 31. 09:15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The Fountainhead> and <The Brutalist> ②

 

 

 

<사진 1> 주인공의 사촌은 가구 사업을 하는데, 19세기 미국 가구를 대표하는 윈저 체어를 판매하고 있다.

아키텍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그것도 건축이 주제인 영화는 많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1949년작 <마천루>와 지난해 개봉한 <브루탈리스트>다. 지난 호에 <마천루>를 비평했고, 이번 달에는 <브루탈리스트>를 비평해 보려고 한다. 나는 물론 디자인 칼럼니스트로서 영화 비평이 아니라 영화에서 건축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비평하려고 한다. <마천루>의 경우 작가 아인 랜드가 자신의 철학인 객관주의를 실천하는 영웅적 인물로서 타협하지 않는 아키텍트를 선정했다고 지난달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는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왜 굳이 건축 분야를 선정했을까? 그것은 건축이라는 작업이 문학이나 미술, 음악과 달리 자신의 예술 의지를 실천하는 데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혼자 고독하게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 공학자, 건축 사용자와 같은, 그의 예술 의지를 꺾을 만한 훼방꾼들이 많다. 따라서 타협하지 않는 영웅의 면모를 다른 분야의 예술가보다 건축 예술가로 더 부각하기 쉽다. 이것이 <마천루> 비평의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브루탈리스트>는 어떨까? 일단 제목부터가 20세기 건축의 중요한 양식인 ‘브루탈리즘’을 다루는 듯해서 이 영화야말로 정말 본격적으로 건축 그 자체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영화 역시 건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브루탈리즘’이 아닌 ‘브루탈리스트’라고 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이민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수많은 브루탈리스트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인공 라즐로 토스가 미국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헝가리인 아키텍트이자 디자이너,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 생존의 안도도 잠시 그는 강제로 아내와 조카와 헤어진 채 미국 땅을 밟는다. 그는 먼저 미국으로 이민 온 사촌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그의 집에 머문다. 사촌은 가구 사업을 하고 있다. 그의 매장에는 윈저 체어와 같은 19세기의 토속적인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사진 1>

 

<사진 2> 주인공의 첫 번째 건축주인 대부호의 서재는 아르데코 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이는 미국의 디자인 문화가 모더니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맡은 일은 대부호의 서재를 리노베이션 하는 것이다. 부호의 기존 서재는 아르데코 양식으로 디자인되어 있다.<사진 2>

 

<사진 3> 서재를 모던하게 레노베이션했다. 바우하우스의 상징과도 같은 강철관 셰즈 롱그가 있다.

이 역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디자인 면에서 매우 보수적이고 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르데코는 기본적으로 졸부들의 과시적인 양식이다.

<브루탈리스트>는 초반에 라즐로 토스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끔찍하게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토스가 신세를 지는 사촌 집의 아내는 그를 경멸한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일인 서재 인테리어 디자인은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지 못해 돈도 받지 못한다. 자재비와 인건비를 투자해 손해를 본 사촌은 토스에게 실망하고, 자기 아내에게 접근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집에서 쫓아낸다. 토스가 거의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촌으로부터 버림을 받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사장 막노동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있다. 바로 탁월한 재능이다. 그는 곧 미국의 건축과 디자인 문화를 뒤흔들 모더니즘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가 첫 번째로 맡은 일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의 서재가 바로 그런 모던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사진 3>

 

<사진 4> 시카고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 1951년. 바우하우스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으로 이민 와 최초의 유리 커튼월 글라스 타워를 선보였다. ⓒ AlasdairW

해리슨은 속물적이고 거만하고 무례한 대부호로서 처음에는 토스의 진보적인 디자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과시적인 아르데코에 만족하는 1920~30년대 전형적인 미국 졸부의 취향을 가진 인물이다. 그의 서재가 잡지책에 실리고 칭찬을 받자 비로소 토스가 비범한 아키텍트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건축 프로젝트를 그에게 맡긴다. 이 대목까지 본 시점에는 나는 미국 디자인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 이민 디자이너들의 성공적인 삶을 보여주는가 싶었다. 여기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건축/디자인 분야의 극적인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자.

2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은 모더니즘의 불모지였다. 그때까지 미국이 세계 문화에 영향을 준 분야는 흑인들이 주도한 스윙 재즈밖에 없었다. 미술은 입체파와 같은 모더니즘을 경멸했고, 건축은 고전주의와 고딕양식, 그리고 모더니즘의 대중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데코가 지배적이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양식을 이끈 루이스 설리번 같은 아키텍트는 20세기가 되자 일이 줄어들어 말년이 불행했다는 사실은 지난달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산업 디자인은 유선형 스타일이 대유행 했다. 미국의 모더니즘을 이끈 뉴욕현대미술관의 에드가 카우프만 주니어는 유선형 스타일에 대해 “판매의 제단에 봉헌된 요란한 통속적 미감”이라며 경멸했다. 한 마디로 2차 세계대전까지 미국의 디자인 문화는 촌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렇게 낙후된 미국의 건축과 디자인 문화를 바꾼 것은 미국에서 자라고 배운 예술가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유럽 파시즘의 재앙을 피해 일자리와 안식처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다.

바우하우스는 1930년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어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는 이미 알려진 곳이다. 나치가 집권해 일거리를 찾을 수 없었던 바우하우스의 1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와 3대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미국으로 건너 왔다. 그로피우스는 하버대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미스는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 주택과 학교 건물, 고층 오피스 빌딩 등 수많은 프로젝트를 의뢰받게 된다.<사진 4> 바우하우스의 핵심적인 교수인 라즐로 모흐이너지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사진 5> 강철관 가구를 처음으로 디자인한 또 다른 교수 마르셀 브로이어도 하버드에서 강의를 했고, 미국의 브루탈리즘 건축을 주도했다.<사진 6>

 

<사진 5> 라즐로 모호이너지가 시카고에 설립한 뉴 바우하우스, 1937년
<사진 6> 945 매드슨 애비뉴, 1966년.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대표적인 브루탈리즘 건축 ⓒ Ajay Suresh

 

브로이어는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만약 독일을 떠나지 않았다면 어떤 불행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헤르베르트 바이어 역시 미국으로 건너가 대규모 박스 생산 기업인 CCA의 경영자 월터 P 패키의 후원으로 미국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이렇게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유럽 여러 국가에서 나치를 피해 이민 와 미국 문화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수 백 명에 이른다. 미국은 인재에 목말라 있었고, 그것을 제공한 것은 유럽의 이민 예술가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영화를 보면서 라즐로 토스가 드디어 재능을 인정받아 창의력을 폭발하는구나 싶었다. 영화에서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것으로 설정된 주인공 토스는 이름이 라즐로라는 점에서 바우하우스의 교수 라즐로 모흐이너지를 연상시킨다. 또 강철관 의자를 디자인하고 브루탈리즘 건축을 한다는 점, 그리고 헝가리 태생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마르셀 브로이어를 모델로 한 것인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런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 막 후원자를 찾아 영광의 길을 걸을 것 같은 라즐로 토스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준 바로 그 인물인 해리슨으로부터 고통당하고 버림받는다. 영화 내내 토스에게 무례했던 해리슨은 술에 취한 토스를 폭행하기에 이른다. 토스의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태도를 역겹다고 여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진정한 브루탈리스트는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폭군 같은 대부호 해리슨이다. 그의 아들 역시 똑같이 무례하고 건방지고 토스 가족에게 위협적이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무려 4시간에 가깝다. 그 많은 시간을 긴장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바로 해리슨과 그의 아들이 주인공 라즐로 토스와 그의 가족에게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거만한 부호는 이민을 와 갈 곳 없는 예술가에게 재능을 꽃피워줄 것처럼 선심을 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조카를 통제하려고 한다. 해리슨 부자가 토스 일행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권력과 금력을 모두 가진 자가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대하는 것과 같다. 힘도 없고 돈도 없지만 재능이 있으므로 그것만 이용할 뿐이다. 이런 상황을 남편보다 참을 수 없었던 토스의 아내는 결국 해리슨의 악행을 폭로하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엄청난 긴장과 불편을 선사하는데, 그 모든 것이 해리슨 부자의 거만과 무례로부터 비롯한다.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는 늘 갈등하고 긴장하는 관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묘사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무례하지는 않다. 2차 세계대전 뒤 이민 온 바우하우스 출신 아키텍트에 대한 미국 건축주들의 태도는 오히려 존경과 숭배에 더 가까웠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의 스토리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 역시도 건축 그 자체를 다룬다기보다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보았다. 그것은 백인이 아닌 이민자, 그리고 힘없는 민족 또는 국가에 대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거만하고 지배적인 태도가 아닐까? 나는 특히 요즘 트럼프의 상식을 초월한 폭압적인 외교를 보면서 더욱 그런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영화나 문학은 그것을 만든 이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읽는 관객의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영화 제목 ‘브루탈리스트’를 이렇게 해석하려고 한다. 이 단어는 먼저 20세기 중반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주인공은 영화에서 브루탈리즘 아키텍트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진짜 부르탈리스트는 아키텍트가 아니라 해리슨과 그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대변하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곧 브루탈리스라는 메시지다. 그렇다면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왜 굳이 건축이라는 분야를 선택했을까? 이 역시도 <마천루>가 작가의 철학을 대변하는 분야로 건축을 선택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건축이란 어느 예술 분야보다 아키텍트와 건축주의 대결이 극명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분야다. 문학이나 미술, 음악으로는 작가를 그렇게 괴롭히는 괴물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다. 이 영화에서 라즐로 토스는 돈 때문에, 자신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학자, 무엇보다 건축주와 격렬하게 싸운다. 그 싸움은 이길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영화의 막바지에 토스 아내의 폭로로 해리슨은 갑자기 사라진다. 그의 가족과 손님, 하인들이 해리슨을 찾기 위해 토스가 디자인했으나 공사가 중단된 건물로 들어간다. 아무런 마감 없이 거칠고 삭막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관객을 압도한다.<사진 7>

<사진 7> 영화 막바지에 등장하는 라즐로 토스의 브루탈리즘 건축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건축물은 미학적으로 훌륭해 보이지만 쓸쓸하고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닌 곳으로 느껴진다. 아침이 밝아오자 건물 입구에 놓인 대리석 위에 십자가 모양의 빛이 연출된다. 이것은 라즐로 토스가 이 건물에 의도한 핵심적인 디자인이다. 이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 해리슨이라는, 또는 미국이라는 브루탈리스트에 대한 구원인가, 아니면 단죄인가?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