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31. 09:1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Making Use of Context
한 십 년 전 금호미술관에서 20세기 부엌과 디자인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는 20세기 부엌 디자인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는 두 개의 부엌이 전시되었다. 하나는 프랑크푸르트 주방이고, 또 하나는 유니테 다비타시옹 주방이다. 두 주방은 현대적인 공간에 맞는 ‘모던 키친’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두 개의 부엌은 그 접근 방식이 전혀 다르다. 마가레테 쉬테-리호츠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주방은 작업주방으로서 기능성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했다. 아주 작은 공간에서 주부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다.<사진 1> 반면에 샬롯 페리앙의 부엌은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유명한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위해 개발한 것이다. 이 부엌은 물론 기능성도 꼼꼼히 따져보았지만, 더 고려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가족과의 유대다. 프랑크푸르트 주방은 주부의 동선을 최소화하고자 아주 협소하게 디자인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주부 한 명만 들어가서 일할 수 있다. 그곳은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부터 고립되고 폐쇄된, 오직 일을 위한 공간이다.
반면에 유니테 다비타시옹 주방은 폐쇄된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 부엌 가구가 배치되는 형식이다.<사진 2>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공간은 거실과 식당, 부엌까지가 개방되어 있다.<사진 3> 따라서 부엌에서 주부가 일하는 모습을 가족이 볼 수 있고, 대화도 가능하다. 샬롯 페리앙은 주부가 고립된 공간에서 혼자 묵묵히 일하는 것은 가족 공동체의 유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아내, 또는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시각적으로 눈에 들어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힘들게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음식에 대한 고마움이 더할 것이다. 나아가 개방된 공간 안의 부엌은 주부만 아니라 남편과 자녀들 모두의 공간이 된다. 오늘날 아파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택에서 주방은 개방된 곳에 놓인다.
그렇다면 전시장에서 그런 두 가지 차이를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이 쉽지 않다. 프랑크푸르트 주방은 고립된 주방이어서 그냥 그 내부를 감상하는 것으로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유니테 다비타시옹 주방은 거실과의 관계라는 그 맥락을 되살려 전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부엌만 보여주어서는 안 되고, 부엌 뒤로 식탁, 식탁 뒤로 거실까지 함께 설치를 해야 유니테 다비타시옹 주방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비용상 어렵다면 사진이라도 붙여서 맥락을 살려줘야 한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전시장에 작품이 놓이게 되면 대부분 맥락이 제거된다. 왜냐하면 미술관의 전시장은 축약을 요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회화를 예로 들어보자. 회화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근대가 되기 전까지 회화는 반드시 특정 집안을 장식하는 물건이었다. 회화는 값이 비싸므로 주로 귀족의 대저택 갤러리 공간 같은 곳을 장식했다. 갤러리는 외부인에게 공개되는 곳으로 온갖 값나가는 물건으로 장식된다. 거울, 비싼 가구, 태피스트리, 조각, 그리고 회화다. 회화는 주로 그 귀족 집안의 조상들과 현재 살고 있는 주인 가족의 초상화가 대부분이다. 그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그런 커다란 초상화를 보면서 그 집안이 얼마나 뼈대 있는 가문인지 확인한다. 결국 초상화는 그곳이 놓인 곳, 즉 그 집안 가족과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따라서 그런 초상화들은 반드시 그 집에 있을 때 가치가 있는 법이다. 오늘날 관공서에 가면, 예를 들어 구청에 가면 역대 구청장의 사진이 놓여 있는 공간이 있다. 대개는 외부인들이 와서 회의를 하는 그런 넓은 공간이다. 이런 식으로 관공서는 그곳을 책임진 역대 인물들의 사진을 전시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진이 은근하게 그 관공서에 대한 권위와 신뢰를 강화하기도 한다. 만약 그런 사진 중 하나를 선정해 미술관에 놓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구청에서 빠져나온 구청장의 사진은 그냥 평범한 인물사진으로 전락하고 만다. 아무도 그 사진이 갖는 의미를 추측할 수 없다.
루브르 박물관에 놓인 그 수많은 초상화들이 그렇게 전시된 것이다. 그 초상화들은 원래 모두 각자의 집에서 그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다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하나의 장소에 모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초상화들의 구실, 다시 말해 각 귀족의 권력을 강화했던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것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전시와 감상이 주된 기능인 미술관에 미술품이 놓였을 때 사라지는 것은 바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맥락이 제거되면 순수한 감상의 길이 열린다. 그 감상이란 바로 형식적이고 미적인 부분이다. 초상화를 볼 때 화가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렸는지, 붓터치 같은 표현 기법이 얼마나 개성이 있는지, 그밖에 표현된 사람의 얼굴 표정, 입고 있는 옷, 앉아 있는 의자 같은 사물에 감상이 집중된다. 하지만 그 초상화가 원래 어떤 목적으로 그려졌는지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결국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이해보다는 감상을 목적으로 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진에서 ‘누끼’를 따는 행위와 같다. 누끼는 이미지에서 특정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배경을 제거하는 인쇄 기술의 일본어다. 예전에는 일본어가 많이 쓰였다. 우리 말로 순화하면 ‘윤곽선 따내기’ 정도가 될 것이다. 누끼를 따낸다는 것은 배경을 제거함으로써 그 대상이 주변과 맺었던 관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 있는 북극곰의 사진을 찍은 뒤 배경을 제거하면 그 북극곰이 동물원에 갇힌 북극곰인지 북극에 있는 곰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 곰의 외모만을 감상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미술관에 들어가서 그토록 무기력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시된 작품의 맥락이 이렇게 모두 끊어져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미술관에서 점점 설명이 늘어나는 추세다. 오디오 가이드가 동원되고, 정기적으로 도슨트가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최근에 폴란드 포스터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이 포스터를 그냥 나열하게 되면 관객들은 무엇을 감상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맥락을 살려서 전시회를 기획해 보고자 했다. 미술관은 이제 순수한 미적 감상의 차원을 넘어 미술품이 만들어지게 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배경, 즉 맥락을 살려내는 일에 좀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사람들은 미적 감성을 넘어 이해의 길에 이를 때 훨씬 큰 만족감에 이른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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