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30. 09:1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Rewards for creation
한강 작가가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을 받자 엄청나게 많은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상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품절이 되었다. 한강의 소설은 상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똑같다. 노벨상은 올림픽 금메달과는 다르다. 운동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이나 대회 우승을 목표로 매진한다. 하지만 소설가는 노벨상과 같은 상을 받으려고 글을 쓰지 않는다.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글을 쓴다. 따라서 노벨상이나 부커상과 같은 문학 분야의 상, 칸이나 아카데미 같은 영화제의 상은 덤일뿐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도 마찬가지다. 운동선수의 금메달은 그 선수의 능력을 증명하지만, 상은 그렇지 않다. 운동선수의 기량은 경쟁을 해야만 증명되고, 이겨야 보상을 받는다. 반면에 창조적인 일, 소설이나 시, 영화, 음악, 춤들은 발표가 됨으로써 그 기량은 다 발휘된 것이다. 창조의 보상은 그 작품이 대중에게 발표되고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그 기량의 평가는 토너먼트나 리그전처럼 서로 경쟁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은 아주 극소수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더욱더 창조의 보상이 될 수 없다. 노벨상은 1년에 딱 한 명에게 준다. 100년이 지나면 100명에게 주는 셈이다. 따라서 상을 받지 않은 대가들이 상을 받은 대가들보다 훨씬 많다. 그러니 수상 여부는 작가와 작품 세계의 질이나 가치와는 별 관계가 없는 셈이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조지 오웰,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버지니아 울프 같은 위대한 작가들도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상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작가의 작품은 변함이 없다. 그대로 있을 뿐이다. 단 작품 판매에는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노벨상이나 부커상, 프리츠커상, 아카데미상들은 모두 어찌 보면 해당 산업의 프로모션 이벤트로서 기능한다.
그러니 상을 받으면 축하할 일이고, 개인에게는 영광이지만 받지 못해도 슬퍼할 일이 아니다. 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작가로서 그의 자긍심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은 이미 완성되었고 그 가치는 오히려 책의 판매나 비평가들의 평가로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학인들이나 영화인들에게 상을 덤이라고 한다면 덤은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스스로 작품에 만족했느냐 또는 시장에서 그 작품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냐로 충분하다. 그런데 그런 상을 받지 못해 안달하는 사회 풍토가 만연한 곳이 한국 사회다. 어렸을 적을 돌이켜보면 ‘한국인들도 노벨상을 타야 한다’는 열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다. 그때는 1970년대이니 한국이 아직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이다.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은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더 잘 사는 나라에서 인정을 해줄 때 비로소 기분이 나아지고 뭔가 큰 성취를 이뤘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그렇게 노벨상 타령을 하고 노벨상을 타는 것이 무슨 개인과 국가의 위대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부추기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상은 이른바 선진국 작가들이 독식해왔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의 문학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상을 못 받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라가 명성이 없으니 그만큼 그 나라의 작품도 덜 소개되는 것 아니겠는가? 1970년대 한국 문학은 영어로 번역된 것이 드물었다. 그렇게 적은 수이니 전문가들이 뽑아줄 근거가 부족하다. 반면에 일본의 문학은 엄청나게 번역되고 소개된 만큼 다양한 작품에서 가려 뽑을 수 있어서 근거도 충분하다. 또한 일본과 중국은 문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미디어로 서구 사회에 엄청나게 소개되었다. 그 양과 질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서구인들에게 한국은 낯선 나라였다. 상이란 좀 더 친숙한 국가에 돌아가기 마련이다. 어쩌면 한강 작가가 수상을 한 것은, 작품성은 기본이고 국가의 위상이 올라간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은 선진국이 되었고 영화와 드라마, 음악이 해외에 널리 소개되고 인기도 많아져서 더 이상 변방의 낯선 국가가 아니다. 그 덕을 전혀 보지 않고 작품의 질로만 상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강 이전에도 뛰어난 작가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국가의 명성 덕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츠커상도 받을 만하지 않을까? 프리츠커상 역시 선진국의 전유물이었고, 일본인들도 많이 받았다. 한국도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곧 프리츠커상을 받는 아키텍트가 생길까? 하지만 건축은 문학과 다른 점이 있다. 건축 역시 국가의 위상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축이 작가의 자율성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건축주의 태도가 좋은 건축을 만드는 데 결정적이다. 소설가, 화가, 작곡가는 타인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추구할 수 있다. 그것이 잘 팔리든 말든 상관없이 말이다. 한 마디로 커다란 자율성을 갖고 창조 작업에 임할 수 있다. 그런 자율성은 작품을 만드는 데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시와 소설, 작곡, 그림 등은 그야말로 작가의 재능과 노력, 거기에 필기구와 종이, 악기, 물감, 캠퍼스 같은 재료만 있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건축은 작은 집을 만든다고 해도 최소 수억 원의 비용이 투입된다. 그렇게 돈을 대는 사람은 건축 예술가가 아니라 건축주다. 그만큼 건축의 자율성은 위협받을 소지가 크다. 돈을 주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간섭을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돈을 주는 건축주의 취향이 아키텍트의 예술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주의 탁월한 취향이 아키텍트의 재능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건축 예술은 창조자에 의해 자율적으로 완성되는 법이 없다. 그러니 국가의 위상만큼이나 건축주의 취향이 좋은 건축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프리츠커상을 받으려면 뛰어난 아키텍트를 양성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건축주의 취향 역시도 높아져야 한다. 뛰어난 아키텍트를 만드는 일은 개인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질 좋은 교육과 유학, 경험과 건축 정보의 유통 등으로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다. 즉 계획적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통제하며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건축주의 취향을 계획적으로 높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건축주를 교육시켜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 결국 사회 전반의 건축문화가 발전하는 것이 건축주의 취향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도 아키텍트만큼이나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의 작품세계를 간섭하는 것은 의뢰인뿐만이 아니다. 소비자의 취향 역시도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으로 말하자면 의뢰인보다 오히려 소비자의 취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의 디자인은 수준이 높다. 반면에 조명 디자인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다. 왜 그럴까? 한국인은 70% 이상이 아파트나 연립주택 같은 공동주택에서 산다. 공동주택은 조명을 빌트인으로 제공한다. 따라서 세대주는 조명을 따로 시장에서 구매하지 않고 빌트인 된 그 상태 그대로 사용한다. 한 아파트 단지 내의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조명 아래에서 삶을 사는 셈이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에서는 결코 조명문화가 발전할 수 없다. 조명에 대한 소비자의 취향은 그저 밝으면 만족하는 상태에 머무른다. 그러니 조명 회사도 아파트에 대량으로 납품하는 조명만을 연구할 뿐 조명 기구의 조형성에 대해서는 큰 투자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한국의 고유한 주택과 인테리어 문화로 조명 디자인으로는 돈을 벌기 힘들고 이 분야가 낙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해외 유학파 디자이너들에 의해 갤러리에서 유통되는 조명 분야가 앞서나가고 있지만, 그 수요란 높지 않다. 좀 더 광범위한 소비자들이 스마트폰이나 가전제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조명을 신중하게 고르고 구매할 때 비로소 조명 디자인이라는 분야도 진보할 수 있다.
시와 문학, 음악은 우리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에도 좋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좋은 작품들이 꾸준히 만들어진 원인은 작품은 완성하는 데 드는 낮은 비용에서 비롯한다. 단지 나라의 위상이 높지 않아 국제적인 상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반면에 건축이나 디자인은 건설비와 개발비가 많이 드는 만큼 작가는 돈을 대는 의뢰인의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국가의 위상이 올라간다고 상을 받는 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꼭 상을 받아야 할까? 20세기에 한국 사회가 그토록 노벨상을 받으려고 욕망했던 건 서구인으로부터 문화적 선진국임을 인정받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인정을 이미 받았다면 굳이 노벨 문학상이니 프리츠커상이니 하는 것을 열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화적으로 우수하다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상을 받으면 좋겠지만, 받지 못했다고 문화적으로 후진국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정부는 ‘넥스트 프리츠커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재능이 있는 젊은 아키텍트를 선발해 해외의 유명 건축 스튜디오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한 사람당 3,000만 원의 연수비를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중국과 인도의 아키텍트도 탔는데, 왜 우리는 상을 못 타냐고 문제를 삼는다. 이런 프로젝트 자체가 열등감을 고백하는 꼴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창조적인 분야의 보상이란 스포츠처럼 경쟁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보상은 사용자가 즐겁게 사용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은 그저 덤일뿐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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