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30. 09:1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The Paris Olympics opening ceremony, a case of the tail wagging the dog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기획자는 기존의 올림픽 개막식이 무척 지루하다는 전제로 이번 행사를 계획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부터 시작해 200개가 넘는 나라가 알파벳 순서대로 트랙으로 들어서고 마지막에 개최국이 등장하는 이 선수단 입장식이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전 세계 관객 대부분에게 자기가 모르는 선수들이 입장하는 모습이 그리 흥분되는 일은 아니다. 이런 지루함과 일종의 군대식 사열을 지양하려면 스타디움을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센강에서 펼쳐진 이번 개막식은 선수단 입장과 세계적 가수들의 공연, 성화 봉송, 패션쇼와 춤과 서커스, 그리고 파리라는 유서 깊은 도시의 역사적 장소와 관광자원의 부각이라는 다채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줬다.<사진 1> 많은 이들이 그 과정에서 종교적 모독과 성 정체성 문제가 불편하다고 지적했다. 주최 측은 이 점을 사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이 개막식이 사리에 맞지 않은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스포츠와 선수의 실종이다. 한 마디로 화려한 쇼가 개막식의 본질인 선수단 입장과 개막식의 주역이어야 할 선수들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완전한 주객전도다.
각국 선수단이 센강을 따라 배를 타고 등장하는 형식은 사열식 입장의 지루함을 회피하려는 주최 측에게 몇 가지 장점을 가져다준다. 첫째는 센강과 그 주변의 관광자원을 전 세계에 홍보할 수 있다. 둘째는 각 선수단이 탄 배의 속도를 조절함으로써 중간중간에 쇼를 보여줄 수 있다. 이로써 끊임없는 선수단 입장이라는 기계적 반복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정작 올림픽 개막식의 본질을 흐려버린 것이다. 당당하게 입장해야 할 선수들이 배의 갑판 위에 얌전하게 서 있자 마치 센강을 유람하러 온 관광객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다른 나라 관객에게는 심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국에서만큼은 자랑스러운 기수는 그 역할이 증발되고 말았다. 그저 국기를 들고 서 있을 뿐이다. TV를 시청하는 전 세계 관객에게 선수단보다 배와 센강, 그리고 파리가 자랑하는 다리와 주변 건물이 보일 뿐이다. 완벽한 파리 관광 영상이 되었고, 선수들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입장하는 나라마다 선수단의 규모가 다른 데에서 발생한다. 미국이나 개최국 프랑스처럼 대규모 선수단은 커다란 배를 타고 이동한다.<사진 2> 반면에 한국처럼 중간 규모나 소수가 참여한 나라는 한 배를 나누어서 타고 입장한다.<사진 3> 그러다 보면 어떤 나라 선수단은 배의 선수에 자리 잡고 어떤 나라 선수단은 선미에 자리 잡는다. 선수나 선미는 배의 중앙보다 위치가 낮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선수단은 왠지 초라해 보인다. 스타디움에서 입장을 하면 선수단의 규모가 크든 적든 그들이 밟는 땅, 즉 트랙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하지만 배로 입장을 하게 되면 그들이 밟은 땅, 정확히 말해 그들이 탄 배는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누구는 캐딜락 리무진을 타고 등장하는데, 누구는 미니를 타고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의 주요 메시지 중 하나는 평등이다. 하지만 이렇게 배라는 이동 수단으로 입장하는 바람에 차별이 노골적으로 전시되었다.
선수가 들러리가 된 결정적인 장면은 입장식이 모두 끝난 뒤 벌어지는 성화 점화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센강에서 개막식을 하다 보니 최종 개회식 선언이나 점화식이 벌어지는 장소의 객석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사진 4> 그곳에 임시로 마련된 관람석은 1만 개도 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그곳에 입장이 허락된 사람은 대개는 VVIP들일 것이다. 티켓을 구입한 일반인은 소수일 뿐이다. 이 역시 평등하지 않다. 이 작은 공간에 패션쇼의 런웨이가 마련되었고 그 위에서 성화를 봉송하는 스타들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과 스페인의 테니스 영웅 라파엘 나달이다. 두 사람이 무대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각국의 선수들은 마치 레드 카펫을 밟고 지나가는 스타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본다. 무대 밖으로 쫓겨나 익명의 일반인으로 강등된 선수들은 두 명의 스포츠 귀족을 우러러보며 연신 사진을 찍고 있다. 여기에서도 정작 주역이어야 할 선수단은 들러리가 되었다. 게다가 성화는 최종 무대에서 벗어나 루브르 미술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지나 한참 먼 장소로 가서 점화되었다. 그동안 선수단과 관객들이 있는 장소에서는 에펠탑의 조명 쇼가 펼쳐졌고, 모든 사람들은 그 화려한 쇼에 넋을 잃고 있다. 번쩍거리는 에펠탑이 성화 점화보다 더 압도적인 장관을 연출했다.<사진 5>
이런 파편화된 쇼를 보면서 기존 스타디움 개막식이 지루하더라도 왜 그렇게 펼쳐질 수밖에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스타디움에서 개막식을 하면 전 세계 선수단이 모두 함께 경기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섞이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타디움 필드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를 함께 구경한다. 이때 필드에서 연예인들이 펼치는 무대와, 그 주변에서 그것을 보는 선수단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사진 6> 이번 올림픽처럼 무대 밑에서 쇼를 구경하는 처지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쇼가 펼쳐지는 동안 선수단은 관객이면서도 여전히 주인공으로 남는다. 그들이 함께 섞여 다른 나라 선수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개막식을 즐기는 모습이 TV 화면에 잡힌다. 그렇게 스타디움 안에서 쇼가 펼쳐질 때, 다시 말해 쇼가 펼쳐지는 장소와 관객과 선수단이 분리되지 않을 때 개막식의 주인공은 선수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화면에도 빈번하게 많이 잡힌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나는 선수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수만 명 관중들의 열기와 함성 속에서 쇼가 펼쳐지고 점화식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더하는 법이다.<사진 7> 주최 측은 이번 올림픽 개막식은 거리에서 일반 시민이 보기 때문에 60만 명 이상이 티켓을 사지 않고 보았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적게는 7만에서 많게는 10만 명이 운집한 스타디움에서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것과 달리 파리 올림픽의 입장식이나 점화식은 매우 산만할 뿐만 아니라 그 가치가 소멸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산만하게 파편적으로 마치 영화의 서사를 만들듯이 개막식을 기획했을까? 나는 올림픽 주최자들이 뭔가 조급증을 앓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시청자의 눈을 뗄 수 없게 하려고 전전긍긍한다. 그 이유는 먼저 올림픽의 가치와 흥행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올림픽은 그야말로 최고의 전 지구적 행사였다. 평소 스포츠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조차 올림픽 기간에는 TV 앞에 앉아 응원했고 자국 메달리스트를 영웅으로 기억했다. 영웅이 본국에 도착하면 카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메달리스트들은 방송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올림픽 말고도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가 엄청나게 다변화되었다. 특히 프로 리그가 발전한 선진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프로 스포츠뿐만 아니라 게임, 공연, 오티티(OTT) 서비스, 그리고 자기가 구독하는 각종 유튜브 방송 등 디지털 혁명이 일어난 뒤 볼거리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제는 메달을 딴 선수를 기억하지 못한다. 메달의 가치도 예전 같지 않다. 올림픽 경기보다 자국 스포츠리그에 더 열광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는 나라의 열의도 예전 같지 않다. 이번 2024년 올림픽도 경쟁 도시 중 세 곳이 중도에 포기했다. 파리와 다음 주최 도시인 LA는 무혈입성하다시피 했다.
15일 정도의 행사를 위해 수조 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도시로서는 필사적으로 흥행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흑자를 볼 수 없다면 다른 것이라도 얻어야 한다. 과거 올림픽 개최가 절대로 흑자를 볼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치했던 이유는 국가적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동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뒤 주최 도시인 도쿄, 멕시코시티, 뮌헨, 몬트리올, 서울, 바르셀로나, 시드니 등이 모두 그러했다. 21세기에 열린 올림픽 중에서는 베이징과 리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1984년 LA 올림픽은 국가 이미지 위상과는 관련 없이 상업적인 올림픽으로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했다. 글로벌 기업을 파트너로 끌어들이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상업성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21세기 들어와 런던이나 파리 올림픽은 브라질 리우나 중국 베이징과 같은 개발도상국 올림픽과 달리 극단적일 만큼 상업적 흥행에 집착한다. 그리하여 경기장 건설을 최소화하고 흥행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앞으로도 올림픽 개최는, 특히 선진국의 개최는 국가 위상보다는 상업적 흥행에 열을 올릴 것이다. 그런 시대 흐름이 반영된 것이 바로 이번 올림픽 개막식이 아닐까 한다. 스포츠 자체, 그러니까 개막식의 본질인 선수단의 입장과 그들의 면면을 알리는 것보다 중간중간에 벌어지는 쇼와 관광 도시 파리의 홍보가 메인 콘텐츠가 되고 오히려 선수단은 뒷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파격적인 개막식의 두 번째 이유는 21세기 디지털 시대 관객들의 시청 태도 변화다. 사람들은 이제 하나의 미디어에 고정되어 즐기지 않는다. 디지털 세상이 오기 전 올림픽 개막식을 보는 관객은 TV 앞에 앉아서 지루하든 말든 꼼짝없이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관객은 이른바 더블 스크린에 적응되어 있다. 하나의 미디어만 보는 경우는 없다. TV를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패드나 스마트폰을 동시에 본다. 컴퓨터를 틀어놓고 하나의 스크린으로는 스포츠를 보면서 동시에 다른 스크린으로는 드라마를 본다. 더블 스크린도 부족해 트리플 스크린을 틀어놓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아주 잠시도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하는 현대인의 태도를 반영한다. 조금만 지루하면 다른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만약 그렇게 옮길 스크린이 없다면, 즉 스마트폰만 손에 쥐고 있든지 아니면 TV만 볼 수밖에 없다면, 잽싸게 채널을 바꾼다. 이는 현대인이 더 이상 긴 영상을 볼 수 없음을 보여준다. 10분도 버거워 한다. 1분도 참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숏폼의 전성시대는 모든 콘텐츠를 다이제스트화한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에서 20분 사이로 요약해 줘야 본다. 20부작 드라마를 1시간 만에 본다. 화면은 끊임없이 새로운 장면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올림픽의 개막식이다. 레이디 가가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다가, 센강의 선수단 입장이 잠깐 보이다가, 도시를 활보하는 성화 봉송 남자를 보여주다가, 또 화면이 바뀌어 불꽃놀이를 보여주는 식으로 끊임없이 콘텐츠가 바뀌고 화면이 전환된다. 이것은 현대인의 미디어를 보는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 성향의 관객에 맞추려면 역시 스타디움 개막식은 지루해지기 쉽고, 자극적인 화면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그리하여 전 세계인의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결국 거기에 희생된 것은 올림픽의 주역인 선수단이다. 또 하나는 올림픽이라는 거대 행사를 여는 일종의 종교의례와도 같은 입장식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희생시키기에는 너무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던가? 이런 이상한 개막식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올림픽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의 쇠락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쇠락하는 가운데 벌이는 몸부림 같은 것이다. 물론 올림픽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여전히 매력적인 행사임에 틀림없다.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에게 올림픽은 꿈의 무대다. 팬이 아닌 이상 양궁이나 사격 같은 종목은 4년에 한 번씩 보는 스포츠다. 그런 종목의 선수들에게 올림픽마저 없다면 정말 의욕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은 개최국의 투자비가 워낙 크고 과거와 같은 흥행과 국가 위상 제고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올림픽 개막식은 그 성격이 더욱 기발하게 바뀔지 모른다. 그 신호탄이 어쩌면 이번 올림픽이 될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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