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민 주택 2018.08

2022. 12. 6. 09:07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Shelter for the flood victims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수재민 주택’에서 살았다. 서울 변두리 은평구(당시에는 서 대문구) 응암동 244-2번지가 우리 집 주소였다. 사실 이 집은 고모부의 소유였다. 고모부 는 고맙게도 이 수재민 주택을 무상으로 우리에게 빌려주셨다. ’수재민 주택’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도 모르는 채 나를 포함한 형제 5남매가 거기서 컸다.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사 셔서 모두 여덟 식구였다.

집은 넓지 않았고 허름했으나 터는 꽤 넓었다. 한 100평? 남동향으로 자리잡은 블럭벽돌 건물의 정면에는 툇마루가 있었다. 어느날 새벽에 깨어 그 툇마루에 앉아 해가 뜨는 걸 바 라봤다. 붉은 기운의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는데 공기는 시원했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 고 우물 옆에 있는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렸다. 펌프질을 하면 시원한 물이 하얀 포말을 깃 털 장식처럼 달고 솟았다. 우리는 그 물을 먹고 살았다. 수도가 없던 시절이었다. 우물은 깊었다. 자주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저 안 쪽은 어쩐지 무서웠다. 여름이면 여러 가닥을 엮은 질긴 주황색 나일론 줄에 수박을 매달아 내렸다. 아버지는 수박을 좋아하셨 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가족이 마루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고 나면 우물에서 수박이 끌어 올려졌다. 깊은 우물 속에서 냉각된 수박은 매우 시원했다. 수박을 다 먹고 나면 할머니는 짭짤한 대구포를 한 조각씩 주셨다. 이걸 먹어야 배탈이 안 난다고 하셨다. 깜깜해지고 나 면 우물가에서 물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들을 깜깜할 때 그렇게 샤워를 했다.

우물 옆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에는 항아리들이 살았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한 40 센티미터 되는 그 장독대 위에 사는 항아리들의 주인은 할머니와 어머니였다. 할머니는 장독대에서 맛이 드는 간장이며 고추장, 된장 등을 늘 세심하게 관리하셨다. 장독대는 우 리 집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있었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세발자전거를 타지도 않고 선 채로 내달리며 끝도 없이 장독대를 돌았다. 어린 동생들은 엄마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4남 1녀의 장남인 나는 아주 어려서 동생들이 어머니를 차지하는 걸 봤다. 여덟 식구가 늘 복작대던 그 수재민 주택에서 나는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어렸기 때문에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당을 지나 서쪽 구석으로 가면 뒷간이 있었다. 뒷간은 무시무시했다. 널빤지로 만든 발 판을 딛고 힘을 줘야 볼일을 볼 수 있었다. 뒷간에는 벌레들이 우글거렸고 이따금 내용물 을 퍼내는 직업을 가진 분이 오셔서 인분을 거두어 갔다. 출렁거리는 인분 통에서 인분이 마당으로 튀기도 했다. 그 분은 매일 분주했다.

우리는 마당에서 구슬치기, 팽이치기, 술래잡기, 다방구 등 각종 놀이를 지칠 때까지 했 다. 술래잡기 하다보면 집의 북벽과 담 사이의 뒷뜰에 숨기도 했다. 우리는 그곳을 ‘뒷곁’ 이라 불렀다. 잡초들이 자라는 그 곳은 어쩐지 은밀했다.

집안에서만 놀던 나는 어느 날 대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우리 동네는 전체가 수재민 주택 촌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거칠었다. 다양한 지방 사투리들이 존재했지만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들은 이내 친해졌다.

어느 날 밥을 먹는데 어른들이 이사를 가야한다고 했다. 집은 새로 날 아스팔트 길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재 이 집은 언덕길에 묻혀 있고 충암고등학교 앞에 작은 터만 남아 있 다. 사실 나는 지금도 ‘수재민 주택’의 정확한 정의를 모른다.

 

 

 

 

글. 성기완 Sung, Kiwan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