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4. 30. 10:25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El Croquis
인류의 문명 속에서 정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방법이 책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최근에는 디지털 파일이나 온라인상에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지난 수백 년간 건축을 대중에게 알리거나, 건축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데 책이 가장 효율적이고 강력한 수단이었다. 월간 건축사를 통해서 건축사들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건축이 알려지고 설명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들은 많고, 이러한 잡지나 단행본을 수집하는데 관심이 많다. 관련 책들을 소개하고 그 안에 표현된 건축에 대해 살펴보고자 본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엘 크로키는 스페인에서 발행되는 국제적인 건축 잡지이다. 1982년에 Fernando Márquez와 Richard Levene에 의해 창간된 후 지금도 두 편집장이 잡지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1년에 6권 정도를 발행하며 가끔 합본이나 분본을 하기도 하며, 작가별 합본을 별도로 만들기도 한다. 원고를 작성하는 시점에는 233호까지 발행되었다.
필자의 학창 시절, 부모님의 용돈을 두둑이 받는 동기나 선후배만 구입 가능한 책이었으며, 설계실 책장에 이러한 해외 건축 작품집을 몇 권쯤은 꽂아두어야 디자인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지금도 많은 건축 작품집들은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비싼 편이지만, 엘 크로키의 커다란 사진과 선명한 도면은 직접 건축물을 답사하지는 못하지만 대리만족 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개소한 지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사무실들을 보면 엘 크로키가 책장에 진열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매체 중에서 판형이 비교적 큰 편이라서, 건축사사무소의 책장은 엘크로키가 들어가는 크기로 계획되는 경우가 많을 정도이며 그만큼 많은 건축사들이 이 책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부분 50호 이후부터 보유하는 정도이며, 30~40호부터 보유하고 있는 사무실들도 가끔 살펴지는데, 창간호부터 초기 발간된 책들은 왜 보이지 않을까 궁금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스페인을 비롯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중고책방에서 1980년대에 발간된 엘 크로키를 판매하고 있는 것을 찾게 되었고, 전권 수집을 목표로 오랫동안 사모으게 되었다.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수집을 지속하게 하기 위해 나름 갖다 붙인 이유는 필자의 사무실 이름을 한글로 읽을 경우(그리다)의 의미와 엘 크로키의 뜻이 같은 맥락을 가지는 데다, 창간호의 발행연월이 필자가 태어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발행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모든 호와 부록으로 끼워져 있던 책까지 모두 수집하다 보니 유럽 각국과 미국은 물론, 중국, 인도 등 다양한 국가로부터 배송을 받기도 했다.
창간호~6호
numero cero (number 0)으로 표기된 창간호부터 6권까지는 비교적 얇고 흑백으로 인쇄되어 중간을 스테이플러로 고정한 형태(중철제본)로 발행되었다.

마치 신문을 받아보는 느낌과 비슷했으며, 현재처럼 한 명의 건축사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작품들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작품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 수준이 기성 건축사의 작품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고 의미 있다고 보인다. 3~4호, 5~6호, 7~8호는 책 표지를 앞뒤로 붙여서 합본으로 발행하였는데, 판형과 편집방식을 정립해 나가기 위한 과도기적 실험으로 보인다.


7호~16호
약간의 컬러 사용에서 시작해 화려한 컬러사용이 시도되기도 했다. 꾸준히 소개되던 학생작품은 PFC라는 이름의 별책부록으로 나뉘어 책에 끼워진 형태가 되었다. 이들은 수집 과정에서 이 별책만 따로 구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1호에서 STUDIO PER라는 팀의 작품만 소개하는 시도가 있었지만, 다시 여러 건축사의 작품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돌아갔다.


17~29호
책 제목의 폰트가 바뀌고 또 바뀐다. 지속적인 새로운 시도라고 보이며 책의 표지도 내지와 달리 두툼한 재질을 적용한다. 점점 한 호당 한 건축사의 작품을 다루는 빈도가 늘어나고 20호에서는 내지를 한번 더 펼칠 수 있는 제본방식도 시도한다. 이 당시 ‘데 디세뇨 De Diseño’ 라는 디자인 잡지를 별도로 발행하다가, 엘 크로키와 합본 형식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가구와 소품 등에 관한 디자인 제품들을 소개하는 페이지가 있기도 하는데, 데 디세뇨와 합본은 표지의 색상을 달리하고 가격차이를 두었다.
30호 이후로는 마음만 먹으면 중고책자를 구할 수 있는 편이다. 간혹 많은 인기를 얻은 후 절판된 상태인 책은 1000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이 책들을 보며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던 시기에 벌써 유럽에서는 이만큼의 건축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에 놀라기도 하며 다양한 점을 느끼고 배운다. 많은 프리츠커 수상자들이 그 상을 수상하기 전 후에 엘 크로키를 통해 소개된 경우가 많은 점도 책의 권위를 높여준다. 엘 크로키 내용 중 칼럼에 한국 건축사의 작품이 언급된 적은 있지만, 아직 한 건축사를 주목해 소개된 호는 발행되지 않았다. 처음 엘 크로키에 등장할 한국 건축사는 누구일까. 세계에 한국의 건축을 알리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한다.



* 더 자세한 정보는 엘 크로키 홈페이지 참조 https://elcroquis.es
글. 박정연 Bahk, Joung Yeon
본지 편집국장

박정연 건축사·그리드에이(Grid-A) 건축사사무소
건축사 박정연은 전북대학교 건축공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실무를 쌓은 후 그리드에이(Grid-A)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 건축의 역할과 이를 만드는 건축사들이 놓여진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laqui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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