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향약원 별관 10년의 비움으로 빚어낸 한 건축사의 담담한 기록 2026.2

2026. 2. 27. 11:2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_ Hyangyakwon Annex
An architect’s calm record, shaped by 10 years of emptiness

 

 

<향약원 별관> A동 거실창가 © 김종오

 

다이어그램의 시대, 감각의 복원
오늘날의 건축 설계는 점차 명쾌한 논리의 싸움이 되어가고 있다. 복잡한 대지 조건과 프로그램의 얽힘을 단순한 몇 장의 다이어그램으로 치환하여 설득력을 얻는 방식은 효율적이지만, 때로는 그 명쾌함 뒤에 숨겨진 공간의 실재적 체험을 간과하게 만든다. 개념이 강한 건축은 눈에 띄지만,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의 시선과 발걸음은 종종 도식화된 논리에 갇히곤 한다.
최근 마주한 코스맥스 향약원 별관은 이러한 흐름과는 결이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이 건축물을 설계한 이호성 건축사는 설계 과정에서 다이어그램의 명쾌함보다 사람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수많은 투시도에 집중했다고 한다. 벽 하나를 세우고 창 하나를 내는 결정이 위에서 내려다본 논리가 아니라, 그 공간을 거닐 사람이 마주할 풍경의 프레임과 조경의 배치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각도 등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 하나하나 고민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이 흥미롭다.


콘텍스트에 대한 예의와 분절의 미학
별관이 들어선 대지는 기존 향약원 본관과 인접해 있으며, 주변으로는 나지막한 마을과 산세가 이어진다. 대지의 경사면에 순응하며 수평으로 길게 놓인 본관과 달리, 별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이라는 4개 층 규모의 볼륨을 수직으로 쌓아 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여기서 이호성 건축사가 선택한 해법은 나눔이다.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인접한 마을을 가로막는 대신, 상부의 백색 매스를 세 개의 독립된 분동으로 나눴다. 이는 인근 마을의 작은 집들이 가진 스케일감과 보조를 맞추려는 건축사로서의 배려로 읽힌다.
분절된 세 개의 매스는 각각 독립적인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보는 각도에 따라 중첩되며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 특히 매스의 코너를 곡선으로 처리한 디테일은 시선을 끊어내지 않고 부드럽게 매스를 받아들이게 한다. 날 선 긴장감 대신 주변 산세의 능선과 닮은 유연함을 택함으로써, 인공물인 건축이 자연 속에서 자극적인 대비보다는 차분한 공존을 꾀하고 있다.


지면에서 솟아오른 기단, 석재의 물성
상부의 백색 스타코 매스가 하늘과 자연에 반응하는 가벼운 덩어리라면, 하부의 화강석 기단은 대지의 중력을 오롯이 받아내는 묵직한 기준선이다. 건축사는 바닥 포장재부터 기단의 벽면까지 동일한 석재를 사용하여, 건물이 지면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땅 자체가 변형되어 솟아오른 듯한 일체감을 구현했다.
이 하부 기단은 단순히 건물을 받치는 기능을 넘어, 그 자체로 풍성한 외부 공간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단차를 이용해 조성된 선큰 광장과 테라스, 그리고 이들을 잇는 계단들은 연수원이라는 한정된 입지 안에서 산책의 즐거움을 주고자 하였다. 주변에 별다른 시설이 없는 입지 조건을 고려할 때, 단지 내부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간적 환기가 가능하도록 설계자가 촘촘하게 짜놓은 배려가 돋보인다. 석재가 주는 다소 차가운 물성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조경 식재와 상부 매스가 만드는 그림자의 유희를 통해 중화되며, 공간에 깊이감을 더한다.


프레이밍: 자연을 들이는 담백한 기술
내부로 들어서면 화려한 장식이나 하이엔드 디테일의 과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사는 마치 긴장을 살짝 늦춘 듯 담백하게 면을 정리했다. 이러한 비움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풍경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창은 단순히 빛을 들이는 통로가 아니라, 외부의 자연을 특정 각도로 잘라내어 내부로 전달하는 정교한 프레임이다. 거실에 앉았을 때 산봉우리가 창 중앙에 걸리고, 침실에 누웠을 때 소나무의 수형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기는 시퀀스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닐 것이다. 건축사가 설계 과정에서 수없이 그려냈을 투시도들이 현장에서 사용자의 시선과 일치하는 순간, 설계자의 공은 슬그머니 자연의 공으로 넘어간다. 자연이 주인이 되도록 자신을 낮추는 법을 아는 노련한 건축사의 솜씨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10년의 시간, 그리고 건축사의 동행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시간의 층위다. 이호성 건축사는 10년 전 본관을 설계한 이후, 건축주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건물의 나이 들어감을 지켜봐 왔다. 준공 후 사진 속 박제된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건물이 어떻게 쓰이는지, 유지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10년 동안 관찰하며 건축주와 소통해온 과정은 오늘날 건축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별관에 담긴 공간적 밀도는 그 10년의 시간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본관을 통해 얻은 경험적 데이터와 대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별관의 분절된 매스, 하부 기단의 스케일, 그리고 정교한 프레임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건물이 완공되는 시점이 끝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시작임을 인정하는 건축사의 태도는, 향약원 별관을 단순한 신축 건물이 아닌 ‘지속되는 장소’로 자리 잡게 한다.


맺음말
코스맥스 향약원 별관은 요란한 구호나 파격적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마을의 풍경을 살피고, 대지의 높낮이를 수용하며, 자연의 변화를 내부로 정중히 들인다. 이호성 건축사를 따라 건물 구석구석을 걷다 보면, 좋은 건축이란 설계자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가 가진 본연의 가치를 사용자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건축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10년의 시간을 기다려 완성된 이 공간은, 건축사가 한 대지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애정을 가졌을 때 어떤 깊이의 공간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담담하게 증명하고 있다.

 



글. 조장희 Jo Jang Hee (주)제이와이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조장희 건축사·(주)제이와이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2012년부터 조장희, 원유민 두 명의 파트너가 사무소를 이끌고 있다. 하나의 ‘건축적 지향점’ 보다는 하나의 ‘건축집단으로서의 지향점’을 추구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관점과 차이가 늘 시도되기를 바라며, 그로부터 건축의 흥미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2013년에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인테리어, 건축, 도시적 스케일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규모의 프로젝트들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jyarchitec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