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고백하는데, 널 사랑하다 건축사가 됐어 2026.2

2026. 2. 27. 10:30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I'm finally confessing this, but I became an architect because I loved you.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마당이 너른 집으로 이사했다. 집은 산동네 풍경에 적절한, 보잘것없었지만 마당만큼은 지금도 동경의 대상이다. 과실수가 하나씩 있었다. 감, 복숭아, 호두, 대추, 포도 그리고, 두어 평 남짓한 딸기밭. 나는 딸기밭이 가장 좋았다.


아버지는 너른 마당을 지킬 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퇴근하셨다. 젖을 뗀 지 얼마 안 된 작은 강아지였다. 품종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냥 똥개라고 하셨다. 모든 개는 진돗개인 줄로만 알던 시절, 별 상관없었다. 온기를 가진 생물(生物)을 처음으로 품에 안고 신이 난 나는, 내방으로 냉큼 데려다가 아랫목 이불 위에서 동고동락을 시작했다. 당시엔 ‘사료’라는 것도 몰랐기에 내가 먹는 것을 같이 먹였고 내가 자는 곳에서 같이 잤다. 아버지는 그 녀석을 ‘머루’라고 불렀다. 왜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됐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나는 그 녀석 ‘머루’를 사랑하게 됐다. 머루는 커가면서 시추나 티베탄 테리어처럼 얼굴 부분의 털이 길게 자라나서 얼굴 주변을 거의 덮은 모습을 지녔다. 삽살개 같기도 했는데, 설마! 아버지께서 어디서 ‘천연기념물’을 받아오셨을 라고.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녀석, 자라면서 똥은 잘 가렸는데 오줌을 가릴 줄 몰랐다. 이부자리 빨래가 잦아지고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가실 무렵, 머루는 결국 집 밖으로 쫓겨났다. 한 이불을 덮은 지 두어 달이나 지났을 무렵이었다. 마당에서 살아갈 녀석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도 마당에서 잘까 하는 심통도 생겼지만, 아버지를 거스를 정도의 패기 있던 아들은 되지 못했다.


사랑하는 만큼 가슴이 아픈 법!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고민하다가 개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우연히 한 골목 아랫동네에 연립을 짓는 현장이 있었고, 학교 다녀오면 그곳에 들러, 버려지는 듯한 합판 조각들을 주워 나르기 시작했다. 요즘 공사 현장도 그렇지만 현장 바닥에 못도 많았다. 몇 분을 집중해서 주우면, 한 움큼은 쉬이 모였다. 줄자, 톱과 망치 등 공구는 집에 늘 있었기에 문제 될 게 없었다.


공사가 시작됐다. 적당한 크기로 바닥판을 재단하고 바닥판 하부에는 각재를 덧대어 바닥판이 땅바닥에서 일정 간격 뜰 수 있게 했다. 옆판 두 개와 박공이 있는 뒷판을 만들어 바닥판에 결구(結構)했다. 뒷판과 한 짝이었던 앞판에는 머루가 드나들 입구를 잘라내어 바닥판과 이미 세운 옆판에 결구했다. 그리고 맞배지붕을 형성할 요량으로 박공 길이보다 좀 더 길게 재단한 지붕판 두 개를 준비하였다. 한 지붕판을 올리고 못질했다. 못질을 몇 개나 했을까? “찌그덕!” 합판 집의 비명이렷다. 벽판이 서로 벌어지며 폭삭 주저앉았다. 개집이 개판이 됐다.


지붕을 얹으니, 집이 무너지다니. 중학교 1학년 학생에게는 무리였었나 보다. 나름 자신감 갖고 시작했는데 이 사달이 나다니. 자신감의 원천은 중학교 1학년 교과과목이었던 기술 과목이었는데, ‘제도(製圖)’ 시간도 제법 충실히 이수하고 건축의 기초에 대하여 이것저것 주워들은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과 실재에는 항상 이격이 있는 법!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민했다. 주워 날라 온 합판 조각들에 눈길이 머물렀다. 몇몇에는 합판 가장자리에 각재가 붙어있었다. “아~하!” 각재가 뼈대 역할을 하는구나 싶었다. 무너진 옆판에 각재를 못질하였다.

 

다시 바닥판에 결구하고 뒷판과 앞판을 옆판 각재에 결구하였다. 지붕판 못질을 다시 시작했다. 성공이다. 맞배지붕 위에 주워다 놓은 폐장판을 덮어주고 안 쓰던 모포 한 장을 집 안에 깔아줬다. 개집이 완성됐다. 제법 그럴싸했다. 비 오는 날, 머루가 개집에 들어가 비 피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했다. 건축물의 기본 기능이리라.


마당에서 머루와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도 마당에서 살까 했던 심통을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머루집 옆에 내 집도 짓기로 했다. 규모는 줄여야 했다. 기술 시간에 배웠던 ‘축척’을 대입해서 고민했다. 1:2의 축척으로 결정했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생의 몸뚱이가 들어가서 누웠더니 딱 맞았던 기억이 나는데, 대략 가로 1m, 세로 1.5m, 높이 2m 크기의 ‘이층 합판 집’을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내겐 ‘주택은 이층집’이 선망(羨望)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해 내내, 나는 합판으로 여러 공간을 만들었다. 창고도 만들어서 책가방과 책도 보관했고, 신발을 보관하는 집도 만들었다. 집 안에 내방이 있었건만, 마당에 또 굳이…. 1986년, 그 해는 그렇게 ‘시공자’로 건축계에 첫발을 내디딘 해였다.


기억해 보건대, 그 후 내가 군대에 갈 즈음 머루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머루집은 잘 사용되고 있었지만 내 합판 집은 만들고 난 이듬해, 장마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우수에 대응하지 못한 엉성한 구조 때문이었으리라. 머루가 세상을 떠나던 때도 기억한다. 아~ 너무나도 낙망이었다. 세상에 그런 슬픔을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을 정도다. 그때의 감정 때문에 이후로는 반려동물을 길러보지 못하고 있다.


‘싹수가 보인다.’ 했던가. 머루와 생활하던 이후로, 건축학도가 되었고 건설사 취업을 거쳐 건축사가 되었다. 건축사가 된 계기나 동기가 거창하지 못하고 사뭇 미미하겠으나 돌이켜보면, 딱히 다른 이유가 없고 머루 그 녀석 때문이었다. 시작은 푸들푸들 몽실몽실… 뭐 그런 감정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삶에 지친 자화(自畫)를 보다가 마구 밀려오는 허망함에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험난한 시기에 건축사분들과 독자 여러분의 평안을 기도합니다.



 

글·그림. 조명철 Cho Myung-Chul
토미건축사사무소

 

 

조명철 건축사·토미건축사사무소

청주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종합건설 디자인팀에서 기획, 건축, 인테리어, 시공 등의 다양한 실무 경력을 쌓았다. 안전모와 안전화가 익숙해질 무렵, 건축사가 되기로 다짐했던 것을 자각하고 과감히 사직 후, 좌충우돌 끝에 건축사가 되었다. 「자연에 누(累)가 되지 않는 집」을 탐구하며 오늘도 몸부림치고 있다.
521way@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