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지키는 건축사들 건축을 하며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 2026.1

2026. 1. 30. 10:3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s who keep the line

 

 

 

최근 국내 건축설계산업은 역대 최고의 침체기라 할 정도로 불황의 그늘이 깊게 드리우고 있다.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설계로 이어지는 프로젝트는 줄고, 건축사사무소는 해마다 500개 이상 생겨나고 있다. 건축사라면 누구나 체감하고 있는 현실일 텐데, 왜 많은 건축사들이 사무소를 개소하고 어려운 산업현장으로 뛰어들까?
짐작하자면 스스로의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작업을 이어가는 건축사가 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원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 너머에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확률을 줄이고자 사무소를 열었다.
설계나 감리 업무를 수행하면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질문은 “어디까지 가능한가”이다. 이 질문은 대개 법규 해석의 범위, 설계 변경의 여지, 혹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어 온 편법의 경계를 묻는 방식으로 제기된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종종 “이 정도는 다들 한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현업 건축사로서 일하며 이 문장이 등장하는 순간을 하나의 신호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선을 넘어갈지, 아니면 지켜낼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 말이다.
예컨대 피난 동선이 기준에는 걸리지 않지만 실제 사용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협소한 계획, 도면상 주차장이나 주차가 힘든 주차공간, 혹은 예산에 맞춰 유지관리가 힘든 재료를 제안한 일들이다. 모두 법의 문장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지만, 그때마다 이 선을 넘는 순간 이후의 책임까지 함께 감당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건축사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맞닥뜨리는 현실의 조건은 늘 복합적이다. 건축법규는 촘촘하고, 대지는 제약이 많고, 예산은 한정되어 있다. 건축주는 최대의 효율을 원하고, 시공사는 공기와 비용을 고려한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건축사는 조정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문제는 이 조정이 언제부터인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기술’로 오해받고 있다는 점이다. 법규를 정면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대신,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먼저 찾는 태도는 어느새 업계 전반에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법의 선을 넘는 순간, 건축사는 더 이상 중립적인 전문가가 아니다. 책임의 일부를 의식적으로 떠안는 선택을 한 당사자가 된다. 단기적으로는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고, 관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발생하는 하자, 민원, 안전 문제 앞에서 그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되돌아온다. 그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당사자가 건축사이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처리되었던 선택이 준공 이후 민원이나 사고로 이어지며, 그 판단의 근거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 건축사가 홀로 남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그때 ‘다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어떤 방어도 되지 못한다.
선을 지킨다는 것은 이상적인 건축을 고집하는 태도와는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을 누구보다 정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내려지는 실무적 판단에 가깝다. 예산과 일정, 법규와 요구사항 사이에서 가능한 최선의 답을 찾되, 넘지 말아야 할 지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약자를 고려하는 동선, 최소한의 채광과 환기를 확보하려는 설계, 구조적으로 불리한 안을 끝내 배제하는 판단 등은 작은 일 같지만, 건축사의 직업윤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순간들이다.

자은 다목적 회관 ⓒ김용수


이러한 선택들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사업을 지연시키거나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때로는 “현실을 모른다”거나 “유연하지 못하다”는 평가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건축은 준공 시점에 평가가 끝나는 결과물이 아니다. 건축이 사용되고, 관리되고, 시간이 축적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 판단의 옳고 그름이 드러난다. 선을 지킨 설계는 즉각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를 덜 일으키며,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건축사는 의뢰인의 요구를 대변하는 사람인 동시에, 그 건축을 사용할 다수의 사람들과 도시 환경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전문직이다. 특히 사용자의 다수는 설계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미래의 사용자, 불특정 다수의 방문자, 유지관리의 부담을 떠안을 사람들까지 고려하는 시선은 도면에 명시되지 않지만, 건축사의 판단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선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건축사의 공공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선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요구를 거절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맞는 방향으로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때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건축사가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전문직으로 자리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무소를 개소하고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양한 건축주들과 프로젝트의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수없이 논의했던 제안들은 나만의 선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의 기준은 점점 더 명확해졌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가 사무소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건축사는 선을 긋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이미 그어진 선 앞에서 멈출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도면 위의 얇은 선 하나가 오랜 시간 도시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건축사는 비로소 자신의 직업적 위치를 정확히 자각하게 된다. 선을 지키는 건축사들이 많아질수록, 건축은 조금 더 느리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그만큼 오래 버티는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글·사진. 홍선희 Hong Sunhee
플랫건축사사무소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홍선희 건축사·플랫건축사사무소


제주대학교와 국민대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SOAS에서 인문학을 익혔다. 2014년에 플랫건축사무소를 설립하여 현대도시 환경에서 역사와 사회를 존중하는 건축을 하고 있으며, 지역환경과 도시맥락을 고려해 개인과 공공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순천시에서 공공건축가로 활동 중이며, 대표작으로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영월바이오센터, 자은다목적회관 등이 있다.
flatarchitects4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