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라는 장식 2026.5

2026. 5. 31. 10:15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Design as Decoration

 

 

‘온그라운드’라는 동네 카페에서 오늘날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은 미드 센추리 모던 퍼니처로 실내를 꾸민 세련된 공간이다.<사진 1> 조지 나카시마의 코노이드 의자를 변형한 것 같은 의자인지 테이블인지 모호한 가구 위에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사진 2> 이 책들은 주로 디자인과 관련된 책들이다. 가장 왼쪽에 <Revolution>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뱅앤올룹슨의 유명한 베오그램 턴테이블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류의 책은 오디오와 디자인을 사랑하는 남자들이라면 놓칠 수 없다. ‘레볼루션’이란 책 제목도 오디오와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하다. 가운데 책은 미술관 관련 책이다. 오른쪽 책은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크게 부각되어 있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 글자들이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다. 오디오, 뮤지엄, 디자인은 그 단어 자체가 지적이고 고상한 삶을 암시한다. 이 책들은 읽으라고 놓은 것 같지 않다. 읽으라고 놓았을 수도 있지만, 책의 물리적 존재 자체가 말을 한다. 여기서 책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로 기능한다. 지적이고 고상하고 수준 높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지시하고 있다. 최근에 ‘뮤지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빵 가게가 엄청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빵이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뮤지엄’이라는 단어 자체가 유혹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어떤 단어들은 장식적 효과를 낳는다.

 

<사진 1> 카페의 미드 센추리 모던 퍼니처 © kshin

 

‘테라로사’라는 카페에 가보면 여러 벽들이 파이든이나 타셴에서 출판한 예술, 건축, 패션, 디자인, 사진 책들로 장식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책 앞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진열용 서적입니다. 열람을 삼가 주십시오.” 책을 갖다 놓고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다. 온그라운드에 진열된 책들에는 이런 경고가 없지만, 그 목적은 똑같아 보인다. 공간에 예술적, 지적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소품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디자인은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감싸고 끊임없이 쓸모 있는 노동에 시달리지만, 어쩐지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사람들 머릿속에 예술만큼이나 고귀한 지위로 올라섰다. 날마다 막 쓰는 도구라는 관념이 사라졌다.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왜 그런 관념이 덧붙었을까? 그 이유는 디자인의 원래 정의와 관련 없이 사회가 디자인을 그런 지위로 끌어올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사진 2> 카페에 진열된 디자인 관련 책들 © kshin

 

근대 이전에는 예술이 권력자들에게 아우라를 제공했다. 권력자들은 예술의 아우라를 독점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현대사회에서는 디자인이 그 역할을 떠맡고 있다. 20세기에 예술가들은 스스로가 ‘권력의 시녀’라는 자리를 박차고 독립했다. 예술은 여전히 엘리트층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예술가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소명이라고 여겼다. 그런 저항은 19세기에 쿠르베와 마네가 시작해 20세기로 접어들어 피카소와 마르셸 뒤샹으로 이어졌다. 예술가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엘리트가 되고자 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엘리트를 위한 시녀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려야 한다. “나는 귀족, 권력자, 부자, 엘리트를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들을 우상화하는 인물화나 그리고, 수정해 달라고 하면 군말 없이 수정해 주는 그런 주체성 없는 노예가 아니다.” 그래서 권력자와 부자들의 얼굴을 그리는 대신 자기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은 부자들의 소유한 정물을 그리지 않고 빡으로 나가 변화하는 자연을 그렸다. 권력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질서다. 변화는 반항이다. 시녀 노릇의 중단은 권력자들이 싫어하는 것을 그리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 저항의 대표적인 행위는 ‘순수’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순수예술은 그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저항으로 예술가들은 봉사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엘리트의 지위를 획득했다. 

 

반면에 디자인은 봉사라는 그 책무로부터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쓸모 있는 도구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만들어야 내야 한다. 순수예술처럼 나의 만족을 위해 뭘 만든다는 게 숙명적으로 원천 봉쇄되어 있다. 클라이언트와 시장을 외면하는 순간 돈을 벌 수가 없다. 이때 현대 예술가처럼 독립하지는 못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이 높은 지위와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과거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자와 엘리트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이다. 과거 예술이 귀족과 엘리트들에게 부여한 아우라를 디자인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사는 집,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 그들이 쓰는 온갖 도구들, 그 모든 쓸모 있는 공간과 도구들에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거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집과 공간, 가구와 도구들 역시 예술적으로 치장되었지. 하지만 현대에는 그 대상이 좀 더 넓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궁과 귀족의 대저택, 그리고 종교공간에만 한정되었던 예술적 산물들이 오늘날에는 더 많은 곳으로 퍼질 수 있다. 일반인의 주택, 상점, 카페 등으로 말이다. 따라서 디자인이 제공하는 아우라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아우라란 유일성에서 오는 것인데, 대량생산되는 디자인은 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아우라가 권력자들의 공간을 더 우월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 것처럼 오늘날 디자인도 그런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아우라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디자인의 아우라는 관대하다. 왜냐하면 그 은혜의 대상을 소수의 권력자와 부자들에서 중산층으로 넓혔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이 바로 그 일을 떠맡게 된 거다. 여기 온그라운드에서 나는 그런 디자인의 역할을 정확히 보았다. 물론 이런 현상은 온그라운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여러 카페와 상업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세련된 공간에서 디자인은 모든 이들의 도구라기보다는 좀 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도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촌스럽고 천박한 부자들은 진정한 디자인을 이용할 줄 몰라. 미드 센추리 모던 퍼니처는 자랑하지 않고 간결하며 쓸모 있어. 이게 바로 현대 디자인의 지적이고 엘리트적인 성격이야.” 이 카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진정한 디자인을 알리는 지적인 책들이 여기저기 소품처럼 놓여 있다. 미장원에 패션 잡지가 있듯이 문화적으로 수준 높은 카페에는 디자인 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간결한 형태의 미드 센추리 모던 퍼니처와 디자인, 건축, 사진 책들은 엘리트주의를 암시한다. 벽에 걸린 그림과 사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과 사진도 책들처럼 감상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지적 수준을 암시하는 장식적 기호다. 따라서 책만큼이나 신중하게 선택된다. 오늘날 디자인은 쓸모 있는 장식품이 되어가고 있다. 장식이란 호모 사피엔스가 태어난 이래로 계급성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역할을 해왔다. 현대의 디자인은 지적이고 세련된 엘리트, 문화를 향유할 줄 아는 교양인을 표시하는 장식 노릇을 하고 있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고마워 디자인』,『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